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41화 (41/151)

#41. 금의환향(1)

삼정그룹의 전용기 안.

“지금 인터넷 되드나?”

“네, 가능합니다, 회장님.”

“아라따.”

조동욱 회장은 스마트폰을 보는 돋보기안경의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적당히 찡그렸다.

“문… 반, 방구…….”

더듬더듬 쿼티 자판을 눌러 문방구라는 단어를 완성하자 케톡에 번호 하나가 떠 있었다. 박 상무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고 대신 받아오라 시켜 얻어낸 연락처였다.

“흐음.”

첫 번째 언덕을 넘고 나니 이번에는 더 큰 산이 나왔다.

‘뭐라꼬 보내야 하노?’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오기 전 연락을 해달라 했다. 아들을 통해 방문하겠다 전하려 했으나 괜히 연락을 피하는 모양새로 보여 직접 보내기로 결심한 뒤에 기세 좋게 폰을 여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내용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굽히고 들어가는 말이 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남의 집에 방문하겠다는 말을 해야 하니 양해를 구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삼정그룹 회장의 뻣뻣한 목은 오늘 사우디의 어린 황태자 앞에서 한번 숙여졌다. 두 번은 용납할 수 없었다.

「조동욱: 내일 문방구에 좀 들리도 되겠나?」

“아이다. 아이야.”

뭔가 이상하다. 꼭 아쉬운 부탁을 하러 오는 족속들이나 할 법한 문자였다.

「조동욱: 내일 문방구에 잠시 들릴꾸마.」

그나마 조금 나은 문장이다. 그래 봤자 안 된다는 답장이 오면 말짱 도루묵이지만 말이다.

「문방구: 네. 저는 내일 저녁 7시에 집에 옵니다.

조동욱: 아라따.」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답변은 싱겁게 왔다.

“박 상무, 자나?”

“아닙니다, 회장님.”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끌려와 사나흘 꼬박 밤새워 발표를 준비한 사람들이었다. 지금 전용기 안에는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과 자신 때문에 아직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는 박 상무가 유일했다.

“비서실에 연락해가 십 원짜리랑 백 원짜리 좀 넉넉하게 준비해 노라 캐라. 그라고 그… 아이다. 인자 됐다. 고마 니도 피곤할 낀데 그거만 전해주고 자라.”

무언가 더 말하려고 입이 달싹였던 조동욱 회장은 이내 마음이 달라졌는지 박 상무를 물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두 번째 빅매치가 내일 열린다. 이대로 자긴 아쉬웠다.

‘한 판만 딱 하고 자뿌자.’

파프라카 맞고!

“…….”

음소거를 깜빡한 조동욱 회장의 폰에서 우렁찬 인트로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 * *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오신다는 거지?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그냥 축객령을 내리기 불편해서 빈말로 오시기 전에 연락 달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리 갑자기 온다 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뭐 차라리 잘된 셈이다. 정신없던 잔치 준비에 다음 날은 숙취로 고생하는 바람에 저번에 얻어먹은 고기 감사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식사 한 끼 대접하며 겸사겸사 덕분에 설날에 잘 먹었다 말씀을 드릴 수 있다.

문방구의 손님이 아니라 우리 집에 오는 손님이다. 그것도 철진이와 상진이의 부모님이다. 대접할 음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냉동실 문을 열고 내용물을 하나둘 꺼내 싱크대에 늘어놨다.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했는데 이런 날이 오네.”

냉동실에는 그날 먹고 남은 소고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소뼈도 그득하다.

온갖 부위가 다 섞여 있었던 한우 선물 세트에는 소뼈도 더러 들어 있었다. 지금부터 고아놓으면 내일 저녁까지 조금 빠듯하겠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육수가 나올 터였다.

한우 뼈로 곤 설렁탕.

요리에 큰 취미는 없었다. 혼자 오래 사는 남자가 가장 먼저 담을 쌓게 되는 분야이지 않던가? 하지만 장작불만 들어가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 설렁탕은 실패가 없는 음식이다.

준비도 간단하다.

“할머니!”

“호야, 밥은 묵은 겨? 우짠 일이여?”

“조금 있다 먹어야죠. 혹시 가마솥이랑 드럼통 좀 써도 될까요?”

“이이. 그려.”

“감사합니다.”

준비할 건 윗집 할머니 집에서 낑낑대며 가져온 드럼통과 가마솥이 전부다. 장작은 전에 고기를 그렇게 구웠어도 아직 산처럼 쌓여 있다. 그중에 적당히 물을 먹은 장작을 골라 드럼통 안에 가득 부었다.

지금은 저녁 시간이라 괜찮지만, 내일 아침부터는 출근하고 돌아오기까지 적어도 10시간은 불이 살아 있어야 한다. 단단한 참나무 장작에 물까지 먹었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물을 가득 붓고 드럼통에 불을 붙이자 자작한 불길이 적당히 피어올랐다.

“형, 뭐 해?”

“설렁탕 끓이게.”

“케톡하지. 그럼 내가 오는 길에 사 올 텐데.”

“나 혼자 먹을 거 아니야. 내일 저녁에 손님이 오기로 했어.”

“누구? 성준이 형이랑 재익이 형은 오늘 대회 갔잖아. 내일도 행사 있다던데?”

그새 게임을 몇 판 하느라 조금 친해졌다고 호칭이 형으로 바뀌었다. 일본 대회에 월차를 내고 따라가겠다는 것도 두 사람이 불편해할까 봐 겨우 말렸는데

“네 아버지.”

“뭐? 노인네가 왜?”

철진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나라도 갑자기 내일 아버지가 찾아온다 하면 이런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모르지. 뭐 하실 말씀이 있나 본데. 너도 내일 올 거지?”

“미쳤어? 내가 왜!”

“왜긴, 인마! 네 아버지잖아.”

“형한테 볼일이 있다며! 난 내일 상진이랑 지환이 바에 갈 거야.”

뜨거운 효자가 따로 없네.

그래, 차라리 독대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밥 먹다 말고 집안싸움이라도 한다면 난감해지는 쪽은 내가 된다. 좁아터진 방에 네 명이 둘러앉아 바닥에서 밥을 먹는 꼴도 우스웠다.

“경기는 언제 시작해?”

“이따가 8시. 거의 다 됐네. 나 먼저 들어가 있을 게. 참, 지환이는?”

“피자 사 오라고 시켰어. 오겠지. 아니다, 저기 오네.”

양반은 못 되는지 지환이의 차가 멀리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게 보였다.

“넌 들어가서 컵이랑 접시 좀 꺼내. 난 지환이랑 피자 들고 들어갈게.”

다들 잘사는 집안 놈들이라 차는 하나같이 크고 고급스럽다. 선입견인진 모르겠으나 일본에서 자라서인지 지환이의 운전은 극도로 조심스럽다. 이 짧은 길을 올라오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내 경차로 저렇게 운전했으면 회사에서 집까지 최소 스무 번 정도는 하이빔을 맞았다.

그렇게 한참 만에 도착한 지환이는 밖에 나와 있는 나를 발견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왜 나와 있스므니까?”

“너 짐 들어주려고.”

“그 정도로 많이 사 오진 않았스므니다.”

“야, 철진이가 있는데 많이 사 와야지.”

“많이 먹는다 시프면 목을 치면 되므니다. 이러케.”

“뭐 스티븐 시갈이냐?”

손날을 세워 목젖을 때리는 시늉을 하는 지환이를 툭툭 밀며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닥에는 철진이가 대충 깔아놓은 티가 팍팍 나는 그릇과 컵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변환기가 어디 갔더라.”

브라운관 티비로 인터넷 중계를 보려면 조금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했다. 노트북 출력단자를 다시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변환기에 연결해서 총 세 번의 변환을 거쳐야 한다.

“그냥 노트북으로 보면 안 되므니까?”

“어허! 맛이 다르다니까, 맛이.”

사실 노트북 모니터 크기나 티비 브라운관 크기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심지어 지환이 말대로 그냥 노트북으로 보는 게 더 선명한 화질이다.

하지만 브라운관으로 비디오를 재미있게 봤었던 우리는 굳이 이 뭉개진 화면을 고집했다.

“보인다!”

화면이 연결되고 화면에 철건 대회 장면이 나왔다.

“저 사람 보이지? 우리 문방구에 왔었다니까!”

“믿을 수 없스므니다.”

“야, 진짜 왔어!”

“그게 아니라 민호 형이 이겼다는 걸 믿을 수 없스므니다.”

“이기긴 했어. 한 판이지만.”

그 뒤로는 내리 9판을 지긴 했다. 그래도 격투게임계의 전설을 상대로 한 판을 이긴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회사에서도 자랑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봤지만 안타깝게도 격투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환이는 게임을 좋아해서인지 무릅을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방구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이밍이 잘 맞지 않은 탓이다.

“시작한다. 이기겠지?”

“무조건이야. 질 수가 없어.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

인터넷을 찾아보고 며칠 전에 겨우 무릅이 어떤 사람인지 안 주제에 전문가 같은 말을 하는 철진이 아니꼬웠다.

팍.

나는 철진의 목을 손날로 사정없이 갈겼다.

“악! 왜 때려!”

“지환이가 너 많이 먹으면 목 때리랬어.”

“아직 안 먹었잖아!”

“그렇게 시작부터 두 개씩 접어 먹지 마. 난 뭐 크레펜 줄 알았네.”

“젠장.”

(철건 세계대회 제1 경기 잠시 뒤 시작합니다!)

우리는 허기도 잠시 잊고 작은 티비 화면에 집중했다.

* * *

“정말 괜찮겠어? 연습은 고사하고 어제까지 문방구에서 킨오파만 했는데.”

성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오히려 더 도움이 됐어요.”

“아니, 철건도 아닌데 무슨 도움?”

격투 게임은 심리전이다.

프레임 단위로 떨어지는 모션에 반응해서 싸우는 건 기본이고, 철저하고 집요하게 상대방의 반복되는 패턴이나 잘 막지 못하는 공격을 파고들어야 이길 수 있었다.

랭커들과 매일같이 연습해도 모자랄 판국에 시골 문방구에서, 그것도 조잡하고 오래된 오락기로 킨오파를 하다 왔다. 심지어 대전 상대인 문방구 주인은 그나마 중수를 갓 벗어난 듯했으나 나머지 한 명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실력이었다. 연습이 됐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재익은 웃으며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였다. 세계경기를 앞두고 예민해진 성격 탓에 신경이 곤두선 쪽은 도리어 지켜봐야 하는 자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물론 세계대회치고는 다른 e-스포츠 대회보다 상금이 턱없이 낮았다. 이제는 우승해도 ‘무릅이라면 당연히 세계대회는 1등을 해야지’라는 인식 때문에 잃을 건 많고 얻을 건 없는 대회가 되었다.

상금과 기업 스폰서 비용으로는 팀을 운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최근에야 무릅이라는 이름을 걸고 너튜브 채널을 운영하기에 숨통이 트인 것이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비를 털어 비행기 표도 겨우 구해줬던 날이 부지기수였다.

1등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이제 막 안정적인 수익이 생기기 시작한 재익에게 어떤 여파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데 정작 당사자가 태연하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철건 세계대회 제1 경기 잠시 뒤 시작합니다!)

“다녀올게요.”

와아아!

재익이 무대 위로 올라서자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울렸다. 격투 게임의 본고장인 일본에서 열린 대회이니만큼 관객들의 열정도 남달랐다.

하지만 그 환호성은 곧 수군거림으로 바뀌었다.

웅성웅성.

“도대체 무슨 짓을…….”

성준도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전광판에 보이는 화면을 응시했다.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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