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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2화 (82/151)

#82. 신의 영역(2)

‘밥은 어디서 먹자고 하지? 저번에 먹었던 국밥집을 갈까?’

설란은 민호에게서 전화가 왔던 그때부터 지금껏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국밥집에서의 추태가 있었던 뒤에 처음 만나는 날이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만난 민호와 합석까지 하자 긴장감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나아질까 싶어 한잔 두잔 들이켰던 게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이야.

평소 같으면 다섯 병도 너끈한 주량이지만 연심을 품은 사내 앞에서는 그 튼튼한 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음 날이 되어서 아빠에게 부모 욕을 제외한 온갖 상스러운 욕을 들으며 등짝이 빨개질 때까지 맞았던 일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그 뒤에 들은 말은 몇 번이나 되물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민호 씨가 어릴 때 그 골목 대장 민호 오빠라니!’

같은 이름이라 해서 ‘혹시 그때 민호 오빠?’라는 질문을 할 만한 세월이 아니었다. 자신도, 민호 오빠도 몰라보게 변했다.

취향이 확고한 편이라 해야 할지 그 긴 세월을 넘어 어릴 적 선망했던 오빠를 다시 만나 또 마음을 품은 자신이 스스로 대견했다.

그러나 상황은 설란에게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미 다 큰 처녀가 낯선 남자 앞에서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다. 그날 처음 그랬다고 아무리 변명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음을 모르지 않았다.

유일한 직원인 소미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길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그냥 무턱대고 찾아가 볼까? 아직 문방구에 있다던데?’

‘그건 너무 뜬금없잖아요. 연락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요. 스토커 같아요.’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그럼, 네가 생각해 보던가!’

‘아버지께서 그분 회사 기술고문이라면서요? 도시락을 가져다주면서 만나는 건 어때요?’

‘그것도 말해봤는데 따라오면 호적에서 파 버린 대…….’

‘이미 해보셨구나…….’

대화는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뜬구름 잡는 대화를 반복하다 민호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민호는 홑몸이 아니었다.

문에 닿을까 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남자와 반대로 호리호리한 외국인 남자를 데리고 진료실까지 들어온 것이다.

누렁이 이야기로 공감대를 쌓으며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계획이 모조리 무너졌음에 실망감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고맙게도 민호 오빠는 오랜만에 만난 고향 동생에게 선물을 들고 온 것이다. 선물의 답례를 핑계로 밥을 사준다 할까 했지만 그렇게 단발성 이벤트로 그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기회였다. 게다가 이미 불청객이 두 명이나 끼어든 상태였다.

‘그래! 공기놀이로 밥 내기를 하자고 하는 거야! 이렇게 내가 이기면 먼저 얻어먹고 그 뒤에 또 선물에 대한 답례로 둘이 오붓하게 밥을 먹으면 되잖아?’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한 해답이었다.

그 때문에 이번 내기는 반드시 성사되어야 했고 승리는 어차피 떼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 * *

명분 없는 싸움이다.

왜 싸워야 하는지, 싸워서 이기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를. 그런 싸움에 억지로 등 떠밀리듯 나섬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다.

흡사 옛 로마의 검투사와 같았다.

목숨을 건 전투를 펼치고 관객들의 함성을 듣지만 결국 이겨도 차가운 감옥으로 돌아가 다음 경기를 기다리는 신세.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긴다 해도 얻을 거라곤 고작 밥 한 끼다. 혹여나 여자애들이나 하는 그런 놀이를 왜 그렇게 잘하냐며 되려 놀림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다면 전부를 잃게 된다.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동생들의 기대감, 오직 승리만 새겨왔던 왕좌의 길까지.

검을 쥐고 콜로세움에 섰다면 자의든 타의든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니 말이다.

“그럼 한판만 하자.”

“그래!”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 설란이는 가증스럽게도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패배를 모르는 얼굴.

생글생글 웃으며 가위바위보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민 모습에는 이미 승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룰은 그때 그대로지? 참, 오빠는 모르나?”

“알아. 눈높이까지 던지기만. 5점 이상 벌어지면 끝.”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공기놀이는 여자애들만 했는데?”

“교실에서 애들이 그렇게 자주 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아.”

큰일 날 뻔했다.

공기놀이는 동네마다 룰이 다르다. 고추장, 다이아몬드, 눈사람 등등. 이 간단해 보이는 놀이에도 제법 다양한 규칙과 변수가 존재한다.

필연적으로 이런 다양한 규칙은 그만큼 분란을 가져왔다.

친선 경기에서는 당연히 허용되고 다소 억울하더라도 웃고 넘어가지만, 공식 경기는 달랐다.

실력과 관계없는 운적인 요소와 보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애매한 동작들은 모두 금지했다.

오직 실력으로 판가름 나는 프로의 세계.

쉬는 시간 10분 안에 어떻게든 운동장에 튀어 나가 한 번이라도 더 공을 차려고 하는 남자들이 이런 살벌한 공기놀이 룰 따위를 알 리가 없었다.

이따금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교실에서 여자아이들이 하는 공기를 곁눈질로 관전했다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

다행히 설란이에게는 다소 흐릿한 기억이었는지 내 변명에 쉽게 수긍했다.

“나부터 한다?”

가위바위보를 이긴 설란이 먼저 공깃돌을 집었다.

촤륵.

공깃돌이 굴러간다.

좁은 간격으로 흩어진 공깃돌의 위치만 보아도 그간 얼마나 공기놀이를 많이 해 왔는지 관록이 보였다.

“어? 천재공기가 아니네?”

“공식 경기에서 천재공기는 취급하지 않아.”

나이가 들어 손이 커지긴 했지만, 동네 아이가 직접 천재공기를 펼치는 걸 본 것조차 처음이었다. 공식경기에서 인정하지 않는 플레이는 위험성 높은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설란이는 착실하고 안정적인 동작으로 단계를 높혀갔다. 빠르지만 서두르지 않는 템포를 유지하면서도 당찬 손짓이다. 어릴 적 말을 걸 때마다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던 공주는 어엿한 공기놀이의 프로로 자라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섯 개의 돌이 모두 손등 위에 올려졌다.

무난하게 5점이 예상되는 상황.

하지만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저, 저건!”

설란이의 검지와 약지가 조금씩 벌어진다. 조금씩. 조금씩. 집중해서 보지 않았다면 움직이는지도 모를 미세한 동작. 그렇게 벌어진 틈 사이에 공깃돌이 굴러 들어갔다.

준비 동작이다. 한바탕 춤사위를 펼칠 준비 동작.

찰나의 순간.

하늘로 높게 띄워진 돌들은 마치 풀로 붙여놓기라도 한 듯 두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먹이가 하늘로 올랐으니 매가 비상할 차례다. 섬섬옥수(纖纖玉手)의 손길이 하늘로 쏘아지듯 올라가며 날카로운 매의 발톱으로 변했다.

쎄에에엑.

파공음.

매서운 발톱이 공기를 찢으며 목표물을 향해 다가갔다.

단 한 개의 먹이도 놓치지 않을 각오로 잔뜩 구부린 날카로운 발톱은 단번에 두 덩이 중 하나인 공깃돌 3개를 붙잡았다.

그러나 비상의 날갯짓은 계속되었다. 목적을 이룬 매의 속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직 먹이는 남았다. 이 먹이가 땅에 떨어진다면 지금껏 착실히 단계를 밟고 올라온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터.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 개의 돌을 이미 움켜쥔 매의 발톱이 다시 펼쳐지면서 수직으로 하강했다. 그 모습은 흡사 우리의 전통 춤사위 같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손을 우아하게 휘젓는 그 춤 속에 매의 발톱이 숨겨져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팍.

하늘에 떠 있는 먹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춤사위가 끝나고 매의 발톱이 서서히 펴졌다. 그 발톱 안에는 공깃돌 5개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두 배니까 10점. 맞지?”

“아리랑…….”

아리랑.

하늘로 띄워진 다섯 개의 돌을 두 번에 걸쳐 나눠 잡는 이 아리랑은 까마득한 옛날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기술이었다. 형과 누나들, 그리고 그 형의 형과 누나들로부터 말이다.

정말 강에서 주운 조약돌을 갈아 공깃돌을 만들었다는 그 시절. 누군가는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던 고수들의 생사결중에 탄생했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서울로부터 들어온 신문물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없었다.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천재공기는 어찌어찌 2단이나 3단까지 올라가는 아이가 있었으나 아리랑은 기껏해야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작은 손으로 흉내 내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감히 시도한다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렀고 그릇에 맞지 않는 과한 대의를 품었다 하여 지탄받았다.

점수가 벌어진 상황에서 승자는 당연히 모험할 필요가 없었고 애초에 점수가 멀어진 패자에게는 전설의 기술을 펼칠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잊혔던 전설의 기술이 부활했다.

뒤늦은 영웅의 등장이 천추의 한이라.

설란이의 각성이 조금만, 25년 정도만 더 빨랐어도 근방에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이는 공기놀이의 중심도시가 될 수 있었음이 개탄스러웠다.

“조금만 빨리 나왔더라면 우리 마을이 공기놀이를 제패했을 텐데.”

“나도 처음 성공해본 거야.”

내 아쉬운 혼잣말에 설란은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나에게 공깃돌을 건넸다.

“자, 이제 오빠 차례.”

“응?”

배려였다.

공기 대결은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한 명이 실수할 때까지 계속 점수를 쌓는 방식과 서로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차례를 넘기는 방식.

당연히 연속해서 계속 점수를 내는 방식이 선을 잡은 사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흐름을 한번 탄 손놀림은 실수가 월등히 적었다. 그렇게 큰 격차로 점수를 먼저 낸다면 상대방은 큰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설란이는 그런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음에도 나에게 턴을 양보했다.

동생들의 앞에서 큰 점수 차가 나지 않게 해주려는 배려가 분명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뛰어난 자질과 무공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만하여 세상을 우습게 여기다 비명횡사하는 고수가 얼마나 많았던가?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배려는 강자의 미덕이나 그 대상은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향해야 한다. 검을 겨눈 상대가 아니라.

나는 건네받은 공깃돌은 가만히 쥐었다.

방금까지 사나운 매의 발톱에 있던 공깃돌의 온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뿐이다. 긴장으로 저도 모르게 배어 나온 땀은 없었다. 긴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저 한낱 유흥거리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비무를 제안했고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기에 땀도 나지 않은 것이다.

개탄스럽도다. 세상이 어지러워 마땅히 실력을 보여야 할 그 시절에는 잠룡이 되어 산속에 은거했고 영웅호걸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에서야 신선놀음하듯 속세에 나오다니.

설란, 너는 거기까지다. 뛰어난 자질과 노력으로 매가 되었으나 결코 대붕(大鵬)이 되진 못한다.

나는 공깃돌을 바닥에 흩뿌렸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넘어서야 한다. 전설의 기술, 아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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