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달고나(1)
드르륵.
“늦었습니다. 뭐라도 꺼내 먹고 계시지 그러셨어요. 커피 드시겠습니까?”
나는 방 안에 계시는 두 회장님께 얼른 인사를 드리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반강제적으로 이곳에 감금(?)하다시피 한 장본인이 무슨 염치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손님께 대접할 커피 한 잔 못 가져온 게 마음에 걸렸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급하게 탄 커피믹스 두 잔이 개다리소반 위에 올려졌다.
“창단식은 벌써 끝났드나?”
“네, 조촐하게 진행했습니다.”
“정작 돈 낸 사람은 쪼차내뿌고. 끌끌.”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됐다고마. 니도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그래. 그 생각을 좀 들어보고 싶은데? 우리 대현자동차도 출혈이 큰 투자였으니.”
경황이 없어 이제야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대현그룹의 정진수 회장은 다행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구구절절 그리해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할 자리가 되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눈치를 보며 어르고 달래야 할 자리가 되진 않았다.
“제가 드린 커피는 한 잔입니다.”
“응?”
“지금 바로 드시면 너무 뜨겁고 오래 기다리면 차갑게 식어 맛이 없습니다. 양이 줄지도 늘지도 않는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지요. 대중의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새로운 이슈가 생기고 사람들은 그 이슈에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슈는 이 작은 유리잔에 담긴 커피와 같습니다. 다 먹고 나면 그만입니다. 맛있게 먹고 한 잔을 더 원하는 커피가 될지, 아니면 그냥 심심한 입이나 달랜 커피가 될지는 얼마나 맛있는 순간에 먹었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유는 적절했다. 나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을 너튜브나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는 데 쓰고 있다. 소위 말하는 떡밥은 금방금방 바뀐다. 조금만 타이밍이 늦어도 이미 쉰 떡밥이 되어 아무도 읽지 않거나 지겹다는 댓글이 달리며 저 뒤 페이지로 묻히기 일쑤다.
미니카의 유행을 타고 이미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가 미니카프로팀을 창단한다는 소식은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이렇게 커뮤니티 사이트에 조금씩 퍼지다 뉴스와 매스컴에 나올 시기는 대회 직전이어야 한다.
“허허. 그러면 우리는 언제 도와주면 되겠는가?”
“대회에 참석해 주십시오. 일본에서 열리는 대회라 조금 멀지만 적어도 두 회사에 손해를 끼치진 않도록 하겠습니다.”
“대회가 두 달 뒤라고 했나?”
“이제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습니다.”
“일정을 비워 놓도록 하지.”
“내도 갈 끼라.”
“감사합니다.”
야구와 축구는 프로팀에 회장이 직관하는 경우가 의외로 빈번했다. 소탈한 모습을 보여줘 이미지메이킹을 하기도 쉬웠고 개인적으로 스포츠에 광팬인 회장도 많았다. 하지만 비인기 종목에, 그것도 특정 업체가 주관하는 대회에 두 회장님이 참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큰 화젯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러면 다미야만 좋은 일 시켜주는 꼴 아닌가? 생돈 들여 대회 홍보만 해주면 영 아쉬운 장사인데 말이야.”
핏줄의 무서움인가?
재벌가 총수로 대현그룹을 이끄는 회장답게 이 골방에서 싸구려 커피믹스를 대접하는 나에게 더 내놓을 것이 없냐고 묻고 있다.
은근한 말투로 아쉬움을 표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아직은 계획 단계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우승만 한다면 올해 대회에 투자하신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그 계획이라도 말해보게.”
“안 됩니다.”
“뭐?”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가 재미있을 리 없으니까요. 대회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싫든 좋든 3년 치 돈은 영화 푯값으로 이미 지불하지 않았습니까? 비싼 표를 사셨으니 재미있게 보셨으면 합니다. 정 궁금하시면 지금 알려드리겠지만요.”
“허허. 그래. 결말을 알면 재미가 없지. 내 기대하지. 커피 잘 마셨네.”
비밀이랄 것까지도 없다. 두 사람이 알고자 한다면 그룹 내에 알아내지 못할 게 없을 테니 말이다. 치기 어린 장단에 맞춰주신다 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게 두 회장님을 보내고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방구의 불을 밝혔다.
문방구 중앙에 길게 내려온 펜던트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 뒤, 우리 문방구의 자산 1호인 오락기를 밖으로 꺼내 플러그를 꽂는 것이 영업 준비의 끝이다.
누가 올까 싶은 이 낡은 문방구는 의외로 단골손님이 제법 있는 편이니 쉴 수가 없다.
* * *
우당탕.
잠깐 설거지를 하는 사이 녀석들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 밖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야! 무슨 일이야!”
고무장갑을 낀 채 밖으로 달려 나왔더니 세 녀석이 평상에 미니카 트랙을 조립하고 있었다. 아마 무너지는 소리는 창고에서 이 트랙을 꺼내는 소리였나 보다.
“아니, 연습실에 운동장만 한 트랙을 놔두고 왜 이걸 꺼내고 있어?”
지금쯤이면 사람들도 모두 마무리하고 퇴근할 시간이다. 시원하게 달릴 수 있는 트랙이 종류별로 여덟 코스나 있었다. 한 코스씩 달려도 건전지가 남아나질 않을 텐데 왜 창고에 박혀 있는 저 작은 트랙을 꺼내는지 모를 일이다.
“달려봤는데 이거만 못해.”
“난 아직 미니카도 못 만들었스므니다.”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하는 녀석들 사이로 지환이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네. 지환이는 좀 늦게 와서 미니카도 없지? 이참에 만들고 가. 너희 둘이 좀 도와주고.”
“형은 뭐 해?”
“간식 만들려고.”
설거지하다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국자를 떨어뜨려 손잡이가 부러졌다. 손잡이를 다시 고치더라도 더 이상 쓰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국자를 보고 생각난 과자가 있었다.
바로 달고나다.
준비물은 오직 3가지. 설탕, 베이킹소다, 국자. 이것만 있으면 누구라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그야말로 국민 간식이다. 저번에 장을 보면서 조미료를 넉넉하게 카트에 담은 덕분에 재료는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우리 문방구에서도 가스버너를 곁에 두고 아이들이 셀프로 만드는 이 달고나는 제작자의 손맛이 들어가기에 재미가 더해져 꽤 인기가 있었다.
국자, 뽑기, 달고나. 용어는 가지각색이지만 우리 문방구에서는 뽑기라 불렸던 것 같다.
백 원을 내면 할아버지가 까맣게 그을린 국자에 설탕을 가득 부어주셨다. 그 국자를 가스버너 위에 올려두고 나무젓가락으로 살살 젓다가 소다를 찍어 섞으면 완성되는 간단한 과자다.
나비, 별, 하트 같은 모양을 찍어낸 뽑기는 핀으로 조금씩 갉아내서 깨지지 않고 모양을 그대로 따내면 공짜로 한 번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늘 아쉬운 아이들에게 이 뽑기는 제조법과 손기술만 있다면 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기도 했다.
어려운 코너 구간을 전문가에게 맡기면 4분의 1 내지는 절반을 받기도 했으니 무분별한 대행업이 성행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엄연히 불법(?)이기에 할아버지에게 걸리면 잔소리를 들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간식은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바로 국자의 사망이다. 바닥은 까맣게 그을리고 설탕이 굳은 국자는 어린아이가 수세미로 문질러서 원형을 되찾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집집마다 까만 국자가 한두 개씩은 꼭 있었다. 국자를 태운 벌로 등짝이 남아나질 않은 아이들은 결국 가내수공업을 포기하고 문방구에서 못다 한 쉐프의 꿈을 풀었다.
나는 문방구집 손자답게 이 달고나를 무제한으로 제조할 특권이 있었다. 밥을 먹어야 하니 인제 그만 먹으라는 할아버지의 제지가 없다면 하루에 다섯 번도 넘게 만들어 먹었다. 나름 이 분야에는 프로라 할 수 있다.
국자 위에 수북하게 쌓인 설탕은 어느덧 모두 녹아 맑은 물로 넘칠 듯 말 듯 찰랑거렸다. 나는 나무젓가락에 베이킹소다를 두 번 찍어 국자에 섞었다.
소다가 들어간 설탕물은 몇 번 저어주자 이내 달고나 본연의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간혹 하수들이 성공 확률을 높여 보겠다고 소다를 한 스푼씩 넣곤 했는데 그건 최악의 방법이다. 달고나를 소태처럼 쓰게 만들 뿐만 아니라 너무 강도가 약해져서 오히려 금방 부서지고 만다. 당장에는 바늘이 쑥쑥 들어가니 잘 되는 것처럼 착시 효과가 있을 뿐이다.
방에서 지환이와 미니카를 조립하던 녀석들은 어느덧 내 주위에 몰려와 달고나를 만드는 모습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형, 이게 뭐예요?”
“달고나 몰라?”
“문어게임에서 본 거네!”
맞다. 유명한 드라마, 문어게임에서도 이 뽑기가 나와 한창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 평소 무슨 음식을 먹고 사는진 모르겠지만 이 재벌가 녀석들은 드라마에서나 봤지 달고나를 직접 먹어봤을 리 만무했다.
“그 앞에 접시 좀 꺼내봐. 부어야 하니까.”
입이 네 개다. 거기에 한 명은 국자 채로 씹어먹을 식성을 가진 철진이다. 국자 하나로 만든 달고나로는 양이 턱없이 부족할 게 분명했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달고나 한 덩이를 접시에 담은 뒤 나는 곧바로 국자에 설탕을 새로 부었다. 한번 식으면 그 생명이 다하는 국자이기에 지금 최대한 많이 만들어 놔야 했다.
부지런히 젓고 접시에 옮기길 수차례. 그렇게 커다란 달고나가 다섯 덩어리가 완성되고 우리는 좁은 방에 둘러앉아 연신 입을 오물거리며 지환이의 미니카를 조립했다.
“잘하네.”
“그러게. 쩝.”
“어릴 때 자주 만들었스므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지환이는 곧잘 미니카를 조립하고 있었다. 알려주지 않아도 공구를 능숙하게 썼고 따로 집어 온 튜닝 부품도 척척 제 위치에 연결했다.
시어머니에 빙의해 이런저런 참견을 할 작정에 신나 있었던 두 형제가 김이 샜는지 달고나로 관심을 옮겼다.
“형, 이거 납작하게 해서 그 무늬는 못 만드나? 드라마처럼.”
“호떡 누르는 거랑 쿠키 틀만 있으면 돼. 하고 싶어?”
“에이, 그거 그냥 바늘로 쑤시기만 하면 만드는 건데 누가 못 해요?”
“야, 그것도 힘들어. 그리고 우리 때는 직접 만드는 거부터 해야 해서 더 어려웠어.”
동네마다 방식이 달랐지만, 우리 문방구는 철저하게 DIY를 고수했다. 제공하는 건 오로지 나무젓가락과 정량의 설탕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아이에게 가스버너를 직접 켜서 만들라 시킨 게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래도 되는 시절이었다. 지금과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조금 다를 때였으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스버너 앞에 앉아 뽑기를 만드는 모습은 지금도 잘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냥 설탕만 넣고 녹이는 거잖아. 이건 진짜 쉬워 보이는구먼.”
유일하게 도운 일이라곤 접시를 꺼낸 것밖에 없는 놈들이 또 싸구려 도발을 해댄다. 어차피 국자도 사야 하고 냉장고도 텅텅 빈 상태. 내일 퇴근하고 마트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저 아니꼬운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지금 당장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 일었다.
“좋아. 어차피 마트 가야 하는데 재료 사 올 테니까 한번 해봐.”
근본적 귀인오류라는 말이 있다.
남이 하는 건 다 쉬워 보이고 금방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컫는 말이다. 이 녀석들은 지금 그 근본적 귀인오류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얼른 차 키를 챙겨 마트로 차를 몰았다.
극상의 달고나를 맛봤으니 이제 절망을 맛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