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57화 (57/151)

#57. 어른들의 사정(1)

하시모토 부장에게 참가 의사를 밝힌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두 달.

미니카 세계대회까지 남은 시간이다. 원래는 국가별 대회가 끝난 뒤 한 달도 안 되어 세계대회가 열리지만, 뒤늦게 인기를 얻은 유럽과 미국에서 경기가 열리면서 일정이 연기되었다.

이 두 달은 적다면 적은 시간이고 많다면 많은 시간이지만 나에겐 1분 1초도 부족한 상황이다.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다.

두 형제에게 괜찮은 추억이나 만들어 줄까 하고 알아보기 시작해 어쩌다 보니 결승까지 오른 것이다.

운이 좋았다.

구형 미니카로 예선을 통과한 것만으로도 천운이 따랐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운이나 바라며 가볍게 준비할 수 없게 되었다.

팀전.

5:5 매치에서 승점을 어떻게 계산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국제대회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팀원들에게 큰 민폐다. 적어도 발목을 잡지 않으려면 두 달 안에 그들과 비슷한 실력이 되어야 했다.

“으아, 어렵네!”

너튜브 영상과 미니카 카페에서 정보들을 취합해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밤을 꼬박 새울 양이이다.

그나마 축척된 정보의 양이 상당히 얕기에 시도해볼 수 있었다.

점핑트랙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기간은 4년 남짓. 아직 정도라 할 만한 튜닝 방법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본 챔피언이 개발해 자신의 이름까지 붙인 모델로, 속칭 MD2라 불렸다. 이번 대회에서도 이 MD2를 기본 베이스로 파생된 미니카가 많았다.

이게 정답일까?

설사 정답이라도 묘하게 불편한 기분이다.

딸칵.

나는 구급상자를 개조해 만든 미니카 통을 열었다. 탄내가 좁은 방 안에 가득 퍼진다. 까만 숯덩이처럼 변한 미니카가 그 냄새의 주인공이다. 생명을 다해서까지 처절하게 달려준 이 녀석 덕분에 결승에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까맣게 타버린 이 미니카를 다시 꺼내 보고서야 그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인생에 만약은 없다.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때로는 행운으로, 혹은 불행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다.

만약이라는 말은 대부분 지난날의 후회를 담았다. 만약 내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더 좋은 선택을 했다면 등등.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만약으로 더 나은 결과를 갈망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만약이라는 말이 통할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았다. 만약 그때 불이 나지 않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기회.

나는 다시 한번 정도를 벗어나 보기로 했다.

카본 범퍼니 뭐니 하는 것을 잔뜩 담은 장바구니를 뒤로하고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문방구로 나왔다.

미니카 부품들이 쌓여 있는 상자 안의 내용물은 전보다 훨씬 가짓수와 양이 많아 상자를 하나 더 놔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이 부품들은 족히 20년도 더 된 제품들인데 지금까지 단종되지 않고 이렇게 주문을 넣을 수 있다니!

게다가 어디 창고나 이곳처럼 낡은 시골 문방구에 처박혀 있던 것들이 아니었다. 포장지까지 말끔하게 새로 찍혀나온 부품들은 세월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이 구해주신 이 부품들 덕분에 내 미니카는 한 번 더 부활해 달릴 수 있다.

불타버리기 전 그때 그 모습으로.

* * *

케톡.

한창 조립에 열을 올리고 있는 와중에 케톡 알람이 울렸다.

「철진: 형!

민호: 왜?

철진: (지도) 여기로 빨리 와봐!

민호: 나 바빠. 미니카 만들어야 해.

철진: 여기 와서 만들어. 빨리!」

요즘 스폰서 때문에 바빠서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뜬금없는 말을 해댄다.

철진이가 보내준 지도에는 서울 외곽 한 공장단지에 핀이 꽂혀 있었다.

차를 타고 꼬박 30분은 달려야 할 거리. 한창 바쁜 와중에 또 무슨 일을 꾸미는지 이제는 설명조차 없어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결국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커다란 창고 건물에 도착했을 때 정문에서 철진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하지만 시선을 빼앗은 건 철진이가 아니었다.

미니카 4WD 한국국가대표팀 M.M.

공장 입구에 걸린 커다란 핑크빛 현수막이 바람에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들어가자!”

철진이는 내 차에서 조립하다 만 미니카 상자를 찾아들고는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억지로 등을 떠밀려 들어온 창고는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난 광경을 선사했다.

“미친놈…….”

“형, 뭐라고 했어?”

“미친놈이라고 했다. 이게 다 뭐야?”

“어때? 이 정도면 연습장으로 써도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족히 수천 평은 넘어 보이는 큰 창고에 미니카 트랙이 종류별로 가득 차 있다.

“저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작년까지 세계대회로 나왔던 트랙을 그대로 구현했어. 저 뒤에는 휴게실! 풀스랑 오락기도 설치하기로 했어. 샤워실은 아직 공사 중이고…….”

철진이의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려고 그래?”

“뭐가?”

“몰라서 물어!”

이 엄청난 규모의 연습장을 만들어 놓고 정작 중요한 선수들의 영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대현자동차도 선수들이랑 접촉한다던데. 어중간하게 계약된 선수가 반으로 갈리면 어쩌려고?”

이미 뉴스 기사가 떠들썩하게 올라오는 중이다.

지난번 대회 때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박힌 핫핑크 티셔츠를 입은 덕택에 삼정자동차는 엄청난 홍보 효과를 얻었다. 이렇게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이젠 세계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한국 자동차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현자동차가 이런 삼정자동차의 독주를 두고 볼 리가 없다.

만약 세계대회에 나가는 선수 중 한둘이라도 대현자동차와 덜컥 계약하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다미야에서 나온 공식 서포터 가이드라인은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지침일 뿐이다. 삼정자동차에 유리한 조건은 가이드라인이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2주 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지만 이미 그 날짜는 지나버렸다.

아직 선수들의 계약은 체결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최악의 상황엔 다 차려놓은 밥상에 대현자동차가 앉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철진이 놈은 팔자 좋게 이런 연습실이나 만들고 있었다.

“걱정 마. 다 계약할 거야.”

“야, 그래도…….”

내가 철진이가 하는 일이 궁금한 날이 오다니.

하지만 더 이상 캐묻는 건 철진이가 하는 일에 대한 불신이다. 나는 뭐라 말을 더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자리에 앉혀놓고 닦달한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마지못해 말해주겠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 이렇게 자신감에 찬 모습이라면 걱정은 조금 덜어도 되겠지.

우리 모두 누군가의 참견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직장생활을 하고 철진이와 상진이도 회사에서 나름 중책을 맡아 착실하게 성과를 올리고 있다.

다만 일과가 끝나면 작은 문방구에 모여 즐겁게 웃고 떠들 뿐이다.

필요한 건 응원이지 참견이 아니다.

* * *

샤미센 연주가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강남의 한 고급 일식집.

한창 손님맞이에 분주한 와중에 고급 세단과 승합차 한 대가 나란히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사전에 연락을 받은 지배인과 직원들이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정중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아, 들어가도록 하지.”

정장을 입고 이마가 훤히 보일 정도로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가 인상적인 중년 남자 뒤를, 승합차에서 내린 한 무리의 젊은 청년들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뒤따랐다. 누가 보더라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이질적인 옷차림이다.

“가장 넓은 매화방으로 준비했습니다.”

안내받은 방에는 이미 양껏 차려진 정갈한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식탁 중앙에는 참치 머리 하나가 통째로 올라가 있다.

‘촌놈들에게는 이런 싸구려 쇼가 또 먹힌단 말이야.’

남자는 속으로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갓 조리되어 나와야 할 요리들과 숙성된 맛을 즐겨야 할 요리들이 조화롭게 구성된 코스를 하나씩 맛보는 곳이다.

싸구려 뷔페처럼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음식을 가득 쌓아두고 먹는 건 어느 결혼식에 가서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하지만 이 음식들은 즐기기 위한 요리가 아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 촌놈들의 기선을 제압할 일종의 사료였다. 급이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시켜 줄 사료 말이다.

“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에 키핑 해놨던 걸로 하지.”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술만 넣어주고 부를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네.”

“네. 직원들에게 전하겠습니다.”

인당 오십만 원이 넘는 고급 일식집에 VIP룸의 문을 멋대로 두들겨 여는 직원은 없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꺼내어 직원을 하대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고까운 의도가 담겨 있었으나 지배인은 중요한 전달사항이라도 들은 것처럼 공손히 대답했다.

“자, 들지.”

사내의 손짓에 청년들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접시에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도자기 잔에 술이 채워지고 어느 정도 음식이 줄어들었을 무렵 남자는 가방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냈다.

“이게 우리 대현자동차에서 제안하는 스폰서 계약 내용이야. 뭐 이런저런 세세한 사항들은 넘겨두고 굵직하게 말하자면 이번 대회가 끝나고도 3년간 스폰서 지원을 약속한다는 거지. 인당 활동비 명목으로 지원하는 금액과는 별도로 계약 기간이 끝나면 희망자에 한해 입사 혜택까지. 물론, 이건 대외비적인 내용이라 계약서에 담기진 않지만 말이야.”

“저, 정말 이 돈을 주나요?”

“하! 그럼, 계약서에 거짓말을 적어놨을까? 아직 가계약서니까 관심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하고 음식은 마저 들고 가지. 난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명함을 건네지도 않고 자신의 자리 위에 한 뭉치 올려둔 남자는 잔에 채워진 술을 입에 털어 넣은 뒤에 일어섰다.

청년들은 계약서에 쓰인 금액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느라 남자가 일어서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리곤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자연스러운 하대와 업신여김이 거슬릴 만도 했으나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기지 않는 금액이 적힌 계약서였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800, 결제는 회사로 달아두고 남은 비용은 내 이름으로. 알지?”

지배인의 질문에 남자는 카드 한 장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던지듯 카운터에 올렸다. 식사 비용은 500 남짓. 나머지 300은 나중에 혼자 와서 느긋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방에서 빠져나온 남자는 세단의 뒷문을 붙잡고 있는 기사를 지나쳐 차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집으로.”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남자는 눈을 감았다.

“돈으로 치대면 안 될 일이 없는데 뭘 그리 귀찮게 하는지.”

“네?”

“아니야. 운전이나 해.”

“네. 죄송합니다.”

차 안에는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다. 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혹시나 뒷좌석에 앉은 남자가 깨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백미러를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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