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62화 (62/151)

#62. MM(3)

“형!”

어찌나 급했는지 한달음에 달려온 철진이 차가 서기도 전에 창문을 두들기며 내려보라 손짓했다.

“기자들은?”

“아직 아무도 안 왔어.”

“그래, 다행이다. 빨리 들어가자.”

정말 다행이다. 사전 취재를 욕심낼 만큼 크게 관심을 둔 언론사들이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 회장님을 찾았다.

“아, 왔나?”

“안녕하십니까.”

“그래, 여는 저 대현그룹 정진수 회장. 인사하그라.”

“처음 뵙겠습니다. 미니카프로팀 MM의 구단주를 맡은 김민호입니다.”

“이 청년이 자네가 말한 그 대들보인가?”

“카모!”

“저,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자리를 옮겨주셔야겠습니다.”

“그기 무신 소리고?”

“두 분께서는 지금 이곳에 계셔선 안 됩니다.”

무례한 행동이다. 그것도 초면에 모기업의 회장에게 건네는 인사말로는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두 회장님이 여기 계시면 언론사들이 속보를 내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올 겁니다.”

“그러면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알아서 홍보를 해주겠다는데.”

“홍보는 나중에 일본에 오셔서 해주셔야 합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김빠진 사이다가 되지 않으려면요. 회장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잠시 문방구에 가 계시겠습니까? 열쇠는 어디 있는지 아시죠?”

“어? 어어…….”

“철진아! 두 회장님 나가신다. 기사분께 말씀드려! …무례를 범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행사가 끝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차에 올라탄 두 회장님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연습장 안에는 행사를 준비하는 스태프와 선수, 그리고 직원들이 섞여 알아보기 어려웠다.

행사는 내 요청대로 조촐하게 준비되었다. 촌스러운 현수막 하나와 돼지머리가 올라간 고사상, 출장뷔페가 끝이다.

당연히 귀빈도 초대하지 않았다. 아니, 최고의 귀빈인 두 그룹의 회장님도 내보낸 마당에 설사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더 온다 해도 앉을 귀빈석 따위는 없었다.

“저… 구단주님?”

“아,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온 직원들에게 직접 구단주라 소개를 하니 조금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원래라면 진작 안면을 트고 회식이라도 한 번 해야 했을 사람들이다. 퇴사 전까지 일을 마무리하느라 철야를 달려온 터라 창단식이 되어서야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과 선수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제 기자분들도 도착하셨으니 창단식을 시작해 보죠.”

모두와 악수를 하고 난 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자 나는 얼른 행사를 진행하자 했다.

구색만 갖춘 창단식. 길고 화려하게 진행할 필요가 없다.

(그럼 지금부터 삼정그룹, 대현그룹이 후원하는 미니카 국가대표 프로팀 MM의 창단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힘찬 목소리로 진행되는 행사는 어느 개업식과 비슷했다.

돼지머리 앞에 절을 하고 귀와 코에 지폐를 꽂은 뒤에는 구단주인 내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미니카 프로팀 MM의 구단주를 맡게 된 김민호입니다.”

여기까지는 고루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이었다.

“우선 자리에 앉죠. 팸플릿을 깔고 앉으시면 됩니다.”

내 말에 사람들은 조금 머뭇거리다 하나둘 바닥에 팸플릿을 깔고 둘러앉았다.

어색하게 서서 다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에게도 이번 창단식은 큰 각오를 하고 던진 출사표였으니까.

“저는 사실 부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차로 2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작은 문방구를 하고 있지요. MM 프로팀이 망하면 다시 문방구에 전념하면 되니 사실 걱정이 없습니다. 여기 선수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본업이 있고 소속만 MM에 속한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나도 이 팀이 망하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당장 3년 뒤 연장 계약으로 돈을 받아내지 못하면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는 건 구단주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장이 앓는 소리만큼 듣기 싫은 소리도 없다. 여기선 조금 연기를 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 사정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님을 봉양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미처 준비하지 못한 노후자금이 걱정이라 눈치를 보며 계속 회사에 다녔던 분, 아픈 가족을 위해 몰래 대리운전을 하다 겸직 위반으로 징계를 받고 좌천된 분, 힘들게 대기업에 입사했으나 운이 없어 해체 직전의 부서로 떨어진 분.”

내가 한 명 한 명의 숨겨진 비화를 나열하자 당사자들의 얼굴에는 복잡미묘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 자원해서 왔든, 갑자기 보직이 변경되어 왔든, 이 한직에 온 사연은 모두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것들이었다. 모두 그런 사연을 적어내진 않았지만, 전달받은 인사기록부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제 목표는 그분들이 마음 편히 다니는 직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간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남의 돈을 빼먹기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직장생활은 으레 그런 법이다. 상사와 동료, 부하 직원의 눈치를 봐야 하고 성과, 진급, 그리고 인사고과, 거기에 더해 야근을 전제로 하는 과한 업무량은 기본.

그리고 이들은 거기에 더해 조금 더 힘들었던 사람들이다.

나도 그랬다.

어두운 미래를 그저 하루하루 바쁜 업무를 핑계로 애써 무시하며 지냈었다. 하지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작은 원룸에 몸을 뉘면 그렇게 무시해 왔던 처지가 더 선명해졌다. 지쳐 쓰러질 것처럼 누웠지만 잠조차 오지 않는 그 답답함은 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저 허울뿐인 선수로 괜찮은 계약금이나 받으며 3년 동안 저들이 말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예전의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나를 답습하는 것과 같았다. 쫓겨나는 계약직 중에 내가 없음을 안도하며 살았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변했다.

할아버지의 문방구를 지키며 소중한 인연들을 외면하지 않았듯 지금 내 품에 들어온 사람들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구단주로 이곳에 온 각오는 그리 가벼운 마음이 아니다.

“행사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들 적당히 배를 채우고 눈치 보지 마시고 곧장 퇴근하시면 됩니다. 저도 마이크를 내려놓으면 바로 나갈 테니까요.”

조촐한 창단식은 내 짧은 연설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허, 어으가?”

“문방구에. 야, 입에 든 건 좀 다 삼키고 말해. 너도 다 먹으면 이제 들어가. 오늘 수고했어.”

삼정자동차 스폰서 계약이 시작이었기에 지금껏 철진이의 역할이 컸다. 아쉽게도 구단주는 내가 꿰차버렸지만, 앞으로도 고문 역할을 톡톡히 할 작정으로 보였다. 회장님께 들키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곧장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켜두었던 히터는 아직 따뜻한 바람을 내뿜고 있었다. 정말 짧게 지나간 창단식이었나 보다.

* * *

얼떨결에 같은 차에 오른 두 회장은 어안이 벙벙해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친히 걸음을 해서 면을 세워주겠다는데 생각지도 못한 축객령이 떨어진 탓이다.

‘감히 나를? 이 정진수를 쫓아내? 허!’

정진수 회장은 화조차 나질 않았다. 역치값을 한참 넘긴, 정중하면서도 무례한 민호의 행동에 분노보다는 당황스러움과 민망함이 먼저 일었다.

“크흠.”

면이 서질 않은 정진수 회장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의미 없는 옷깃을 다듬었다. 그러나 같은 일을 당한 조동욱 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끌끌끌. 사람을 즈그 동네 할배매크로 대한다카이. 얼매나 배포가 큰 건지 알 수가 읎다. 하! 축포는 나중에 터트려달라 이 말인기라. 야야. 문방구로 가자. 그 가 있으라 켔으이 가 있어야지.”

“문방구?”

“절마 저거 이 근처에서 문방구 한다.”

“문구점 사장을 구단주로 앉혔다고?”

저번 주에 생전 잘 사지 않던 밥까지 사주며 대들보니 뭐니 자랑하던 사내가 문구점을 한다니?

“문구점 말고 문방구.”

“가보면 알겠지.”

앞뒤가 맞지 않는 선문답 같은 대답이 조금 답답했던 정진수 회장은 다시 질문하길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행선지는 정해져 있고, 창단식이 끝나면 구단주가 다시 온다 했으니 질문은 차라리 그쪽으로 하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창밖에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보이는 차가 줄어들었다. 차선도 대형세단의 사이드미러가 겨우 들어갈 만큼 좁아졌다.

“어디까지 가는 거야?”

“다 왔다. 저 비네.”

조동욱 회장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언덕을 따라 지어진 집 수십 채가 보이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민호문방구라는 낡은 간판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진짜 문방구였군. 허허.”

“여 세아라.”

끼익.

차가 멈추고 두 회장은 차에서 내려 문방구를 향해 걸었다. 뭐든 빨리빨리 하고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성정 탓에 늘 운전기사가 문을 열기도 전에 혼자 내리는 조동욱 회장과는 달리 비서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렸던 정진수 회장은 한참 벌어진 거리를 좁히느라 잰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자주 와봤나 보군.”

“주인 없는 날 들어오는 건 처음인기라. 열쇠는 전에 한번 본기고.”

말과는 다르게 평상 밑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탓에 조동욱 회장도 민망했는지 말꼬리가 길어졌다.

야옹!

“잘 있었나?”

조동욱 회장이 온 걸 진작 눈치챈 누렁이가 문 앞에서 연신 울어대는 모습이 썩 귀여웠는지 답지 않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니라. 보일러 틀어놨으니까 금방 따실끼라.”

“어? 어 그러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낡은 문방구에 시선을 빼앗긴 정진수 회장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문방구를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냥 가게만 열어둔 게 아니구나.’

그런 곳은 많았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하루 담뱃값도 안 나오는 가게를 열어두고 그렇게 소일거리를 하는 노포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민호 문방구라는 낡은 가게는 그런 노포와 달랐다. 오래된 장난감도 있었으나 비교적 최근에 들여온 장난감과 과자들도 많았다. 장사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게가 정말 운영이 되나?”

“끌끌끌. 될 리가 있나! 지 할애비 유산으로 받은 긴데 안 팔고 이래 붙잡고 아둥바둥 살고 있는 기라.”

“고집스럽긴. 앞날이 창창한 나이에 이런 가게에 시간을 허비하면 쓰나.”

못마땅한 어투로 혀를 ‘쯧’ 하고 찼지만, 표정은 그 반대였다.

요즘 청년답지 않은 우직함과 할아버지의 가게를 지키는 그 마음이 참으로 대견했다. 아버지가 일군 회사를 크게 키울 생각은커녕 뜯어먹고 팔아치울 생각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형제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정진수 회장이었다.

“이 친구 이름이 민호라고 했나? 딸아이가 작년에 시집만 안 갔어도 내가 가져오는 건데 말이야.”

“하! 꿈도 크네. 내가 얼매나 공들였는지 니는 상상도 몬 한다.”

이 낡은 문방구에 들어갈 물건을 찍어내기 위해 온 계열사가 총력을 다하고 있다는 말은 자존심이 상해 차마 꺼내지 못한 조동욱 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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