#3. 할아버지의 마지막 선물(3)
5박스. 내 35년 인생의 세간살이 전부다.
몇 번 왕복하며 하루 꼬박 걸릴 줄 알았던 이사는 허무하게 내 작은 경차 트렁크와 뒷좌석으로 끝나버렸다.
어차피 다음 세입자가 들어올 때까지는 살아도 되지만 이왕 마음먹은 일, 질질 끌 필요는 없었다.
새 출발은 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이젠 만사가 심드렁해질 나이가 되었음에도 마음이 뒤숭숭해 밤잠을 설쳤으니 말이다.
끼익.
“옴마! 김 영감 손자 아니여?”
문방구 옆에 차를 세우고 짐을 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쯤 빈 유모차를 끌고 오던 할머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알은체를 하셨다.
“안녕하세요.”
“인쟈 여기 살라꼬?”
“네, 떡은 내일 돌리려고요.”
“하이고메. 떡은 무신. 여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할 텐디 뭣 하러 여기서 살라고? 저 읍내 가지.”
“빈집인데 여기 살아야죠.”
할머님 딴에는 읍내가 젊은이들이 살기 좋은 곳인가 보다. 거기도 통닭집 하나와 농민마트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랴, 니 할배도 저승에서 좋아할끼라. 필요한 거 있으믄 말하고. 고구마 있는데 고구마 좀 주랴?”
“아닙니다. 음식은 다 사놨어요.”
출처를 알 수 없는 구수한 사투리로 나를 반갑게 맞아준 할머님과 따뜻한 대화는 짧게 끝났다.
남양주에서도 오지에 위치한 이 마을은 6.25전쟁이 끝나고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려다 만들어졌다 들었다. 그래서 온갖 지역의 사투리가 다 섞여 있다. 어릴 땐 몰랐지만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나니 친구들에게 이 말투로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때는 경기도에 있는 주제에 이상한 사투리를 쓰는 이 마을이 너무 원망스러웠지만 이렇게 다시 들으니 세상 반갑기 짝이 없다.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실감이 난다.
감상에 젖어 있을 새가 없다. 짐은 얼마 안 되지만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갈 게 확실하다.
나는 멈췄던 손이 다시 바빠졌다.
방 안으로 옮긴 짐들은 그렇게 부지런히 자리를 찾아갔다. 장롱에는 겨울옷들이 들어가고 부엌에 냄비와 작은 프라이팬, 그릇 몇 개가. 그리고 작은 공유기까지 연결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으허.”
부산하게 움직여 노곤해진 몸을 따끈한 아랫목에 지지자 절로 아저씨 같은 소리가 나온다. 자비 없는 기름보일러는 마치 방바닥을 익힐 듯이 뜨거웠다.
이 맛에 매트리스를 버리고 왔지!
그렇게 누워서 한참 폰을 만지작거리며 오늘 올라온 신작 웹소설과 웹툰을 즐겼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야근에 찌들지 않은 생생한 정신과 몸, 그리고 주머니가 든든하니 주저 없이 미리 보기 결제 버튼에 손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한 시간 남짓. 이내 더 볼 게 없어진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누런 한지가 묵묵히 세월을 견디고 있는 여닫이문을 열고 나오자 문방구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는 이 문을 열어두고 방에서 아이들을 맞이하셨다.
방과 가까운 쪽 벽면에는 각종 학용품이 있다.
크레파스, 공책, 스케치북, 실내화. 개수는 적지만 문방구라는 구색을 갖추기에 부족함이 없는 다양함이다.
그리고 중앙과 입구에는 문방구의 꽃인 장난감과 불량식품이 있다.
상자가 크고 비싼 장난감은 입구 쪽 창가에 쌓여 있다. 누가 사갈까 싶은 비싼 장난감을 왜 전시해 놨는지 이해가 안 되었는데 밖으로 나와 쪼그려 앉아보니 그때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
문방구의 커다란 장난감 상자들은 아이들의 소망과 꿈이다. 부족한 형편에 매일 근근이 먹고사는 시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라지만 그 비싼 장난감을 사달라 한다고 해서 덜컥 사줄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이 문방구에 서서 저 장난감을 우러러봤다. 한 번 열어서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합체가 된다 안 된다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모습을 방 안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저 커다란 장난감 상자를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아이들을 보고 싶으셨으리라 짐작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 문방구의 메인은 저 장난감이 아니다.
용돈을 모아서 살 수 있을 법한 가격대의 자잘한 녀석들이 바로 문방구의 진정한 메인디쉬다.
미니카, 비비탄 총, 구슬, 딱지, 각종 캐릭터 카드들까지. 그리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에는 아풀러, 배뚜렁, 간도리 같은 이른바 불량식품들이 아이들을 유혹한다.
하루 용돈, 혹은 큰마음을 먹고 몇 달 정도 모으면 살 수 있는 것들이다.
아이들이 하루에 고작 백 원, 혹은 오백 원 사이의 용돈을 받으면 매일 이 문방구에서 인내심을 시험받게 된다.
주어진 돈으로 가지고 싶은 모든 걸 살 순 없으니까.
그렇게 아이들은 작은 문방구에서 인생을 배웠다.
부스럭.
나는 아풀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유통기한 2023년 7월 23일.
최근까지 어디서 구해오셨는지 불량식품들은 유통기한이 지난 게 하나도 없다. 작은 시골 분교가 폐교되고 누가 사 먹을까 싶은 이 얄궂은 과자들을 할아버지는 계속 새로 들이셨다. 최근까지도.
노인의 고집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 문방구를 계속 열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돌아가시고 난 지금, 알 길이 없다. 매번 그만두시고 아버지가 같이 살자 하셨지만, 한사코 눈칫밥을 먹기 싫다며 거절하셨다. 그럼 문방구라도 접고 편히 사시라 말할 법도 했으나 무덤덤한 우리 부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그런데 이 문방구를 물려받은 지금 나는 어쩐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다.
철제 쿠키 박스 안에 소중히 간직한 편지들.
그 편지들이 할아버지의 노쇠한 몸과 정신을 지탱해준 게 아닐까?
자식과 손자는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문방구에 드나들던 그 아이들.
그 모두가 할아버지의 자식이며 손자이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이따금 보내오는 편지와 추억에 젖어 옛 학교를 방문한 아이들이 예전 그대로의 문방구를 보며 반가워하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으셨을 터.
그게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홀로 살아오시며 문방구를 운영한 이유라 생각되니 마음이 먹먹하다.
있을 때 잘하라는 식상한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오늘은 이사 기념으로 먹으려고 사 온 맥주를 마실 기분이 아니다.
조금 더 자주 찾아뵀어야 했다.
* * *
삼정건설 본사의 한 사무실.
고급스러운 대리석 장식과 난, 가죽 의자가 놓인 전형적인 임원급 사무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한껏 심각한 얼굴로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 땅의 명의가 바뀌었다고?”
“그렇습니다. 소유주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그 손자가 상속받았다고 합니다.”
“팔겠지?”
“경매 공시가도 나오지 않는 건물입니다. 무조건 팔지 않을까요?”
“지 할아버지한테 전해 들었으면 어떡할 거야? 돈 많은 사람들이 계속 팔아달라 했으니 너도 버티다가 비싼 값에 팔라고 유언이라도 남겼어 봐. 우리 다시 리셋이야.”
“…….”
상석에 앉은 젊은 남자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배로 따지자면 제일 말석에 앉아 있어야 할 남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등받이에 몸을 묻고 굵은 시가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돌렸다. 선이 굵고 떡 벌어진 어깨. 영락없는 깡패 행동대장 같은 모습이다.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침묵을 깨고 가장 오른쪽에 있던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뭐?”
“덜컥 판다고 하면 대성공이고 설사 거절한다 해도 일단 금액을 들으면 머릿속이 뒤숭숭할 겁니다.”
일단 해보자는 뜻이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대답이다. 상석에 앉은 남자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노인네 말년에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야. 같이 가지. 임 차장은 얼굴이 너무 순해. 호구 잡힐 상이야. 덩치 좀 있는 경호팀 애들 셋 데리고 따라와.”
젊은 남자의 지시에 모두 외투를 걸치고 전화를 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조철진 전무님, 나 왔습니다. 무슨 이야기 중?”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이내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 작게 묵례만 하고 다시 하던 일을 이어갔다.
“니 할애비 잘난 기념관 지을 땅 사러 간다.”
“누가 들으면 배다른 형젠 줄 알겠네.”
“넌 왜 왔어?”
“이거.”
노골적인 비아냥이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서류 두 장을 내밀었다.
「인사 발령 통지서
시행 일자: 2022년 12월 26일
대상자: 조철진
사원번호: 3524-19-9002-1
부서: 삼정자동차 전략혁신본부 3팀
직책: 팀장」
「인사 발령 통지서
시행 일자: 2022년 12월 26일
대상자: 조상진
사원번호: 3524-19-9002-2
부서: 삼정건설 사업총괄부
직책: 본부장」
“무슨 변덕이시래?”
“나야 모르지. 이 사무실 내가 쓴다?”
파일철에도 넣지 않고 그냥 덜렁덜렁 들고 와 구겨지고 접힌 곳이 많은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받아 든 조철진 전무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엿이나 까 잡숴.”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거면서!”
큼지막한 주먹 감자가 코앞에 나타나자 이번엔 조상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자리고, 내가 아버지 곁에서 더러운 꼴 보면서 얻어낸 사무실이야! 샌님처럼 곱게 경영 수업이나 받은 네놈한테 넘겨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고작 한 살 차이로 이 나이 먹고 형 대접이라도 받겠다 그거야? 억울하면 공부 잘해서 MBA라도 다녀오든가. 기부입학 말고 머리로 말이야.”
“햇병아리 주제에.”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듯 그대로 사무실을 빠져나온 조철진은 건물 로비에 세워진 세단에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불편한 분위기였으나 수행팀은 익숙한 일인 듯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경식 차장.”
“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해? 아버지가 저 자식한테 건설 쪽 떼주고 난 다시 한직으로 보내는 게 자질 때문일까?”
“두 분이 워낙 성격이 다르셔서…….”
“둘러 이야기하지 말고.”
“수년 내에 큰 실적 없이 지내신다면 조상진 전무에게 경영권이 돌아갈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주주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유능한 CEO를 지지할 테니까요. 거기에 이번 사우디 쇼핑센터 수주를 앞두고 보직변경을 지시하셨다는 건 아무래도 조상진 전무에게 훈장을 달아주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둘러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 누가 면전에 대고 길게 욕을 하래!”
“죄송합니다.”
“하여간 정도가 없어요. 임 차장, 친구 없지?”
“…….”
임 차장은 조철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래, 시발. 나도 없다.”
많은 뜻을 내포한 깊은 눈빛이 쏘아지자 슬며시 고개를 돌린 조철진은 창문을 보며 나지막이 자백했다.
“저는 아무 말도…….”
“노래나 틀어줘. 요즘 그 레스파? 걔들 노래 좋더라.”
양복을 입은 사내 3명이 탄 검은색 고급 세단에서는 한동안 어울리지 않는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