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미니카 튜닝의 세계(1)
“우리 왔수다.”
“안녕하세요.”
간만에 마트에서 사 온 쌀과 냉동 돈가스로 밥다운 밥을 먹은 뒤 늘어지게 낮잠을 잤었다. 그리고 예고 살인처럼 재방문을 약속했던 두 형제가 알람을 대신했다.
인사는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밖으로 쌩하니 나간 두 형제는 오늘도 트랙 위에 미니카를 달렸다. 나는 인사 대신 긴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문방구 밖으로 나왔다.
“재밌냐?”
“이번엔 따라잡을 것 같아요.”
“하! 내 환상의 코너링을 따라잡으려면 백만 년은 이르다!”
손을 불끈 쥐고 트랙을 도는 미니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 형제는 완전히 미니카에 빠져들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때가.
“잠깐 따라와 봐.”
나는 미니카 상자가 쌓여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리고 선반 아래쪽에 숨겨져 있던 바구니들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이, 이건!”
바구니에는 미니카의 튜닝 부품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포개져 있었다. 바퀴부터 휠, 롤러, 범퍼, 모터, 그리고 나조차도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다양한 부품이 바구니마다 가득했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했던가? 미니카의 세계에선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미니카는 어떤 튜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성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나뉜다. 이는 실제로 상당히 난해하고 심오한 세계다.
비싸고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 미니카의 무게만 늘리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부품도 많다. 아이들이 가진 미니카가 100대라면 100대 모두 취향껏 다른 개조를 하기에 어떤 부품을 끼우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도 각자 판단에 따라 갈리게 된다. 개중에는 또래에 비해 그럴싸한 말을 잘하는 녀석이 제멋대로 지어낸 말이 진리처럼 퍼지기도 했다.
정답이 없는 세계.
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헤치며 속도를 높이는 작업은 누군가의 조언 없이는 시작조차 하기 쉽지 않다.
거기에 한정된 금액으로…….
“이거 다 주세요.”
“나도!”
두 형제는 내 눈앞에 오만 원권 한 뭉치씩을 내밀었다.
그래. 이런 놈들이었지.
나는 방으로 들어가 저번에 주식을 바꿀 때 은행에서 서비스로 받았던 달력을 꺼내왔다.
12월 29일
조철진: 1,000원
조상진: 1,000원
달력의 오늘 자 칸에 두 사람의 이름과 금액이 적혔다.
“하루에 살 수 있는 금액은 천 원. 합산도 되니까 그날 안 사고 참으면 다음 날 2천 원짜리를 살 수 있는 거야.”
“아, 형! 그런 게 어디 있어!”
억울해도 할 수 없다. 이 문방구의 주인은 나니까.
오늘 오전에만 해도 고양이 때문에 피 같은 돈 60만 원을 쓰고 온 나다. 빳빳한 오만 원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안 된다.
돈 욕심이 났다면 처음부터 철진에게 문방구를 팔아치웠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을 주고 싶다.
“쉽게 얻으면 열정도 쉽게 사그라지는 법이야. 인당 하루에 천 원! 그게 이곳의 룰이다.”
미니카 부품들은 평균적으로 오백 원에서 삼천 원 사이 가격대를 유지했다. 개중에는 미니카보다 훨씬 비싼 가격대 부품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아이들의 용돈은 많아 봤자 하루에 500원. 그마저도 여유가 있는 집 아이들이나 그렇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 국민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100원이 공식 용돈이었다. 시골 문방구의 물가는 그 100원에 맞춰서 돌아갔다. 대부분의 군것질거리와 얄궂은 장난감은 100원 선에서 살 수 있었다.
100원이 넘는 물건을 사려면 어찌해야 할까? 참고 모으는 수밖에 없다. 부모님께 졸라서 받아낼 용돈이면 처음부터 100원만 주지도 않았을 터.
미니카 부품을 사기 위해서는 뜨거운 여름을 이겨낼 쮸쮸바도, 허기진 배를 달랠 컵 떡볶이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조금씩 멋지게 변해가는 미니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충분히 그만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었으니까.
그 시절 미니카는 돈으로 빨라지지 않았다. 인내와 신중한 판단만이 이 냉혹한 레이싱에서 승리를 가져다줬다.
돈은 많지만, 마음은 공허한 이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달력에 떡하니 이름까지 박히자 이내 돈다발을 다시 지갑에 넣고 부품을 구경하는 데 열중했다.
“형, 이건 뭐가 달라져?”
“이건요?”
두 사람은 궁금한 게 한가득한 모양이다. 하지만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정답을 찾을 수 있는 조언은 아직 이들에게 이르다.
아이들의 상상은 무한하다.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겠다고 건전지 고정핀 대신 고무줄을 쓰는 녀석도 있었고 타이어에 조각칼로 홈을 만드는 녀석도 있었다. 그 상상력은 미니카의 성능을 떠나 애착과 바람을 담게 해준다.
물론 미니카의 개조도 왕도는 있다. 굳이 달지 않아도 될 부품만 사지 않아도 큰돈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도 미니카의 재미다. 결국엔 쓸데없는 돈 낭비였지만, 분명 더 나아졌으리라 믿고 트랙에 나서는 그 순진무구함까지도 말이다.
“잘 생각해봐. 내 미니카에 그 부품을 끼우면 어떤 부분이 바뀔지.”
나는 머리를 톡톡 두들기고는 두 사람을 놔두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마 두 사람은 오늘 밤늦게까지 저기 쪼그리고 앉아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것저것 만져보고 비교하면서 구매욕을 불태우는 중일 테니.
“야옹!”
“같이 좀 덮자, 인마!”
이불을 들추니 단잠에 빠져 있던 누렁이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낸다.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반나절 만에 상전이 되어 있네.
병원에서 씻겨준 덕분에 샴푸 향이 진하게 밴 이불은 천국처럼 느껴진다.
이불 속에 누워 오늘 올라온 웹툰과 웹소설을 읽다 팔이 저릿할 때쯤이었다.
“형! 계산!”
“저도요!”
응? 산다고? 벌써?
두 사람이 골라온 부품은 뜻밖이었다. 철진은 500원짜리 베어링, 그리고 상진이는 천 원짜리 냉각팬이다.
성격이 다른 줄은 알고 있었는데 골라온 부품도 완전히 딴판이네.
딴에는 신중한 결정이었다. 베어링은 바퀴와 몸체 사이에 마찰을 줄여준다. 이는 분명 속도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냉각팬은 자체 성능을 높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터의 열기를 커버 밖으로 빼주는 부품으로 무게를 줄이거나 속도를 올려주진 않는다. 하지만 과열에 노출되는 모터의 수명을 보호해준다.
철진은 당장 눈앞에 놓인 결과에 다다를 최선을 선택했고 상진은 앞으로 계속 사용할 모터의 안전을 택했다.
사실 두 제품 모두 성능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는 부품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부터가 첫걸음이다.
두 형제는 그 첫걸음부터 성향이 완전히 달랐다.
“자, 거스름돈. 여기서 개조하고 갈래?”
엊그제 미니카를 막 조립해본 초짜들이다. 괜히 그냥 보냈다가 또 엄한 부품을 박살 내고 새벽에 문방구 문을 두드릴까 싶어 두 사람을 방 안으로 불렀다.
“으헉!”
“야! 고양이야! 고양이! 정신 차려!”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방 안에 누렁이를 보고 상진이가 경기를 일으켰다. 또 오줌을 지리면 발가벗겨 내놓을 거다. 반드시!
* * *
똑똑.
노크 소리가 난 곳은 삼정전자 본사의 가장 높은 층, 바로 회장실이다.
“박 상무입니다.”
“들어온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온 중년의 남자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회장실은 창문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고급스러운 바닥 재질과는 상반되는 수수한 책상과 의자만 놓여 있다.
그 흔한 장식품 하나 없는 휑한 사무실은 명패가 없다면 회장실이라 아무도 믿지 못할 풍경이다.
“그래, 우애 지낸다꼬?”
싸구려 철제의자에 앉아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던 노인은 곁으로 다가온 남자에게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물었다.
“조철진 전무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측근들이 여기저기 정보를 캐고 있긴 한데 딱히 떨어지는 업무가 없는 부서라 인사이동이 있지 않은 이상 실적 없이 관례대로 처리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조상진 전무는 이번 사우디 쇼핑센터 사업 건으로 관련 자료를 인계받아 이제 막 분석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몬난 놈들. 자리가 바낏으면 사람부터 모을 생각을 해야지. 신빼이 매키로 업무나 파악하고 있단 말이가? 글마들이 그라이 안 대는 기다.”
혀를 한 번 ‘쯧’ 하고 찬 노인의 사인이 기분에 따라 거칠어졌다.
“그리고 조금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머꼬?”
노인은 눈꼬리만 치켜뜨고 보고를 올리던 남자를 바라봤다.
“요즘 회사에서 부쩍 두 사람이 통화를 자주 한다고 합니다.”
“와?”
“네?”
노인의 되물음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남자의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행재끼리 전화하는 기 이상트나?”
“지금까지 없던 일이라 특이사항으로 보고가 올라온 게 아니겠습니까?”
“고마댔다. 더 들으믄 속이나 디비지지. 기념관은 우애 진행되고 있다드노? 철진이가 하던 기 말이다.”
“폐교 매입은 순조롭게 끝났는데 아직 도로확장 할 땅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땅 주인 죽읏다매?”
“손자가 물려받았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답니다.”
“안 파는 기 아이라 돈 더 달라카는 기지. 평생을 기반만 다지다 떠나신 분 유언 따라서 업적이라도 기릴라 카는데 고마 돈 좀 더 쓰라 캐라.”
“요즘 재개발 특혜 의혹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박 상무도 무습드나? 또 내 휠체어 미는 거 신문 날까 봐?”
“하하하. 작년 태양전자 비자금 때 못 보셨습니까? 요즘엔 누워서 산소호흡기 달고 가도 안 먹힙니다.”
“세상이 바뀐기라. 인자 고마 내 같은 퇴물은 바지회장 해야 된다카이.”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회장님이 키운 회사인데요.”
“이리 늙고 보이 다 부질읍다. 저승 가면 계좌 연동이라도 해준다 카드나? 박 상무, 니도 더 늙기 전에 퇴직금이나 넉넉하게 챙기가 공기 좋고 물 좋은 데 댕기라. 인자 내는 차 타는 것도 허리가 쑤신다.”
“제가 나가면 회장님 밥숟가락은 누가 떠먹여 드립니까?”
“늙은이 놀리나? 모때꾸로. 끌끌끌.”
탁.
노인은 주먹으로 장난스럽게 박 상무의 팔을 때렸다.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꽤 길었는지 두 사람은 마치 사이 좋은 부자지간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저는 따로 챙긴 게 없어서 정년까지 버텨야 합니다.”
“내 뺏가루 뿌리기 전에 그런 놈들 보이믄 바로 콩밥 맥일 끼다. 박 상무, 니도 맹심하그라. 혹시 주위에 있으믄 토해내고 알아서 사표 쓰라 카고. 뒷돈 노나먹고 사업하는 시대는 진작 갔데이. 우리 대에서 안 끈으모 양키 놈들한테 밥그릇 다 빼낀다. 알긋제?”
“예, 예. 그리고 그건 회의에서 말씀하셔야지 계열사 하나도 안 맡은 저한테 하셔봤자 의미 없습니다.”
“인자 와서 한자리하고 싶나? 니 회장 할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차나 드시지요.”
“끌끌끌.”
쪼르륵.
남자는 투박한 찻잔 속 말라가는 티백 위에 조심스럽게 물을 따랐다.
“다 부질없는 기라. 부질없어. 이리 늙어삘 꺼.”
노인의 쓸쓸한 혼잣말이 넓은 사무실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