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직장인은 쉴 수 없다(4)
그 사고가 있은 지 하루가 지났다.
차재훈 부장의 부상은 등산하다 실족했다곤 하나 엄연히 업무상 일어난 산업 재해였다.
병원에서 전해 듣기로는 발목에 인대가 조금 늘어난 것 이외에는 큰 부상은 없다고 했으니 오늘까지 안정을 취하고 삼사 일 뒤면 퇴원이라 했다.
“다들 준비되셨습니까?”
“네, 구단주님. 푸, 푸흡!”
“크흡. 우, 웃으면 안 됩니다. 차재훈 부장이 난감할 겁니다.”
우리는 말과는 다르게 눈에 웃음기를 가득 품었다.
가벼운 부상. 굳이 병문안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경조사를 챙기는 게 직장 동료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미덕이라고는 하나, 굳이 발목을 좀 접지른 걸로 병문안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이건 순수한 악의다.
그간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터라 어쩐지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난데없이 장문의 진심 어린 문자를 받게 되었으니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가 전후 사정을 듣게 된 직원들과 선수들은 배꼽 빠지게 웃느라 천식이 도진 사람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시는 없을 천재일우의 기회.
팀원들은 내 제안에 만장일치로 전 인원이 병문안을 가기로 정했다. 딱히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런 문자를 보내고 우리들의 얼굴을 보면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지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은 강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렇게 큰 차 몇 대에 옹기종기 모여 타고 도착한 곳은 삼정병원의 1인 특실.
“우와. 우리도 다치면 여기서 치료받을 수 있나요?”
“다칠 생각부터 하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요.”
“아마 여긴 오지 못할 겁니다. 비용 청구만 되니까요. 마침 같이 있던 아는 분이 힘을 써주신 겁니다.”
처음부터 차재훈 부장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철진이 그래도 막상 다친 모습을 보니 측은했는지 직접 전화를 걸어 예약해 주었다.
특실이래 봤자 병원이 거기서 거기겠거니 했던 나도 막상 복도부터 병원인지 호텔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시선을 자꾸 뺏겼다.
“들어가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안에서 차재훈 부장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문을 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철컥.
문이 열리고 얼굴 여기저기에 반창고를 붙인 차재훈 부장이 눈을 질끈 감고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널찍한 병실은 1인실이어도 우리 19명이 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렇게 찾아오실 정도로 많이 다치진 않았습니다. 아무쪼록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모기만 한 목소리로 감사함을 표한 차재훈 부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간파했는지 귀와 볼은 터질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죽기 전에 문자까지 보내 주시고 감동입니다. 나중에 다 모아서 프린트한 다음 사무실에 액자로 걸어둘 생각입니다.”
“구, 구단주님!”
“푸하하!”
“자, 놀리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잠깐 자리에 앉아보시겠습니까?”
나는 직원들을 바닥에 앉히고 원래 이곳에 오려고 했던 목적을 말했다.
“계획에 조금 엇나가긴 했지만 여기서 나머지 회의를 해도 되겠죠?”
어제 사고(?)가 나기 전 내가 그렇게 회의를 끝내고 자리를 비운 이유는 달리 있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우리 팀은 고작 20명이다. 업무가 체계적으로 분업화되고 전문성 있는 인력이 적재적소에 있지 못했다.
간판은 삼정그룹과 대현그룹 로고가 박혀 있는 거창한 이름이지만 결국 그 실체는 중소기업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우선 궁금한 부분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구단주님, 마케팅은 어떻게 하실지…….”
“제품 설계를 맡길 업체는요?”
“자금도 문제입니다.”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 한마디씩 저마다 막막한 부분을 토로했다. 나름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작성했다고는 하나 고작 PPT 파일 하나다. 굵직한 사업을 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자료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네?”
내 대답이 부족했나 보다.
“여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부장급 인원이 다섯에 명문대학을 나와 수천의 경쟁을 뚫고 입사한 엘리트 사원이 다섯,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미니카에 가장 조예가 깊은 선수가 무려 아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의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막막할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됩니다. 지금껏 그리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뜬구름 잡는 소리로 치부해 버리기엔 지금 우리는 너무나 진지했다.
“현업에서 물러난 사람은 없습니다. 기존 거래처, 비슷하게 진행했던 사업, 능숙한 외국어, 혹은 신입사원의 열정도 괜찮습니다. 퍼즐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각자 맞는 위치에 퍼즐 한 조각씩을 맞춰 보는 겁니다. 다소 촉박한 시간이지만 우리는 이미 여기 말고는 갈 곳이 딱히 없습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도 전관예우로 불러주는 곳 하나 없는 부장들과 짐짝처럼 팔려 오다시피 한 신입 티를 덜 벗은 사원들이다. 선수들 또한 다니던 직장에서 나온 상태였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대회 우승으로 번 3년 동안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막다른 길에 서게 된다.
“감당하지 못할 문제가 있다면 저를 찾아오시면 됩니다. 설명이 충분히 되었습니까?”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문제는 아마 한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매뉴얼은 없다. 저들이 고심하고 진행하는 그 하나하나의 업무는 아무도 그 결과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들뿐이다.
나는 그렇게 잘못 나온 결과를 수습하는 역할이다. 내가 일선에 나설 필요도 없는 회사다.
선수들은 말하지 않아도 직원들을 위해 밤을 새워가며 대회 준비에 열을 올렸다. 직원들 또한 그런 선수들을 위해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담요와 난로를 구해왔다.
그 마음이 변치 않는 한 이 사업은 큰 문제 없이 굴러갈 것이다.
서로를 믿는다. 그리고 각자 할 일을 한다. 마치 유토피아를 꿈꾸는 허무맹랑한 짓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누구도 반론을 펼치지 않았다.
해볼 만하다는 뜻이다.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해 보세요. 내일부터는 또 바빠질 것 같습니다.”
들어올 때만 해도 웃음기가 가득했던 직원들과 선수들은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되어 병실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하나둘 사람들이 떠나고 병실은 나와 차재훈 부장만 남게 되었다.
“저도 내일까지는 쉬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저녁에 퇴원해야겠습니다.”
“아, 퇴원하셔도 사무실은 나오지 못하십니다.”
“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우리 쪽으로 당겨와야 하는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다미야 4WD 부서 하시모토 타케시 부장입니다.”
“…….”
내 대답에 차재훈 부장이 말없이 침음을 삼켰다. 확답을 당장 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랐다. 전반적으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혹할 만한 제안을 해도 평생 다녔던 직장을 옮기는 일은 좀처럼 성공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일본의 기술을 배워올 때도 해당 직원을 비싼 값에 스카우트해 오면 간단하게 끝날 일을 몇 배의 수고를 들였다. 지금 중국에서 우리나라의 기술자를 데려가는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거기에 더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마당에 입을 늘리는 데 무리한 비용을 소모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미야라는 회사가 아무리 매출 규모가 적은 완구회사라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그런 기업의 부장직급은 우리가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해도 넘어오기 힘듭니다.”
“차재훈 부장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올곧은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경직되고 뒤가 구린 회사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충분히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지금 하시모토 부장이 우리 구단에 오지 않는다면 이 사업은 시작도 전에 실패로 끝납니다.”
우리 사업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일이다.
미니카 사업의 전반적인 흐름을 꿰차고 있는 실무진이다. 그리고 다미야에서 준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그대로 당겨올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차라리 구단주님과 더 일면식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안 됩니다. 제안하는 위치가 다르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일단 일본으로 가세요. 여기 그 사람의 명함입니다. 돌아올 때는 반드시 두 명이어야 합니다. 구슬리든, 겁박하든 수단을 가리지 말고 데려오세요.”
정보의 격차는 협상에서 큰 우위를 점하게 해주는 키포인트다. 하시모토 부장과 같이 족발에 소주까지 마신 전적이 있는 나보다 일면식도 없는 차재훈 부장이 이번 만남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서야 할 순간은 그렇게 차재훈 부장이 뒤흔들어 놓은 뒤여야 했다.
미안하지만 직장인은 쉴 수 없다. 발목에 깁스를 했더라도 해야 할 일이 줄어드는 게 아니니 말이다.
* * *
삼정그룹의 식구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저녁 시간.
고풍스럽게 꾸며진 넓은 다이닝룸 식탁에 조동욱 회장과 두 아들이 둘러앉았다.
“이기 뭐꼬?”
평소 같으면 인사 대신 ‘밥 묵자’로 시작되는 조용한 식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색달랐다.
“이건 두릅, 그리고 죽순입니다. 저기 쌈은 씀바귀, 이건 돌나물입니다.”
식탁 가득 채워진 초록색 나물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철진이 설명했지만 조동욱 회장이 듣고 싶었던 답이 아니었다.
“아니, 이게 와 식탁 위에 올라와 있나 이 말이다.”
“저희가 땄습니다…….”
“와?”
“같이 먹으려고요.”
“…….”
조동욱 회장은 이번에도 와?라는 질문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질문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서 국이 다 식을 시간이 되어도 원하는 답을 시원스럽게 듣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느그가 직접 땄다고?”
“민호 형이랑요.”
“허허. 일단 묵자.”
세계적인 기업 삼정그룹 일가의 저녁 식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박한 밥상이다. 담긴 그릇은 고급스러웠으나 그 흔한 고기 반찬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풀밭이라 한참 갈 길을 잃은 젓가락이 그나마 익숙한 두릅으로 향했다.
우물우물.
‘이 두릅이 이런 맛이었나?’
아무리 고급 한정식집에서 맛보던 익숙한 반찬이라지만 방금 산에서 따온 싱싱한 나물과는 그 향과 맛의 차원이 달랐다. 입안에서 퍼지는 봄나물 향은 사그라지지도 않는지 씹을 때마다 코끝을 간질었다.
하지만 두릅은 그다음 입에 들어간 음식에 비하면 그저 에피타이저일 뿐이었다.
후룩.
“……?!”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갈 입에 넣은 조동욱 회장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연신 수저를 놀렸다.
“이 된장찌개 누가 끓였노?”
“민호 형이 너무 많이 끓였다고 나눠줬습니다.”
“문방구가! 내… 내 그럴 줄 알았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맛이었다. 유명한 식당을 모두 수소문해서 직접 공수해 온 설렁탕을 아무리 먹어봐도 찾지 못했던 바로 그 맛.
입안 가득 감칠맛이 돌며 뇌리를 강타하는 깊은 그 맛을 설렁탕이 아닌 된장찌개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조동욱 회장은 이날 밥을 세 공기나 비우고서야 식사를 마무리했다.
“다 묵었으믄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그라.”
“네…….”
좀처럼 없던 일이다. 어느 정도 배가 차면 회사 이야기로 한참을 떠드시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먼저 일어나는 것이 삼정그룹 일가의 저녁이었다.
자식이 손수 따온 나물의 향기 덕분이었을까? 이날은 어느 집 평범한 부자들처럼 일 이야기가 아닌 무심한 대화가 커피 한 잔만큼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