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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83화 (83/151)

#83. 천년의 기다림

인생은 역경과 고난으로 점철된 쇠사슬과 같다.

태어남부터 어머니와 나에게 모두 쉽지 않은 위험이었으리라.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와 병에 걸리고, 또는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더위에 지치며 혹은 사경을 헤매기도 한다.

그뿐이랴? 세상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스스로 걷게 된 그 작은 아이에게 끝없는 시험을 던진다.

술래잡기, 숨바꼭질, 딱지치기, 미니카, 그리고 공기놀이까지…….

그 누가 어린 시절이 마냥 행복했다 추억하는가?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지면 모든 것을 잃는 야생에 이제 막 서게 된 작은 아이에게 누구도 생존을 친절히 알려주는 법이 없다.

각자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찬 아이들이다. 코를 찔찔 흘리며 가만히 서 있는다 해서 친절히 알려줄 여유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배워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형과 누나들을 붙잡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끼워달라, 알려달라 간절히 외친다. 그래야지만 비로소 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손을 내밀어 준다.

배움의 다음 단계는 실전이다.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면 호들갑스럽게 달려와 된장을 발라줄 어머니는 그곳에 없다. 그저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달려야 한다. 때로는 무리를 지어서 때로는 홀로, 그렇게 놀이를 빙자한 치열한 전장을 달려야 함이 아이들의 숙명인 것이다.

나는 지금 다시 한번 그 전장에 섰다.

철진이와 상진이를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그들은 몸만 자랐을 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위기가 있었을지언정 승리를 쟁취하지 못할 걱정을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설란이는 다르다.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왕좌를 찬탈하려는 자가 아닌 당당한 도전자로 내 앞에 설 자격이.

어린 시절 흙밭을 뛰놀며 쌓은 실력은 까마득한 세월을 건너 드디어 왕좌에 닿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도전자는 너무나 경솔했다. 왕좌에 앉아 있는 황제가 공기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늙고 초라한 남자라 하여 온정을 베풀고 말았다.

착각한 것이다.

누가 왕좌에 앉아 있는지를 말이다.

나는 모두의 바람을 등에 짊어진 우리 마을의 마지막 골목대장. 내게 설란은 높은 벽일지 모르나 넘어서지 못할 벽은 아니다.

하늘로 던질 공깃돌을 집은 손은 전처럼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툭. 툭.

바닥에 있는 공깃돌을 하나씩 움켜쥐는 손은 지극히 평범했다. 고수의 여유로움도, 섬세함도 보이지 않았다. 왕좌를 건 비무가 아닌, 그저 혼자 가볍게 연습하는 것처럼 맥 빠진 손짓이다.

“어? 시간이 멈추지 않아!”

“동작도 어설프므니다.”

“그래도 안정적이긴 하네.”

내 동작을 모두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두 녀석이 호들갑을 떨었기에 내심 내 실력이 궁금했던 설란이의 눈도 점차 평정심을 찾아갔다.

잔잔한 호수와 같다.

태풍이 몰아치기 전의 호수.

그 고요함은 천기를 읽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자들에게 너무나 지루한 시간이었으리라. 허나, 그 고요함에 취해 놀잇배를 탄 그들은 이내 공포에 떨게 된다.

고작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대한 태풍을 만나기에.

나는 다섯 개의 공깃돌을 던져 손등을 펼쳤다.

“어! 아까 아리랑!”

“설마?”

검지와 약지가 벌어진 손등은 아리랑의 준비 동작과 같았다.

하지만 달랐다.

손등에 모든 돌을 올려두고 안정적인 자세로 손가락을 펼친 게 아니다. 이미 하늘로 올려진 돌을 받기도 전에 준비 동작을 끝낸 것이다.

검지와 약지를 최대한 반대쪽으로 꺾어 바구니 모양을 만들어 손등에 떨어진 공깃돌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게 점수를 잃지 않는 포인트였다.

그러나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빈 공깃돌로 셀 수 없는 밤을 수련했다.

빈 공깃돌이나 꽉 찬 공깃돌이나 떨어지는 속도는 같다. 문제는 손등에 닿았을 때의 반동.

그 반동을 극한으로 줄이기 위한 수련을 했다. 손등이 공깃돌과 같이 떨어지며 닿는 순간부터 천천히 속도를 줄여가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 속도가 빠르다면 손바닥은 이내 땅에 닿게 된다. 반대로 느리다면 빈 공깃돌은 힘없이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내 손등은 깃털이 되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공깃돌에 닿았다. 중력을 이기지 못한 공깃돌은 내가 벌려둔 틈 사이로 하나씩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속도는 점점 줄어든다.

호수는 다시 잔잔함을 찾았다.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게 내려온 손등 위에는 다섯 개의 공깃돌이 두 뭉치로 나뉘어 있었다.

“와! 이게 되네!”

“이제 아리랑만 성공하면 동점이야!”

아니.

태풍은 지나가지 않았다. 잠시 태풍의 눈에 담겨 고요함을 흉내 냈을 뿐.

바람은 다시 거칠어진다.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나는 공깃돌을 높이 띄웠다.

설란이 아리랑을 성공했을 때보다 반자는 더 높게 띄워진 돌을 세 사람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높게 띄워진 돌은 갈 길을 잃는다. 처음 던져진 미세한 각도의 차이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수록 크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패착?

아니다.

나는 이무기였다.

천년을 기다린 이무기.

잔잔한 호수 속에서 천년을 기다려왔다. 용이 될 그 날을 위해.

꽈아아악.

마침내 때가 되었고 천년의 기다림을 응축한 근육들이 꿈틀댄다. 이 순간을 위해 시간을 멈추는 공기를 펼치지 못했다.

모든 힘은 이 짧은 찰나에 담겨야 한다.

우우웅.

마침내 용이 솟아오른다. 중단전에서부터 극한으로 끌어모은 힘을 단번에 폭발시킨 내 손은 그 순간, 한 마리의 용이 되었다.

천지가 진동한다. 하늘로 솟구치는 용오름은 매의 발톱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감히 비견될 바가 아니다. 대지를 울리고 호수에 거친 파도를 만들었다.

텁.

하늘로 빠르게 솟구친 용이 마침내 여의주를 물었다.

“어?”

그리고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나아가지 못했다가 아니라 벽에 부딪혔다가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은 그대로 멈췄다. 하늘로 더 높이 솟구친 다음 내리박으며 남은 여의주를 취해야 아리랑을 성공시킬 수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은 것이다.

용은 다시 지면으로 끌어 당겨졌다.

아래로 깊은 포물선을 그리며 억지로 당겨진 용은 온전치 못했다.

관성의 법칙과 공기저항을 모두 이겨내야 하는 극한의 동작, 팔꿈치와 손목에 끊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온 것이다.

반쪽짜리 여의주를 거머쥔 용은 승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늘이 찢기고 상처가 벌어진 용은 다시 호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천년의 기다림은 고작 그런 상처로 포기할 세월이 아니다.

“후읍!”

통증이 뇌리를 저릿하게 울리는 와중에도 나는 여의주를 쥔 팔에 더욱 힘을 가했다. 아프다 하여 떨어지는 공깃돌이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까.

용은 다시 승천한다.

마지막 힘을 쥐어짠 용의 승천은 전보다 훨씬 빨랐다.

잃을 것이 없다.

이대로 힘을 다해 죽는다 해도 결국 자신의 운명이 거기까지임을 겸허하게 받아드려야 하리라.

쎄애애액.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온 용이 나머지 여의주를 물기 위해 다시 입을 벌렸다.

팟.

물었다.

여의주는 남김없이 용의 입으로 들어갔다.

용은 멈추지 않았다. 사력을 다해 하늘로 쏘아진 용은 마침내 여의주를 모두 물고 하늘로 올랐다. 진료실의 찬란한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은하수는 3배니까 15점. 내가 이겼네.”

손을 펼치자 다섯 개의 여의주가 담겨 있었다.

“말도 안 돼…….”

“방금 그건 뭐이므니까?”

“은하수야.”

은하수.

아리랑이 위로 솟구치며 한 번, 그리고 내려치며 한 번. 이렇게 두 번에 걸쳐 잡는 기술이라면 은하수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영역이었다.

위로 솟구치는 동작까지는 아리랑과 같았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힘껏 내지른 손으로 어찌어찌 한 움큼의 공깃돌을 잡아낸 뒤 그 가속도를 이겨내고 아래로 내려와 다시 솟구쳐야 한다.

U자의 포물선을 그리며 두 번에 걸쳐 잡아내는 은하수는 3배의 점수를 인정해 준다. 5점의 차이가 나면 승부가 나는 경기에서 3배의 점수를 준다는 것은 한 가지를 뜻했다.

지존(之尊).

감히 승부조차 허락지 않는 압도적인 무위이기에 그만 검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하늘 위에도 하늘이 있다.

온 천하가 제 세상인 양 하늘을 노닐었던 매도 결국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 닿지 못한다.

대붕(大鵬)이 되지 못한 매는 그렇게 날개가 꺾였다.

천년의 기다림으로 승천한 용이 일으킨 바람에 의해.

* * *

천년의 기다림에 비할 바는 아니나 여기 또 다른 기다림을 마주한 사람이 있었다.

까딱까딱.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꼬고 구두 끝을 까딱이던 하시모토 부장은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카페 정문을 응시했다.

딸랑.

문에 매달린 오래된 종이 울리며 멀끔한 모습의 정장 차림을 한 중년의 사내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으나 직감적으로 서로를 알아봤다.

빌딩 숲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가의 아기자기한 카페다. 손님이라곤 유모차를 몰고 온 주부와 젊은 학생들이 대부분. 또래의 남자, 그것도 검은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손에 든 채, 업무적인 용건이 있다 어필하는 사람은 둘이 유일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MM 프로팀의 PL 차재훈입니다.”

“다미야 유통지원부서 하시모토 타케시입니다.”

형식적인 인사와 명함이 오갔다. 차재훈 부장의 지갑에는 이미 민호에게 받은 명함이 있었으나 다시 받은 명함과 부서명이 달랐다.

차재훈 부장의 눈에 작은 이채가 일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멀리 오셨는데 찾기 어려운 장소로 안내해드렸습니다.”

“아닙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늦은 주제에 느긋하게 걸어들어와 놓곤 사과도 하지 않아?’

죄송하지 않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손님이기에 하시모토 부장은 빈말과 함께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정작 잘못을 한 사람은 그 사과를 태연하게 받고선 먼저 자리에 앉아버렸다.

심지어 주문을 위해 다가온 종업원에게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킨 차재훈 부장은 늦은 봄 햇살이 제법 따가웠는지 블라인드를 내려달라 요청하기까지 했다. 도무지 잘못을 한 사람의 태도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말을 잘하신다 들었습니다. 따로 통역을 부르지 않았는데 괜찮으실까요?”

“아, 괜찮습니다. 어릴 적 한국에 살아 모국어나 다름없습니다.”

“피차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시죠.”

만나자 한 용건은 하시모토 부장에게 있었다.

“저희 MM 프로팀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네?”

“이건 저희 측에서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차재훈 부장이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 내밀었다.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업무적인 협의를 위해 만나자 하지 않았습니까?”

하시모토 부장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었다.

“아, 업무적인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모두 들으신 뒤에 결정하셔도 됩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란 말인가?’

난데없이 스카우트 제의를 하겠다며 막무가내로 서류를 들이댄 것도 모자라 이제는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단다.

저번 대회에서 지은 죄(?)가 있기에 순순히 만남에 응했으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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