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39화 (39/151)

#39. 예전에 좀 하더놈 같은데(2)

“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질문이 한참 늦었다.

두 사람이 막연하게 철진이의 친구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우리 모두 초면이라니.

“아, 저는…….”

라운드 원! 레디 고!

소개를 시작하려는 찰나 게임이 시작되었다.

“일단 게임부터 하시죠.”

우리는 어색한 인사 대신 주먹의 인사를 먼저 시작했다.

소중한 백 원이다. 인사는 언제 해도 괜찮지만 흘러간 게임 한 판을 날리는 건 허무한 일이지.

“…….”

무언의 동의. 우리는 그렇게 자리에 앉아 멍하니 서 있는 캐릭터를 바쁘게 움직였다.

타닥타닥.

상대방이 고른 건 교, 미친 이오린, 각성 그리스였다.

전형적인 강 캐릭터. 숨겨진 캐릭터도 포함되어 까다로운 커맨드를 넣어야 하는데 그걸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게임을 해봤다는 뜻이다.

내가 고른 캐릭터는 콤보는 없지만 긴 리치와 짧은 발동 시간을 가진 베니마로, 장거하, 그리고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김간판이다.

이 전략은 나를 비롯한 당시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던 대다수의 아이들이 효율적으로 게임을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캐릭터 하나의 공격 기술을 모두 익히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 투자가 필요했다. 여기서 시간 투자는 결국 오락기 앞에 오래 앉아 있을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게임인 킨오브파이터즈98은 늘 사람들로 붐볐기에 느긋하게 컴퓨터와 대전을 하며 익힐 수도 없었다.

동체 시력과 눈치싸움만 가능하다면, 한 번의 타격으로 상당히 대미지를 많이 줄 수 있는 비교적 쉬운 캐릭터로 먼저 상대방을 최대한 괴롭히고 마지막에 본 캐릭으로 남은 적을 모두 쓸어버리는 극단적인 전략이 최소한의 돈으로 고수들을 상대하는 비법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비슷한 상대에게나 통했고 정작 진짜 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 *

‘진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지고 만다. 하필 원캐릭 중수라니.’

재익은 번번이 큰 연속기가 잘리고 역공에 당한 터라 어느덧 마지막 캐릭터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원캐릭 중수.

완성도 있는 플레이를 하는 캐릭터 하나를 파고든 스타일을 지칭해 스스로 지어낸 용어였다. 굳이 용어까지 지칭해 표현하는 이유는 재익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철건 챔피언이자 다른 각종 격투 게임에서도 고수의 영역에 있다 평가받는 재익은 대부분 같은 등급의 고수들과 대결을 펼쳤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이런 재익도 가끔 어이없는 패배를 할 때가 있는데 그 패배의 원인을 안겨주는 사람이 바로 원캐릭 중수였다.

우선 고수의 영역에서 펼치는 심리전이 통하지 않았다. 특정 공격을 유도하거나 혹은 하단 방어를 집요하게 강요하고 모션이 비슷한 중단 공격을 펼치는 등의 고급 심리전을 중하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작정 콤보를 때려 넣다간 빈틈을 노려 역공을 펼칠 센스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이 챔피언 무릅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위축된 플레이를 하도록 만드는 다소 치사한 방법도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연습하고 왔어야 했나? 앞에 너무 못하는 사람과 계속하는 바람에 방심하고 첫판을 내준 게 패착이다.’

그동안 수십만, 수백만 번의 게임을 플레이했던 재익이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자신에게 불리한지 그 빅데이터가 말해주고 있었다.

“오, 형이 이기겠는데?”

빠직.

건달의 싸구려 도발에 재익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감히 날 이긴다고?’

약한 공격으로 파고들 기회만 노리던 재익이 철진의 싸구려 도발에 넘어가 앞구르기로 카운터 공격을 노렸다. 모 아니면 도의 모험 수, 고수들이 절대 하지 않는 플레이였으나 지금 변수를 주지 않으면 그대로 말라 죽는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하지갠. 하지갠. 하지갠. 하지갠.

‘맙소사, 배캔이라고?’

배캔.

김간판의 배기각캔슬이라는 최고급 기술로 킨오브파이터즈 시리즈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 중에 하나이자 방어를 무력화하는 사기성 공격이었다.

모션이 큰 기술인 배기각을 쓰고 곧바로 특정 커맨드를 입력하면 배기각 모션이 취소되는 메커니즘이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빠르기로 대미지가 큰 기술을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버그성 플레이이나 워낙 그 기술의 발동 조건이 까다롭고 조금만 삐끗해도 무방비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버그는 수정되지 않았다. 대회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일종의 새로운 기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골 문방구의 오래된 오락기에서 나올 기술은 절대 아니었다.

‘일부러 중수 코스프레를 한 건가? 아니면 농락이었나? 이렇게 되면 3판 2선승제지.’

패자의 특권이다.

오락실이 아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 그 비싼 기계들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진 상대는 다시 백 원을 넣고 도전한다. 완전히 이기지 못할 압도적인 패배라면 납득하고 물러나겠지만 남자의 자존심은 그런 패배를 허락하지 않았다. 1패를 하면 3판 2선승제가 되고 2패를 하면 5판 3선승제가 된다. 동전이 많은 쪽이 유리한 싸움으로 변질되었지만, 승자는 도전자를 고를 수 없기에 이 불리한 레이스를 받아들여야 한다.

재익은 곧바로 동전을 넣었다. 이번에는 괴돌이를 흘리지 않으면서 능숙하게 손으로 받아 입으로 털어 넣으며 캐릭터를 골랐다.

* * *

이겼다.

아주 손쉽게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꽤 무난한 승리다. 잘해 보이던데 운이 없네.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선택한 캐릭터들은 이른바 OP 캐릭터라 불릴 만한 조합이었다. 문제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다녔던 오락실에는 그 3명의 사기 캐릭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상대해본 가장 많은 캐릭터도 당연히 그 3개였다. 아니, 오락실을 다니며 했던 킨오브파이터즈98에서 그 세 캐릭터 말고는 거의 상대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숙련도는 내가 고른 캐릭터만이 아니다. 상대하는 캐릭터의 기술과 무빙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분명 상대는 나보다 몇 수 위에 있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내 진짜 실력을 알았으니 이제 공격도 신중해질 터, 두 번째 경기는 패색이 짙었다.

그렇게 경기가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호야, 호야! 왔드나! 여, 고구마 구워놨다. 복지관 얼라들이랑 묵으라!”

윗집 할머니께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고구마!”

철진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큰소리로 고구마를 외쳤다. 이럴 때 보면 어째 진짜 복지관 아이처럼 오해받기 좋을 행동을 한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나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게임은…….”

“그냥 진 거로 해주세요. 잠시 윗집에 다녀와야 해서요.”

당연히 진 게 아니다. 합법적으로 1승을 거두고 물러난 것일 뿐. 이제 다시 재대결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한 승자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냥 철진이만 보내도 되는데 굳이 일어나 가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겼는데 또다시 겨룰 필요는 없다. 합법적인 이유로 물러났으니 승자의 여유까지 충분히 누린 셈이다.

나는 가벼운 걸음으로 할머니 댁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호야 왔나!”

“안녕하세요, 할머니.”

“자, 다 익었으니께 복지관 얼라들이랑 노나 묵그라. 여, 동치미하고.”

“할머니, 너무 많아요.”

할머니 집 마당에는 알루미늄포일에 단단하게 싸인 고구마가 한 소쿠리 가득했다. 퇴근할 때 봤던 연기는 이 고구마를 굽는 장작불이었나?

“그 새로 온 아들도 있응께 넷이서 묵으면 이것도 부족햐. 나가 올라오는데 바닥에 떨어진 걸 막 주워 먹고 있더라니께.”

“네?”

행색이 초라해 보이진 않았는데…….

“호야, 니가 잘 바줘야제. 야들 그런 거 먹고 다니다 탈나믄 우짤라그랴.”

“하하하…….”

“식기 전에 언능 가서 묵고 모자라면 또 구워줄 테니께 야기햐.”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빨리 나가라 하는 할머니의 채근으로 엉겁결에 인사하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문방구 앞에는 두 사람이 아직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저, 고구마인데 식전이시면 이거 같이 드시죠. 윗집 할머니께서 같이 먹으라고 주셨거든요.”

“네? 고구마요?”

“난 평상에 미니카 트랙 좀 내릴 테니까. 넌 가서 동치미 담을 그릇 좀 가져와.”

이제 막 6시가 지난 시간이다. 당연히 식전이고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정말 같이 먹어야 한다. 할머니께서 그러라고 손수 구워주셨으니.

우리 네 명은 그렇게 평상에 둘러앉아 고구마를 하나씩 들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이다. 우리 나이 때의 남자 둘이 이런 문방구에 올 이유가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나와 대결했던 남자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드디어 마스크를 벗고 입을 열었다.

“어?”

“아는 사람이야?”

익숙한 얼굴이다. 누구지? 누구였지? 분명 아는 얼굴이다. 설마…….

“무릅?”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정답이 나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왁!”

나는 방구석 프로 너튜버 시청자로 웬만한 게임방송은 모두 챙겨 본다. 눈앞의 남자는 인지도 있는 게임 스트리머들이 격투 게임을 하면 약방의 감초처럼 나타나 자비 없이 모두 꺾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철건 세계챔피언의 타이틀을 가진 남자이기도 했다.

“누군데 그래? 유명한 사람이야?”

“야! 몰라? 무릅신이라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유명인을 만난 경험이라곤 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친 김순미 할머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니, 그것도 모자라 같이 검은 숯을 입에 묻히며 군고구마를 먹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로…….”

반가움과 놀라움은 다시 의문으로 바뀌었다. 그냥 생판 모르는 남자 둘이 올 까닭도 없지만 그 유명한 무릅이 이 시골 문방구에 올 이유는 더더욱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제가 기판을 드린 고전 게임카페 운영잡니다. 사진 속 게임기가 너무 반가워서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주소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혹시 결례되었는지요?”

무릅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차분하게 이유를 말해주었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와주셨으니 영광이죠.”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나조차도 이 문방구 오락기가 그리워 전파상 아저씨께 무리한 부탁을 하면서 복원해 가져다 놓았다.

내가 구할 당시에도 동작하는 물건이 없었으니 아마 지금 문방구에 남아 있는 구형 오락기는 이게 유일할지도 몰랐다.

“괴돌이까지 나올 줄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재미있게 했네요. 자주 오겠습니다.”

“저야 오시면 늘 환영이죠!”

“형, 형.”

“왜?”

평소 너튜브 화면으로나 보던 셀럽과의 만남에 취해 있는데 철진이 자꾸 옆구리를 찔렀다.

뭐야? 달력? 달력은 갑자기 왜? 아……!

“아! 사인해 드릴까요?”

“아뇨. 사인이 아닙니다. 저희 문방구 규칙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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