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첫 손님
“저, 그런데 전무님.”
눈을 감고 아이돌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조철진을 임 차장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왜?”
“그런데, 저희 보직도 변경되는데 지금 굳이 그 건물을 사러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상진 전무한테 떠넘겨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맡은 일은 내가 하고 떠나야지. 뭐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고.”
조철진의 다소 단순무식한 성격은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중요한 일에 공과 사를 구별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법인 카드로 심심치 않게 비싼 코스 요리를 먹거나 비품이랍시고 가끔 골프채를 사긴 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업무에 사적 감정이나 다른 뜻을 담지 않았다.
동생에게 이 하찮지만 까다로운 일을 던져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게 만드는 얇은 수는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행동이었다.
“저, 전무님.”
“또 왜?”
“지금 가면 그 땅 주인이 있을까요? 증여받았다고 곧장 들어가 사는 것도 아닐 텐데요.”
임 차장의 날카로운 두 번째 질문에 운전하던 직원이 슬며시 노래를 끄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야 이 씨, 다 왔잖아! 그런 건 출발 전에 말해줬어야지!”
“너무 급하게 결정하셔서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또 내 잘못이야?”
“…….”
“너 인마, 또 표정!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어휴. 이거 기름값 임 차장 네가 내! 어쭈? 웃어?”
조철진의 말투는 거칠지만 차 안에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무식하고 불도저 같은 성격 탓에 자주 일을 그르쳤지만, 자기 사람은 끔찍이 챙겼다.
하루아침에 눈 뜨고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겨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와중에 같이 낙담했을 부하직원들에게 농을 거는 마음 씀씀이는 지금껏 능력이 부족한 재벌 2세 상사를 충심으로 모시는 이유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진 차는 다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시골 마을로 들어섰다.
“야! 저기 불 켜져 있다. 저기 맞지?”
“맞습니다. 민호문방구. 좋은 신호 아니겠습니까? 이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곧장 들어와야 할 형편이면 거래가 쉽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조철진은 차에서 내려 곧장 문방구로 향했다.
* * *
“푸흐.”
먼지떨이가 한 번 닿을 때마다 사방으로 날리는 먼지들이 눈과 코를 괴롭혔다. 급기야 출입구 문을 떼고 선풍기를 틀어놓았지만 두 달 동안 쌓인 먼지는 상당히 강적이다.
이사 같지도 않은 이사를 끝낸 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도 모른다.
할아버지를 좀 더 챙기지 못한 죄책감일까? 아니면 이대로 문을 닫기엔 아쉬운 추억을 지키고 싶어서일까?
나는 그렇게 문방구를 다시 오픈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기력이 쇠하여 올라가지 못했던 높은 선반부터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바닥에 물을 뿌려 낡은 플라스틱 빗자루로 작은 파도를 만들며 물을 빼냈다.
전역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내무반에서 매일같이 청소하던 스킬은 조금도 녹슬지 않는 게 씁쓸하다.
어차피 다시 출근하면 계속 오픈 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애초에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까.
물론 이왕 하기로 한 거 괜찮은 부업이 될까 싶어 머리를 굴려보긴 했다. 요즘 트렌드에 맞게 온라인 마켓에 팔면 나름 쏠쏠한 장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이 오래된 문방구에 민트급 레어 장난감이 있진 않을까 해서 잠시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민트급이래 봤자 가격은 잘 받아야 10만 원 내외가 대부분. 그리고 중고거래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일전에 충동구매한 스피커를 한번 팔아보려다가 온갖 미친놈들에게 시달린 일이 떠올라 깔끔하게 포기했다.
7년간 청춘을 바친 직장의 상사에게도 욕을 지르고 퇴사한 몸이다. 잃을 게 없는 내 앞에서 흥정을 운운하며 얄미운 짓을 해대면 푸닥거리를 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서 결론은 그냥 문만 열어두기로 했다. 이직한 새 직장에 출근하면 영업 시간은 고작 늦은 저녁에 한두 시간, 주말이 전부일 터.
손님은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낫다. 그저 남들이 물어보면 “시골에서 작은 문방구를 합니다.”라고 말하는 특이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직장생활에서는 의외로 이런 업무 외 가십거리가 있는 편이 좋다. 최소한 쓸데없는 뒷이야기를 대신 막아줄 테니까.
드르륵.
대청소를 끝낸 타이밍이 좋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괜찮다 했는데 할머님께서 기어코 고구마를 들고 오셨나 싶어 반갑게 나왔더니 문 앞에는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누구… 아니, 어서 오세요.”
“여기 주인 되쇼?”
“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 건물 우리한테 파쇼. 값은 비싸게 쳐 드릴게. 5억.”
엄청난 클리셰다. 뒤에 서 있는 떡대들과 한껏 인상을 구긴 검은 양복을 입은 깡패가 반협박으로 난데없이 건물을 팔라 한다.
쌍팔년도 조폭 영화도 이보다는 덜 식상할 것이다. 아니,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놈들인가?
말하는 본새를 보아하니 이렇게 무던히도 할아버지께 건물을 팔아달라 괴롭혔음이 분명했다.
이 허름한 문방구를 왜 이렇게 비싼 값을 주고 사려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답해줄 정도로 바보들은 아닌 듯했다.
5억.
5억이면 대출을 살짝 넣고 시외에 괜찮은 아파트를 살 돈이다.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다.
이 문방구는 내가 주인이지만 동시에 내가 주인이 아니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평생을 지켜온 가게.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 쉽게 팔아버릴 순 없다.
물론 내 형편이 여유로운 건 아니다. 크게 쓸 돈이 없어 차곡차곡 저축하긴 했지만, 이 문방구로 이사 오기 전까지 전세는커녕 반월세 방을 전전했었다.
5억이 탐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할아버지가 팔지 않으셨다면 나 역시 그 뜻을 지키려 한다. 10억, 20억이라도 내 대답은 같을 것이다.
“안 팝니다.”
“잘 생각해 보쇼. 이 낡은 집을 어디 가서 5억에 팔 수 있는지. 어차피 물려받은 거 아니요. 제값 쳐줄 때 팔아야지 우리도 오래 기다려서 아니면 그냥 다른 데 사러 가야 하니까. 자, 생각 바뀌면 연락하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명함을 끼워서 자기 앞에 내놓았다. 짧게 구부러진 팔꿈치. 직접 곁으로 걸어와 명함을 받으라는 뜻이다.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놈이 말이 짧고 하대가 자연스럽다. 그것도 초면에.
대답할 가치도 없는 놈들. 나는 손을 휘휘 저어서 나가라 축객령을 내렸다. 그런데 놈의 시선은 내 손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저 부리부리한 눈이 마치 파리라도 본 고양이처럼 깜빡이지도 않고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뭘 보는 거지?
눈길이 향한 곳을 내려다보니 미니카가 쌓여 있다.
나는 놈이 보던 미니카 상자를 뒤집어 가격을 확인했다. 권장소비자가격 2,500원. 싸다. 물가 상승률도 반영되지 않은 정말 그때 그 시절 가격이다.
“2,500원.”
“뭐, 뭐야? 사라고?”
“아까부터 보고 있더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 나이로 보이쇼?”
이놈은 반드시 산다. 계약직으로 납작 엎드려 눈치 본 세월만 8년이다. 분명 어른의 체면을 뚫고 나오는 소유욕이 두 눈에 가득했다.
사실 딱히 사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나는 이 조폭 같은 놈이 손에 낡은 장난감을 들고 어색하게 문 밖으로 나서는 꼴을 보고 싶었다.
“2,500원.”
“이게 무슨 짓인지.”
조폭은 내 예상대로 다시 지갑을 꺼내 명함 위에 카드를 겹쳐서 건넸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곧게 펴진 팔꿈치 덕분에 코앞까지 다가온 카드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런데 2,500원짜리에 카드라니? 이 새끼가?
“카드 말고 현금.”
“아이 씨. 요즘 카드 안 되는 곳이 어디 있다고. 임 차장, 돈 좀 빌려줘.”
“기름값 내야 해서 안 됩니다.”
“아, 빨리!”
결국 임 차장이란 사람에게 돈을 뜯어낸 조폭이 내게 돈을 건넸다.
“자. 많이 파쇼. 장사가 될진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원래 성격이 마냥 싸가지가 없는 건 아닌지 내 인사에 미니카를 든 상자를 흔들며 떠나는 모습이 첫인상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게 마수걸이로 들어온 첫 손님은 나름 준수한 매출을 올려주었다.
“참, 소금 뿌려야지!”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했다.
* * *
“여기서 이렇게…….”
오랜만에 아침 일찍 출근한 조철진은 책상에 미니카 부품을 펼쳐두고 씨름을 하는 중이다. 물론 집에서도 눈이 꾸벅꾸벅 감길 때까지 노력했으나 지금 책상에 펼쳐진 부품들은 어디 한 군데 맞춰진 곳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아, 임 차장, 데려왔어? 자, 이거 설명서인데 해석할 수 있겠어? 요 밑에다가 한글로 좀 적어줘.”
조철진은 누렇게 색이 바랜, A4용지 반쪽만 한 설명서 한 장을 내밀었다.
“네?”
“젠장,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그림도 조잡하고 설명서랑 맞는 부품이 하나도 없어.”
“이런 하찮은 일에 다른 부서 직원들을 부르면 안 됩니다.”
“야 이, 이거 몇 문장만 해석해 주면 돼. 금방 하는 거잖아.”
임 차장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긴장한 직원이 조심스럽게 설명서를 받아들고 멀찍이 앉아 펜을 놀렸다.
“오늘 종일 이러고 계셨습니까?”
“뭐? 꼬우면 임 차장도 놀던가. 어차피 우리 내일모레 방 빼야 하는데 따로 할 일이 있나?”
이미 옮길 짐도 손수 다 싸놓고 명패까지 박스에 담겨 있었다. 곧 떠날 조철진과 그 측근들은 지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사무실에서 불필요한 존재들이다.
“아무리 그래도…….”
“시끄러워. 잔소리할 거면 이거나 도와. 임 차장, 어릴 때 이거 조립해 봤지?”
“부품도 몇 개 안 되는데 그냥 하나씩 끼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쉬우면 벌써 완성했지.”
“제가 또 소싯적에 과학상자대회에서 상도 타본 적이 있습니다.”
임 차장은 팔을 걷어붙이고 조철진에게 나오라 눈치를 줬다. 잠시 상하관계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서 쫓겨난 조철진은 그런 임 차장의 손에서 조립되는 미니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하지만 한 줄기 희망이었던 임 차장의 손은 얼마 가지 않아 갈 길을 잃었다. 자꾸만 이 부품 저 부품 만지작거리는 빈도가 높아질 뿐, 조립은 하나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임 차장. 할 수 있는 거 맞아?”
“집중해야 합니다.”
입 다물고 있으란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부하직원에게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미니카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진도가 나가지 않던 차에 구세주가 나타났는데 잠시 입을 다무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뚝.
요리조리 끼워보다 답답했는지 입술을 질끈 문 임 차장의 힘을 20년도 지난 오래된 플라스틱 조각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조철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