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약속된 선물
(네! 드디어 다미야4WD세계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해설을 맡은 배재송 캐스터.)
(김상순 캐스터입니다.)
(아, 우리 선수들 시작부터 출발이 좋지 않았죠?)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고 있지는 않지만 유독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의 검차가 까다로웠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는 진행이었습니다. 두 선수가 마지막 검차에 겨우 통과해 지금 점핑트랙에서 1차전인 영국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오랜 출전 경험이 있어서 이런 검차에 문제가 생길 수 없었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검차를 통과한 건 다행이지만 테스트 주행이 없었죠?)
(그렇습니다. 검차 시간에는 테스트 주행 시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키 포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선수들은 지금 상당히 불리한 상황입니다.)
이어폰으로 들리는 중계 멘트는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정확한 분석이었다.
아마 다른 중계 채널과 너튜버들의 방송 송출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기에 채팅창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물론 대회 현황은 부스에 앉아 있는 우리가 제일 잘 알지만. 스피드팀과 점핑팀이 나뉘어 있고 출전도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한창 정신없는 와중에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렇게 정확도 높게 누군가 중계해 준다면 불필요한 소통을 줄일 수 있다.
특히 방금처럼 내가 나서야 하는 순간이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 나는 선수이면서 이 팀의 책임자로서 귀를 열어두어야 했다.
(점핑트랙 1차전이 곧 시작합니다. 한국과 영국 선수들은 출발점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갑시다.”
긴 기다림이었다. 우리는 어쩐지 전보다 더 무거워진 미니카를 손에 들고 출발지점으로 향했다.
더 이상 핫핑크의 유니폼이 창피하지 않았다.
팀원들과 내가 하나로 이어지는 유대의 끈 중 하나다. 물론 조금 괜찮은 색이었으면 좋았겠지만.
출발점에서 나는 상대 팀의 주장에게 악수를 먼저 청했다.
상대 팀은 후원사의 마스코트인 표범이 큼지막하게 그려진 녹색 유니폼, 우리 핫핑크 유니폼과는 너무나 대비되었다.
방금 전 창피하지 않다는 생각이 1분 만에 깨져버렸다. 철진이 이 자식, 대회가 끝나고 돌아가면 가만두지 않겠어.
“선수들은 전원 버튼을 올리고 각자 트랙에 미니카를 올려주세요.”
창피함도 잠시, 심판의 안내에 맞춰 트랙에는 가지각색의 미니카들이 올려졌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끝났다.
이렇게 유리막에 막힌 트랙 위에 미니카를 올려두면 선수들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두 달 가까운 기간 동안 혼신의 노력을 다한 미니카는 지금 출발대 위에 섬과 동시에 그 결과까지 모두 정해진 걸지도 몰랐다.
승부는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준비한 작은 선물은 먼저 회장님께 닿았다.
(선수들의 미니카가 출발점에 모두 올라왔습니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미니카들의 모습이 조금 이상한데요?)
(스티커가 커버 전신에 붙어 있습니다. 지금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은 마치 일반 자동차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김민호 선수의 차량을 비롯해 세 명의 선수는 삼정자동차에서 첫 번째로 양산된 T20 트럭을 형상화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미니카는 대현자동차에서 이번에 선보인 신형세단 g120이군요!)
우리 점핑트랙을 달리는 미니카는 스피드트랙과 다르게 전신 커버를 사용했다. 면적도 넓었고 따로 데코 스티커를 붙일 공간도 많았다.
당연히 넓은 공간에는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의 로고가 박혀야 했다. 그게 후원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아쉬웠다.
임펙트가 부족했던 것이다.
고작 손톱만 한 로고 하나 박자고 이 대회에 출전한 게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PPL도 그랬다. 어중간하게 나오면 눈에 거슬리지만 대놓고 광고 티를 내면서 나오면 오히려 피식 웃게 된다.
우리는 이왕 할 광고라면 정도를 넘어서기로 했다.
그렇게 다소 내 억지가 반영된 결과가 이 3D 착시 스티커였다.
정면에서 45도 각도로 카메라를 비추면 영락없는 삼정자동차와 대현자동차로 보이도록 프린트된 스티커를 전면에 빈틈없이 붙였다.
만약 카메라가 그 각도로 비추지 않는다면 어떡하냐는 질문은 나오지도 않았다.
사람의 욕구는 무섭다. 9개의 돌멩이가 있고 저 멀리 한 개가 떨어져 있다면 그 한 개를 가져와 10개의 짝을 맞추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카메라를 촬영하는 사람이라면 이 3D스티커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분명 착시효과가 일어날 각도로 카메라를 세워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전광판에는 미니카들 사이에 고급 세단 두 대와 투박한 트럭 세 대가 섞여 있었다. 다섯 대가 잠시 보인 착시는 무리해서 두 회장님을 이 자리에 불러낸 것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기도 했다.
(3, 2, 1, 출발!)
위에에에엥.
유리막이 치워지면서 10대의 미니카는 빠르게 트랙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벌떡.
‘영화 푯값을 하겠다 카던 기 이거가?’
조동욱 회장은 큰 전광판으로 보이는 화면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허, 이 대회에서 우리 g120이 경기에 나오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응? 자네, 거기 서서 뭐 하나?”
조동욱 회장은 정진수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 사물들이 멈추고 경기장에 분주히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움직임도 멈췄다.
그리고 역행했다.
걸음은 뒤로 돌아갔고 해는 서쪽에서 뜨고 동쪽으로 졌다. 그렇게 빠르게 역행한 시간은 30년 전으로 돌아가서야 멈췄다.
* * *
‘여기는…….’
삼정자동차가 시작된 평택의 제1 생산공장. 잊을 수 없는 곳이었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조동욱 회장은 젊어진 자신을 확인할 새도 없이 옛 공장의 모습을 눈에 다시 담기 바빴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때였다.
“회장님! 3번 라인에 생산된 본넷이 전부 깨져 있습니다.”
“뭐라꼬? 언능 가보자!”
양산을 앞두고 들린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얼굴에 기름 얼룩을 가득 묻힌 조동욱 회장은 구슬땀을 흘리며 3번 라인이 가동되고 있는 공장으로 달렸다.
“이게… 무슨 일이고?”
“프레스 기계가 고장 났습니다.”
다소 무책임한 대답에 짜증이 솟구쳤으나 지금은 균열이 가버린 보닛들이 더 중요했다.
“기술자는 불렀나? 언제 고쳐진다 카드노?”
“저… 지금 출발해도 내일 아침이나 돼야 도착한답니다. 그리고 수리 장비는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고…….”
“니 빙시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내일이다, 내일! 내일 아침까지 여 트럭 20대가 안 나와 있으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리나!”
삼정자동차에서 첫 번째로 양산된 차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는 날이다. 없는 돈을 모두 긁어모아 두둑이 쥐여주고 취재를 와달라 온 신문사와 방송국에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이 공장으로 수많은 기자가 몰려올 텐데 사고도 이런 사고가 없었다.
시일에 쫓겨 새로운 설비가 들어오는 대로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생산라인이다. 금형은 벌써 완료되었어야 할 초반 공정이었으나 당장 출시를 앞둔 전날에서야 가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첫 생산품을 만들기도 전에 고장 나 버렸다.
내부에 굳이 없어도 되는 부품이라면 나중에 슬쩍 끼워 넣는다지만 보닛은 차의 얼굴과도 같았다.
보닛 없는 차 사진이 찍혀 전국으로 퍼지는 참사가 일어나기 직전인데 답답한 소리만 하는 담당자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여 철판때기 대봐라.”
“회장님, 어쩌시려고…….”
멈춰버린 프레스 기계 사이를 손으로 가리키는 조동욱 회장에게 담당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대봐라, 언능! 카고 지금 공장에 있는 아들 다 불러온나. 박 대리, 니는 저 트럭 몰고 가가 이 근처 돌면서 오함마 있는 대로 긁어모아 온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프레스 기계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조동욱 회장은 소리쳤다.
“느그 저 트럭에 있는 오함마 가지고 와가 이거 다 두들기라. 알긋나?”
“회, 회장님, 그러면 이 기계 다시는 못 씁니다! 4억짜리입니다!”
“시끄럽다, 고마! 4억? 40억짜리라도 개안타. 내일아침까정 이 본네뜨 다 못 만들어내믄 나도 망하고 느그들도 다 집에 가는 기다. 머 하노? 빨리 안 치고!”
쾅. 쾅. 쾅.
조동욱 회장의 다그침에 마지못해 시작된 해머질로 공장은 마치 커다란 대장간처럼 쇳소리가 울렸다.
“똑바로 안 할 끼가! 이리 내라!”
어색한 동작으로 해머를 힘없이 치는 직원 한 명을 끌어낸 조동욱 회장은 기어코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갔다.
그렇게 다들 손이 저릿할 정도로 해머질을 하고 나자 금형 사이에 들어 있던 철판은 투박한 트럭의 보닛이 되었다.
“인자 하나다. 이거 뺑끼질 보내고 다음 판 낑가 넣어라.”
“회장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일단 이 오함마부터 주십시오.”
“시끄럽다! 빨리 가온나! 삽질 안 해본 아들이 맥아리 없이 치가꼬 언제 19개 다 만든단 말이고! 시간이 읎다. 빨리!”
그렇게 힘겹게 만들어진 보닛은 트럭에 하나하나 자리를 잡아갔다.
두 겹씩 낀 장갑 사이로 피가 고여 뚝뚝 흘렀지만, 조동욱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 삼정그룹이 살배달이나 하는 방앗간 소리를 안 들을라모 이 차가 무조건 내일 나와야 한다. 그래야 아버지 영정에 소주라도 한 잔 뿌릴 면이 서는기라!’
말 그대로 피와 땀으로 완성된 삼정자동차의 첫 차는 그렇게 지독한 산통을 겪고서야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대현자동차와 성용자동차보다 힘도 떨어지고 내구성도 떨어지며 장점이라곤 저렴한 가격뿐이라는 악평을 받았지만 그렇게 세상으로 나온 T20은 조동욱 회장에게 긍지이자 자부심이었다.
삼정그룹이 물류로 배달비나 받아먹고 산다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대한민국의 기계산업의 한 축을 떠받치는 당당한 기업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시발점이었으니.
공장 앞 공터에 가지런히 주차된 트럭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조동욱 회장의 시간이 다시 흘렀다.
* * *
“그런데 자네 대들보에 뭐 밉보인 거라도 있나? 왜 삼정그룹차는 저렇게 오래된 걸로 해놨는지 원.”
놓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 정진수 회장이 연신 폰으로 사진을 찍다가 뒤늦게 삼정자동차의 모습이 유독 투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동욱 회장에게 물었다.
“끌끌끌. 니 모리겠나?”
“뭘?”
“우리 삼정자동차가 저 난다긴다하는 명품 차들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기라. 그것도 세계대회에서 말이다. 끌끌끌.”
늙은이의 한 맺힌 꿈을 한 시골 문방구 주인이 대신 이루어 준다고 젊은 날의 자신에게 말하면 과연 믿어줄까? 아니, 당장 작년의 자신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문방구, 고맙데이.’
전해지지 않을 인사는 갈 길을 잃고 무심한 늙은이의 속마음을 한참이나 헤집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