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40화 (40/151)

#40. 예전에 좀 하더놈 같은데(3)

「1월 31일

조철진: 1,000원 -> 0원

조상진: 1,000원

김민호: 1,000원 -> 900원

이지환: 1,000원

권성준: 1,000원

배재익: 1,000원 -> 800원」

이제 작은 달력 칸이 모자랄 정도로 사람이 늘었다.

“이월도 가능합니다. 다만 이월하려면 직접 문방구에 오셔서 달력에 적으셔야 해요.”

이월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다못해 불량식품인 아풀러를 하나 골라도 천원은 금방 0원으로 바뀌니까 말이다. 저번 미니카 부품처럼 비싼 가격의 제품이 목표가 아니라면 문방구에 와서 반드시 무언가는 사게 된다. 아니면 지금처럼 게임을 하든가.

문방구는 의외로 욕망을 절제하기 어려운 곳이다.

“하다 보면 적응되니까 걱정 마슈.”

“하하. 아껴 써야겠네요!”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다. 이렇게 운영해서 먹고살 수 있냐는 질문은 따라오지 않았다. 생긴 것답지 않게 낯가림이 있는 철진이의 퉁명스러운 말도 웃으며 넘겼다.

손님이 또 늘었다.

“그런데 아까 그 이오린은 좀 다르던데 어떻게 고르는 거요?”

“아, 그건 캐릭터 선택 화면에서 큰손을 누르고 이렇게, 이렇게… 아니, 아니! 이렇게!”

철진이 놈은 지금 누구에게 킨오브파이터를 배우는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격투게임계에서 세계적인 스타에게 고작 물어보는 게 미친 이오린을 고르는 법이라니! 철진이답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게 따지면 철진이의 이력도 화려하다. 본인 노력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일단 삼정가의 장남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 네 명은 첫 만남부터 어른의 인사를 하지 않았다. 공손하게 명함을 건네고 고개를 숙이는 일 따위는 없었다.

사실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이름마저도 달력에 적힌 걸 보고 알았다. 문방구는 원래 그런 곳이다. 처음 만나 종일 같이 놀아도 이름을 묻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차피 내일도 만날 친구고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 만나 재미있게 노는 데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야, 너 따위의 지칭이면 충분했으니까.

재벌 2세, 유명한 프로게이머, 고전 게임 카페 운영자, 그리고 시골 문방구 주인. 아무래도 좋았다. 같이 놀 친구가 생겼을 뿐.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이 문방구 앞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맞다! 상진이 놈한테 자랑해야 해!”

“뭘 자랑해?”

“윗집 할머니 군고구마 먹었다고.”

“야, 뭘 그런 걸 자랑해.”

내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진이는 곰 같은 손으로 열심히 카톡을 보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많던 고구마가 다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킨오브파이터즈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캐릭터가 까다롭고 그 시절부터 특정 기술이 커맨드가 잘 안 먹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는 것도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격이었으나 오랜만에 옛 게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서인지 나도 이 순간만큼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잘 먹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얻은 건데요, 뭘.”

“그럼 몇 판 더 해볼까요?”

“네? 저는 이미 격투 게임 세계챔피언 무릅을 꺾은 사람인데요?”

“아, 킨오파는 챔피언 아닌데…….”

철권의 신이라 불리는 무릅의 낙담한 표정이 조금 우스웠다.

“농담입니다. 저야 영광이죠.”

무릅신을 이겨봤다는 타이틀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해가 지도록 무릅과 킨오브파이터즈를 즐긴 경험이 평생의 자랑이 된다. 당장 내일 출근해서 옆자리 직원에게 무릅을 혹시 아느냐고 내가 그 사람과 만나 게임을 해봤다고 실컷 자랑할 생각에 벌써 입이 근질근질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백 원짜리를 꺼내 들었다.

“형.”

“왜 또.”

“나 백 원만.”

“야. 내일 해!”

“그럼 캐릭 하나만.”

아, 문방구 오락기 앞에는 꼭 있었지. 이렇게 처절한 구걸을 하는 친구들이. 나는 마음이 약한 편이라 이런 친구들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림없다. 무릅과의 대결에 그런 자비심이 파고들 틈이 있어선 안 되지!

* * *

‘뭐라고 이게 마음이 먹먹해지나?’

재익은 투닥거리는 민호와 철진을 보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가가 촉촉해지고 코가 시큰거렸다.

고개를 돌려 힐끗 바라본 성준도 자신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퇴물, 고전, 비주류.

대전 격투 게임을 비하하는 멸칭은 너무도 많았다.

e-스포츠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PC방이 보급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번 쇠락한 오락실은 다시 열리지 못했고 그 명맥은 자신과 성준이 형 같은 소수의 사람이 겨우 이어오고 있었다.

한 건물 건너 한 건물씩 생기던 PC방을 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 만나면 격투게임을 좋아하냐며 슬쩍 운을 띄워보는 것도 지겨웠다.

대회에서 연승을 이어가 뉴스 기사에 오르내려도, 성준이 형이 사비를 털어 여는 작은 지역대회를 아무리 홍보해도 좀처럼 격투게임 장르는 빛을 보지 못했다.

태생적인 한계라 말했다. 진입 장벽이 높고 초보를 배척하는 문화라 어쩔 수 없다며 시대의 흐름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재익은 포기하지 않았다.

높은 진입 장벽은 너튜브 공략 영상으로, 초보자를 배려하는 문화를 위해 무던히도 많은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도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공허했다. 지금은 그 평판과 실력으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지만 높아진 인기와 반대로 조금씩 사그라지는 열정 탓인지, 아니면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젊은 그때가 아닌 탓인지 텅 비어버린 마음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고 조금씩 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이 시골 문방구 앞까지 오게 되었다.

‘나는 이 모습을 계속 찾아다녔던 거구나.’

어린 시절 작은 문방구 앞에 오락기를 두고 친구들과 울고 웃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그 낡은 추억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간직해 왔기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젠 언제쯤인지 그 시간도 잊어버린 까마득하게 흐릿한 추억이 지금 눈앞에서 되살아났다.

작은 오락기도, 그 앞에서 티격대는 친구들도, 모두 예전 그 모습이다. 바뀐 것이라곤 조금 자라버린 몸이 전부였다.

“저, 잠시만 화장실 좀 써도 될까요?”

“아, 안에 들어가셔서 부엌 끝에 문 여시면 돼요.”

“저도…….”

두 사람은 그렇게 화장실 안에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다. 어중간하게 들어버린 나이로 눈물을 흘릴 기회가 좀처럼 없었던 터라 격해진 감정으로 터진 눈물샘이 멈추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 * *

「철진: (사진)

철진: 야 나 군고구마 먹는다!

상진: 뭐야 한국에 눈 왔어?

철진: 아니. 그냥 윗집 할머니가 구워줌.

상진: 아.

민호: 쟤 혼자 다 먹고 지금 벨트 터지려고 한다. 이거 봐라.

민호: (사진)

지환: ㅋㅋㅋㅋ

상진: ㅋㅋㅋㅋㅋㅋㅋ」

“뭘 기래 낄낄대면서 보노? 걱정도 안 되는 갑제?”

“걱정은 됩니다. 아버지께서 실수하실까 봐요.”

“뭐라꼬?”

“확신을 두고 들어가도 모자랄 판국에 출발 전부터 불안해하시면 안 됩니다.”

“허! 입만 살아가꼬. 준비는 진짜 이거면 되는 기가?”

조동욱 회장은 세 장짜리 에이포 용지를 팔랑였다. 그마저도 마지막 페이지는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들자는 유례없는 스케일의 제안서라기엔 너무나 빈약해 보였다. 이 두 장 반짜리 제안서를 전하기 위해 삼정그룹의 회장과 삼정건설의 임원진, 그리고 관련 실무진이 모두 전용기에 오른 것이다.

“장황한 설명은 오히려 지루해할 겁니다. 짧고 이펙트 있는 발표가 훨씬 효과가 좋습니다. 그래서 필승 전략도 준비했으니까요.”

“저 VR인가 뭐신가 하는기 먹힐지 모리겠다. 고마 니 하라는 대로 다했으니까 니가 책임지는 기다.”

조동욱 회장은 처음에 조감도 모형을 최대한 빨리 완성하라 지시했었지만 이를 아들이 막아섰다.

미래도시 컨셉을 제안하면서 그런 식상한 모형을 들이밀 순 없다며 말이다. 그리고 삼정전자의 내로라하는 그래픽 분야 기술팀을 불러들였다.

“이 도시를 직접 걸어본다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빈 살만 황태자는 옛날부터 최신 기술에 큰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그 때문에 첨단산업의 메카였던 일본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승냥이같이 조건만 따지면서 자잘한 사업만 주워 먹던 아가 무슨 바람이 불어가 이리 사기꾼 매키로 말이 청산유수가 되뿐노.’

정답은 없었다. 아니, 말 그대로 애초에 가망이 없는 사업을 제안하러 가는 길이다. 하지만 삼정그룹의 회장인 자신을 포함해 이 많은 임원진이 단체로 무슨 최면이라도 걸렸는지 회사의 명운이 걸린 무모한 사업을 하자 했다.

되지 않을 사업에, 만에 하나 사우디의 황태자가 이 허무맹랑한 제안을 수락한다 해도 자신들이 수주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아 노른자 사업을 수주한다 해도 그 뒤는 아무도 성공을 가늠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고 막대한 위약금을 토해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비행기에 오른 누구도 그런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준비가 미흡함을 불안해할지언정 실패를 가정하고 추후의 일을 도모하자는 사람도 없었다.

임원진 모두 건설 분야에 잔뼈가 굵어 회장인 자신도 쉽게 어찌하지 못하는 족속들이다. 그런 임원진들이 부정적인 의견 한번 내지 않고 늙은 몸에 연신 자양강장제를 들이부으며 마라톤 회의를 이어가는 모습이 조동욱 회장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이제 이미지 구현은 거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디테일한 부분만 보완하면 어찌어찌 도착 시간에 맞춰 완성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자유도입니다. 도시 안을 마음껏 돌아다녀 볼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주세요. 믿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기술팀 직원들은 다시 노트북에 복잡하게 그려진 이미지들과 소스코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종일 커피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책상에 놓인 샌드위치들은 몇 시간째 그대로였다. 그야말로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운 상황인 것이다.

상진에게서도 더 이상 예전의 그 의욕 없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실무진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신감과 열의가 넘쳤다.

‘장남은 짱구가 트이뿌고 둘째는 싸움닭이 되뿟네.’

“흠흠.”

조동욱 회장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민망했는지 창문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했다.

성에 차지 않던 아들들이 이렇게 몰라보게 바뀐 까닭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문방구 주인이다.

두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 건방진 놈의 눈과 지금 둘째 아들의 눈이 닮아 있었다. 날카로운 질문에 우물쭈물하며 답하긴커녕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는 실수나 하지 말라 되받아치는 그 배짱도 삼정그룹의 회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그 천둥벌거숭이의 말과 비슷했다.

‘문방구한테 8천억을 갚으라 칼라케디마, 이라믄 내가 을매를 빚지는 기고. 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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