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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33화 (33/151)

#33. 찬탈자(1)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딱지를 들고 있는 상진이를 바라봤다.

남을 밟고서라도 머리가 되려는 자, 그 머리가 되기 위해 파렴치한 짓을 거리낌 없이 행할 자, 남의 약점인 목을 잡아 뜯고 절대로 놔주지 않을 잔인무도한 이리.

이놈이 진정 역적의 상이었다.

나는 풀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머리가 팽팽 돌아 한 손으로 허벅지를 받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만 같았다.

“규칙은 푸캣몬 딱지 두 개로 할게요.”

도전자는 규칙을 정할 수 있다.

서로 정해진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딱지를 따는지 타임아웃제를 해도 되고 지금처럼 딱지를 지정할 수도 있다.

지금 푸캣몬 딱지 두 개는 상진, 아니, 역적에게 너무나 유리한 조건이다.

마치 이런 상황이 오리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푸캣몬 양면딱지 두 개를 선수로 내세운 전략이 적이지만 실로 대단하다.

양면딱지는 이름 그대로 양날의 검과 같다.

단면딱지를 겹쳐 만들었기에 두 면 모두 종이가 겹쳐진 윗면이 나오게 된다. 필연적으로 바닥 부분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는 구조다. 어느 면으로 놔도 뒤집힌 딱지처럼 되는 것이다.

귀한 딱지를 두 개나 소모해 뒤집힌 딱지를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양면딱지는 연속해서 두 번 넘겨야 한다. 목숨이 하나 더 붙은 셈이다. 그리고 딱지가 두 개인 만큼 무게도 두 배. 만약 같은 체급의 딱지라면 정타를 때려도 그 무게 때문에 뒤집히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물론 평소의 나였다면 그런 악조건쯤이야 쉽게 극복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나에게 좋지 않게 흐르고 있었다.

술에 취해 타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데 두 번이나 정타를 때려야 한다. 그것도 물이 다 말라 쭈글쭈글해진 딱지로 말이다.

“선공은 양보할게요.”

자존심이 상했다. 선공을 양보한다는 말은 원래 내 입에서 나왔어야 할 말이다. 저 여유로운 표정도, 자신감도 모두 내 것이어야 했다.

그래.

오만의 대가다.

절대 좁힐 수 없는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준다면 다시는 왕좌를 넘보지 않으리라는 지독한 오만. 그리고 역적과 충신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진 탓이다.

그렇게 노쇠하여 홀로 왕좌를 지키던 황제는 젊은 기사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팍.

어찌어찌 중앙을 노려보려던 내 스윙은 허무하게 바닥을 때렸다.

“제 차례입니다.”

뻥.

경쾌한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넘어갔다! 민호 형 딱지가 넘어갔어!”

취기가 오른 철진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렇게 소리 안 질러도 다 알아 인마!

1:0이 아니다. 상대방 딱지가 다 떨어질 때까지 쳐야 하니 승부차기에서 두 점이 밀린 것과 같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의 조각 하나를 꺼냈다.

* * *

공교롭게도 오늘과 비슷한 날이었다. 주말 아침의 나른한 늦잠을 죄악으로 여기는 시골 어른들의 닦달로 어쩔 수 없이 이불에서 나온 아이들이 방황하기엔 조금 추운 계절.

혹시나 놀이터에 아이들이 있나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들어 봤더니 안개 낀 유리창 너머 너무도 반가운 뒷모습이 보였다.

“형아. 같이 가!”

“호야는 왜 따라왔어? 멀리 가는데.”

“나도 구경할 거야!”

골목대장 형의 손을 잡고 과하게 흔들며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흙길을 걸었다.

다른 한 손으로 밀가루 포대에 담긴 형의 딱지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만져보느라 넘어질 뻔한 몸을 든든한 손이 몇 번이나 잡아끌어 줬다.

“오늘은 읍내로 가?”

“응. 읍내에서 오늘 다 모이기로 했어.”

“아랫동네 두꺼비 형도 오겠네? 난 그 형 싫던데. 전에 우리 마을 와서 형도 없는데 병식이 딱지 다 뺏어갔어.”

“두꺼비도 오겠지. 이번에 다 따면 병식이 좀 나눠주자.”

“응!”

얼마나 걸었을까?

아랫마을을 지나 어느덧 길가를 오가는 차가 하나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길 밖을 나와 논두렁을 타고 걸었다. 아직 논에 물도 대지 않아 그냥 가로질러 가도 될 것을 굳이 좁은 논두렁을 타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습성이었다.

“다 왔다.”

“형, 여기는 학교 앞에 문방구가 두 개나 있어!”

“이 근방에서 제일 큰 학교라 그래. 저 안쪽에는 오락실도 엄청 크다?”

“하! 오늘은 혹까지 달고 나오셨네? 여유로운가 봐?”

난생처음 보는 도시 학교에 정신이 팔린 사이 두꺼비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혹 아니야!”

“지금 바로 하게? 심판도 안 왔는데?”

“아아, 당연히 심판이 있어야지. 지고 나서 억울하다고 울면 안 되잖아.”

“우리 형은 안 울어!”

“호야, 가만히 있어.”

“그치만!”

“가자, 형이 떡꼬치 사줄게.”

“웅…….”

두꺼비의 도발에 먼저 넘어간 내가 분에 겨워 씩씩대자 형이 가만히 타일렀다. 그렇게 따라간 분식집은 철없는 꼬마 눈에도 너무나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형, 비싸. 여기 300원이나 해. 우리 동네는 200원인데.”

“괜찮아. 먼 길 왔으니까 형이 기념으로 사줄게. 대신 애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웅! 형은 안 먹어?”

“형은 이따가 경기 나가야 해서 먹으면 안 돼.”

어쭙잖은 둘러댐이었다. 고작 딱지를 치는데 무슨 경기였겠는가? 골목대장이라고 용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른스러움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과했고 그 시절의 나는 그걸 알지 못했다.

“형! 저기! 사람 진짜 많다!”

떡꼬치를 먹으며 돌아온 학교 안 운동장에는 우리 동네 전교생을 모아도 한참 모자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오늘 진짜 딱지 왕을 뽑는 자리라 그래.”

“그럼 우리 동네 애들도 다 불러올걸! 내가 지금이라도 갔다 올까?”

“아니야. 괜히 다른 동네 애들이랑 싸울 필요 없잖아. 그래서 혼자 오려고 한 거야.”

우리는 그 인파를 뚫고 운동장 중앙으로 들어왔다.

“왔네. 이제 시작하면 되지?”

심판으로 보이는 건 머리가 밤톨처럼 짧은 중학생이었다. 주위 또래들보다 한참 키가 큰 형이 심판으로 나왔기에 분란이 일어날 염려는 없었다.

“철판, 종이판 안 되고, 공격 수비 딱지 바꾸기 안 되고.”

“형, 발대기도 반칙이잖아!”

“맞아요! 발대기 하면 누가 못 넘겨!”

“발대기 하지 말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각 지역의 대표선수들이 모두 입을 모아 발대기를 반대했다.

발대기.

칼치기를 하기 위한 부가 기술이었다.

넘길 딱지 옆에 발을 대고 언더핸드로 바닥을 가르는 칼치기로 딱지를 띄우는 극상의 기술. 딱지의 종류와 상성을 무시하는 최상위 기술로 이 칼치기를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할 수 있냐 없느냐로 선수의 등급이 나뉠 정도였다.

하물며 우리 골목대장 형은 이 칼치기의 승률이 백 프로에 가깝다. 누가 보더라도 사전에 작당 모의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 발대기도 없는 걸로 하고 그냥 칼치기만 허용이야.”

중학생 형이 정한 룰이다. 반박은 통하지 않음을 나와 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형아…….”

형은 말이 없었다. 당혹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물러설 기세는 아니었다.

그토록 커 보였던 형의 등은 그날따라 유독 작고 초라했다.

“경수 이겨라!”

“수철이 이겨라!”

어느덧 경기가 시작되고 무리별로 열렬한 응원전이 펼쳐졌다.

나는 그곳에서 차마 소리쳐 응원하지 못했다.

눈치가 빨랐던 탓일까? 어린 내 응원이 지금 형에게 도리어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저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도 주먹을 꽉 쥔 채 경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은 모두 동네에서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선공이 곧 승패를 결정했다.

한 번 치면 반드시 넘어갔고, 그렇게 지루한 공방전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결국, 집중력이 떨어진 쪽에서 조금씩 실수가 나왔다.

“자, 마지막 경기다.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딱지왕이야.”

꿀꺽.

결승은 다행히 우리 형이 올라왔다. 그리고 상대는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두꺼비였다.

“야, 저거 봐. 대왕 딱지야. 저거 어떻게 뽑았지?”

“뽑기 해도 안 나와. 저거 다른 서울 가서 뽑았을 거야.”

대왕딱지.

할아버지 문방구에 사는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손으로 뜯는 뽑기에 나오는 상품 중 하나로 일반 푸캣몬 딱지보다 훨씬 크고 단단했다. 하지만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푸캣몬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읍내에 있는 이 큰 마을조차 그 뽑기 상품이 오지 않았던 탓이다. 대왕딱지를 뽑으면 일반 푸캣몬 딱지 세 봉지로 바꿔주는 게 이 주변 동네 문방구의 방식이었다.

형의 눈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소문만 무성했던 대왕딱지는 그 두께부터 크기까지 일반딱지와는 차원이 달랐으니까.

“놀랬지? 울 아부지가 서울 가서 뽑아주셨지롱! 오늘 넌 끝이야!”

누가 보더라도 형의 패색이 짙었다.

“가위, 바위, 보!”

선공은 다행히 우리 형이 먼저였다.

뻐엉.

“와아아아! 뒤집었다!”

운동장이 크게 울릴 정도로 힘껏 내려친 공격에 대왕딱지가 한 번에 넘어갔다.

“흥! 그게 단 줄 알아?”

“대왕 딱지가 양면…….”

두꺼비가 의기양양하게 두 번째로 꺼낸 대왕딱지는 무려 양면이었다. 한 개도 무거워서 겨우겨우 넘겼는데 무게가 그 두 배가 된 것이다.

“칼치기는 된다고 했죠?”

“응. 발대기만 하지 마.”

발을 대지 않으면 칼치기는 의미가 없다. 그저 딱지를 한 번 위로 띄웠다가 내려오게 할 뿐이다. 하지만 형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아아악.

바닥에 닿을 듯이 아슬아슬한 스냅이 아닌 정말 운동장 모래를 스치는 형의 손에서 나는 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렇게 손을 떠난 딱지는 두꺼비의 딱지 밑으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토옥.

딱지가 위로 솟아오른다.

그리고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선명하고 느릿하게 그 장면이 재생되었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작은 회전력으로 조금씩 기울어지던 딱지는 한 끗을 남겨두고 다시 누워버렸다. 형이 진 것이다. 우리 마을에서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던 형의 패배는 나에게도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더 이상 슈퍼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훨씬 전이었으니까.

“형아. 손이…….”

혼신의 힘을 다한 형의 손가락은 모래에 쓸린 부위에서 피가 흘렀다. 패배의 분함보다 형의 손이 더 걱정이었다.

“침 바르면 나을 거야. 돌아가자.”

형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애써 고개를 돌린 형의 말끝이 떨렸다. 아마도 분함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돌아오는 길에는 형의 손을 잡지 않았다. 나란히 걸으면 형의 우는 모습을 볼까 두려웠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지는 논두렁을 따라 다시 돌아올 때였다.

“형아!”

“응?”

“내가! 내가 만들 거야! 발대기 안 하고 하는 칼치기! 내가 개발해서 두꺼비도 이기고 읍내 애들도 다 이길 거야! 그래서 형 딱지 다시 찾아줄게!”

“그래. 우리 호야는 형보다 잘하니까 나중에 익혀서 형 알려줘.”

형은 우는지 웃는지 모를 얼굴로 내 머리를 헝클었다.

* * *

“민호 형, 안 쳐요?”

눈을 뜨자 머리가 맑아진다. 다리도 더 이상 휘청이지 않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딱지를 다시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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