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79화 (79/151)

#79. 금단의 영역(1)

순조롭다.

모든 일이 순조롭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부장과 사원, 그리고 선수들이 자체적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업무를 분장했다. 삼정그룹과 대현그룹에서 사용하던 서류 양식 중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 합치기까지 하자 중구난방이던 보고 체계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각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완료 예정일은 언제인지, 그리고 타 부서와 연계되는 부분도 알기 쉽도록 작성된 보고서들은 예상대로 내 손길이 전혀 필요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주세요.”

아직 12시도 안 된 점심시간.

나는 당당히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처음 2, 3일은 민망한 마음에 눈치를 보다 슬며시 빠져나갔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후 일과는 간단하면서도 지극히 단순했다.

세 녀석과 잔뜩 캐온 나물이 아직 냉장고에 한가득 있었다. 된장찌개와 초장에 나물을 그렇게 찍어서 대충 한 끼를 때우고 나면 개다리소반에 중고마켓에서 구매한 싸구려 노트북을 켜두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래 봤자 양심상 켜둔 이메일 창이 전부.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19명의 직원이 모두 주도적으로 업무를 처리해 나가는 와중에 사장이 나서서 그 의욕을 꺾을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충실히 농땡이를 피우는 중이다.

“그런데 너희들 일 안 해?”

“형도 안 하잖아. 난 올해 실적 다 채워서 연말까지 출근카드만 찍으면 돼.”

“저는 널널한 시즌이므니다.”

사우디로 출장을 간 상진이를 제외한 두 명도 내가 오전만 하고 문방구로 돌아온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점점 문방구에 오는 시간이 당겨지더니 오늘은 같이 점심까지 먹게 되었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려 했더니 좁은 방에 남정네 셋이 복작거리는 날이 계속되고 있다.

“형, 나물 캐러 갈까?”

“그만 좀 캐자. 초장을 하도 찍어 먹어서 속이 쓰리다, 인마.”

과장이 아니었다.

막상 캐왔으니 버릴 순 없었고 마을 어르신들께 나눠드리려 해도 나물을 마당 가득 자루째 쌓아두신 이장님 댁과 상황이 비슷했다. 두 형제와 지환이가 나눠 가져간 뒤에도 아직 며칠을 더 먹어야 끝날 양이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다.

진수성찬도 하루 이틀이지 기껏해야 혼자 하루 두 끼를 먹는데 양껏 먹어봐야 줄어드는 티도 나지 않아 골치가 아팠다.

그리고 골치가 아픈 녀석이 하나 더 있다.

“야옹!”

“윽!”

누렁이가 앉아 있는 내 허벅지를 밟고 지나갔다. 예전에도 그리 작은 덩치가 아니었는데 철진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굴러다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로 뚱냥이가 되어버렸다.

이전의 날카로운 인상보다야 지금 둥글둥글한 모습이 훨씬 귀엽지만, 문제는 저 커다란 덩치로 사람을 밟고 다닌다는 점이었다. 특히 잠을 자는 새벽에 무방비한 상태에서 밟히게 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을 몇 번이나 느끼게 되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왜? 난 보기 좋구먼.”

“사람도 저렇게 뚱뚱하면 병이야!”

대수롭지 않게 누렁이를 안아 들고 뱃살을 만지고 있는 철진이에게 핀잔을 주고 동물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생생동물병원입니다.)

“아, 혹시 방문 예약 가능할까요?”

(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김민호입니다.”

(아! 누렁이 아버님! 오늘 저녁 6시에 가능하세요! 호호호.)

“네, 그럼 그때 방문 드리겠습니다.”

뚝.

“야 이 씨! 좀 떨어져!”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거친 숨소리를 내며 폰에 귀를 대고 있던 두 녀석을 밀쳐냈다.

“여자야?”

“이쁘므니까?”

두 녀석은 남자들이 모여 있을 때 여자와 통화를 하면 반드시 나오게 되는 두 질문을 동시에 던졌다.

“두 분 다 이쁘셔.”

“두 분?”

“방금 전화 받은 사람은 간호사분, 의사분도 예쁘셔.”

“오올.”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긴 하지만 적어도 두 명은 어디서 못생겼다는 말을 들을 인상은 아니었다. 특히 수의사분은 그 미모가 너무나 뛰어나 오히려 거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탓에 같이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두 녀석은 오랜만에 놀릴 건수를 잡았기에 좀처럼 게슴츠레하게 웃는 눈을 풀지 않았다.

나는 그런 두 녀석을 무시하고 문방구로 향했다.

지금은 데면데면한 사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아이다.

그저 수의사와 환자 사이로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이미 그 사실을 안 이상 빈손으로 방문하기 어려웠다.

“선물하게?”

“그래. 여기서 물건을 고를 날이 다 오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은 금단의 영역이다.

남자아이가 기웃거리거나 혹은 눈길을 절대 줘서는 안 되는 곳. 바로 여자아이들의 장난감이 가득 쌓인 진열장이다.

색이 바래긴 했으나 모두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들이다. 바닥에는 공기놀이, 팔찌나 목걸이를 만드는 구슬과 지금도 용도를 알지 못하는 보석함, 원색의 귀여운 주방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있는 것들은 각종 캐릭터가 프린트된 옷 갈아입히기 종이들이다.

이 진열장에 있는 장난감 중에 골라 선물로 들고 갈 작정이었다. 받는 쪽도 부담 없는 선물을 잠깐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다.

남자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들에게도 문방구는 추억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태생부터가 달랐다.

남자와 여자.

아무리 놀 친구가 부족한 시골이라도 남자와 여자는 자연스럽게 무리가 갈렸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을 굳이 배우지 않아도 그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 시스템은 참으로 오묘하면서도 철저해서 마냥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술래잡기, 숨바꼭질, 말뚝박기, 경찰과 도둑 등 비교적 성별의 특색이 나타나지 않는 놀이는 곧잘 같이 모여서 즐겼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엄격한 규율이 따랐다.

남자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미니카, 비비탄 총싸움.

여자는 공기놀이, 인형 옷 갈아 입히기, 고무줄, 소꿉놀이, 땅따먹기.

이 영역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혹은 서로의 영역에 관심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놀림감의 중심에 놓였다.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어린 나이에 범접하지 못하는 금단의 놀이는 더 큰 욕망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욕망을 참지 못하는 남자아이는 반드시 닿게 된다. 집에서 몰래 할 수 있는 공기놀이에.

짤랑짤랑.

하트 스티커가 과하게 붙은 핑크빛 플라스틱 상자를 흔들자 다섯 개의 공기가 반가운 소리가 났다.

“이게 무엇이므니까?”

“몰라? 공기놀이.”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

나조차도 방 안에 숨겨두고 몰래 즐겼던 은밀한(?) 놀이였다. 두 녀석이 직접 해봤을 리가 만무하지.

딸깍.

나는 비교적 여성스러움이 덜한 투명한 상자에 담긴 공기를 꺼냈다.

꽤 괜찮은 공기다.

동글동글한 꽃잎 모양이 아닌 각진 팔각형의 공깃돌.

외관으로 보자면 화려한 꽃잎 모양이 단연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고수의 공깃돌이다.

화려한 장미는 가시가 있는 법. 손가락과의 접점이 낮아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거나 멀리 튕겨 나간다. 게다가 하늘로 던져졌을 때도 불규칙한 움직임을 보인다.

반면 단면이 매끄러운 팔각형의 공깃돌은 그립감부터 훨씬 편안했다. 손에 쥐고 위로 던져져도 밀착된 공간이 훨씬 좁아 공기가 멀리 퍼지지 않는다.

“잘 봐. 이렇게 하는 거야.”

촤륵.

나는 바닥에 공깃돌을 뿌리고 오랜만이라 조금 뻣뻣한 손놀림으로 하나씩 던져 잡았다.

처음은 한 개씩, 그렇게 다 잡고 나면 두 개씩. 점차 늘려 가다 마지막엔 손에 쥔 공깃돌을 모두 던져 손등에 올린 다음 다시 잡았다. 이렇게 마지막으로 잡은 공깃돌의 개수가 점수로 합산되는 방식이었다.

처음이라 주먹 안에 마지막으로 들어 있는 공깃돌은 고작 두 개였다. 그래도 두 녀석에게는 꽤 신기한 동작이었는지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호객 행위가 끝났으니 장사를 시작할 차례다. 나는 공기가 가득 든 박스를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

「4월 21일

조철진: 3,300원 -> 800원

조상진: 6,000원

김민호: 9,700원 -> 7,200원

이지환: 5,100원 -> 2,600원」

달력에는 오랜만에 큰돈이 차감되었다. 요즘엔 미니카나 총싸움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하루치 용돈은 대부분 게임과 불량식품에 쓰였다. 달력을 넘겨보니 이렇게 한 번에 2천 원이 넘는 돈이 차감 된 날은 비비탄 총을 샀던 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거 좀 비싸지 않아?”

“이 돈이면 게임이 25판이므니다!”

“야, 이게 원래 정가야. 그리고 너희들이 비싼 거만 골랐네! 저기 1,500원짜리도 있네.”

너무 낡아서 차마 돈을 주고 팔기 어려운 물건들은 전부 회장님께 부탁드려 새로 들였다. 당연히 금액도 그만큼 올라갔고 녀석들은 20여 년을 뛰어넘은 문방구 물가를 피부로 느끼는 중이었다.

우리는 평상의 트랙을 치우고 각자 한 자리씩 모서리를 차지했다.

바람이 부는 야외경기장은 실내경기장보다 훨씬 난이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방에서 공깃돌을 뿌렸다간 누렁이가 신나게 발로 굴리며 장난을 칠 게 뻔했다. 그렇게 다소 갑작스러운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

“아오!”

예상대로 녀석들은 손등에 올리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탄식을 뱉으며 번번이 실패를 맛보고 있다. 물론 나도 두 녀석과 별반 큰 차이는 없었다. 꾸역꾸역 점수를 내고는 있었으나 모든 공깃돌을 잡는 깔끔한 5점짜리 끝내기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조금만 더 연습하면 민호 형 따라잡겠는데?”

“이건 민호 형도 잘 못하므니다.”

“뭐?”

처음에는 하나씩 잡는 것도 못 하더니 몇 번 만에 세 개까지 진도가 나간 철진이 가볍게 도발하자 지환이가 거들었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나와 두 녀석의 실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 승리는 당연하고 그 차이는 압도적이어야만 한다. 쉽게 닿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왕좌는 도전받게 된다.

지난 설날의 찬탈자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나게 둘 순 없다. 하이에나같이 호시탐탐 내 약점을 노리려 드는 놈들을 그냥 둔다면 분명 그리될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추억 속에 묻힌 그리운 날을 다시 떠올렸다.

* * *

그날은 봄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던 이른 오후였다. 원래라면 친구들과 운동장을 뛰놀 시간이다.

티비에 만화영화가 시작하려면 한참이 남은 지루한 순간.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아이들에게는 비가 오는 날은 절망의 날이었다.

나는 이 지루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할부지! 나 공기놀이 하는 거 진짜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녀석, 알았다. 할비가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밖에 가서 가져오거라.”

“응!”

만약 골목대장인 내가 여자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공기놀이를 몰래 했다는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평판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종국에는 전통성을 인정받아 거머쥔 왕좌의 권위가 흔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뱀처럼 이 작은 공깃돌 다섯 개는 방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나를 매일 괴롭혔다. 그리고 오늘 할아버지의 약속까지 받아내고 나니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얼른 문방구로 나가 눈여겨 봐두었던 공깃돌을 집어 방으로 돌아왔다.

공기놀이는 섬세하다.

최소한 우리 마을에서만큼은 여자아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이유가 있었다. 특유의 섬세한 손놀림이 아니면 손등에 제대로 올리지도 못한다. 애초에 거칠게 뛰놀던 남자아이들이 쉽게 해낼 만한 놀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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