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거짓보다 잔인한 진실
“스페셜 러브 모에 오므라이스와 소다 나왔습니다!”
사전에 조사하면서 본 리뷰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오므라이스다.
홀로 서빙과 음식을 도맡아 하는 작은 분식집에서 주문한다면 입으로는 웃어도 눈으로는 ‘생긴 대로 그냥 제육 덮밥이나 주문하지 뭘 이런 귀찮은 걸 먹겠다는 거야?’라며 대충 냉동 볶음밥에 계란 물을 뒤집어 내놓을 법한 비주얼.
이걸 2만 원이나 받고 판단 말이야? 어이가 없군.
허무의 시대다.
누구도 사물의 본질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장인이 오랜 세월 다듬어온 손맛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보다 메이드복을 입은 종업원이 가져다주는 이 싸구려 오므라이스가 더 비싼 값을 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를 끝까지 잠근 기분이 들었다. 언뜻 보면 그저 잘 차려입은 옷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해 보이는 그런 옷 말이다.
착잡한 기분으로 수저를 든 순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첫 소개에 자신을 미쿠라 불러달라던 메이드가 갑자기 수저를 든 내 손을 붙잡더니 다급한 손사래를 쳤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아니다.
미쿠는 대충 만들어 낸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완성!”
케첩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참 씨름을 하던 미쿠가 완성이라는 해맑은 외침과 함께 나에게 내민 오므라이스에는 놀랍게도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맛있다. ♡」
도대체 내 어디가 한국 사람처럼 보였을까?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국적을 간파한 눈썰미와 더해 한국어까지 써준 그 마음이 아름다웠다. 필시 여러 나라 언어로 이 말을 익히는 데 제법 애를 먹었으리라.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고맙다는 눈인사를 한 뒤 수저를 떴다.
그런데 내가 식사를 시작하려는 순간에도 미쿠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곳을 보고 있나? 지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간 또 무슨 민망한 상황이 나올지 몰랐다.
그래. 얼른 먹고 일어나자. 여긴 35살 먹은 남자가 올 곳이 아니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오므라이스를 크게 한술 떠 입에 욱여넣었다.
그 순간.
짝짝짝!
“헤에! 민호 상, 멋있어! 남자다워!”
“쿨럭쿨럭!”
밥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설마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칭찬하기 위해 떠나지 않고 계속 있었다니! 누군가에게 밥 먹는 모습을 칭찬받아 본 것은 부모님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색하고 창피한 기분을 한껏 만끽하고 난 뒤, 미쿠는 무대 준비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밥 한번 먹기 힘드네.
무슨 짓을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위에 예쁜 글씨를 쓰고 주문을 외운다 한들 말이다.
텁.
이런저런 사전 행사(?)를 하느라 식어버린 오므라이스가 입안 가득 들어왔다.
맛있다.
달짝지근한 기성품 케첩 맛과 과하게 익혀 퍼석한 계란, 그리고 식어버린 볶음밥까지.
도저히 맛있는 조합이 아니다. 그러나 내 입안에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 먹을 만한 오므라이스가 들어와 있다.
이건… 미소의 맛이다.
주문을 외워주고 카트에 음식을 가져온 미쿠의 미소가 담긴 맛. 눈을 감지 않아도 그 미소가 떠오를 것만 같다.
치밀하구나. 이건 계획된 범죄다.
의도적으로 처음 나를 반겨준 메이드가 전속으로 마킹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정서적 교감을 나누기 위해 따라다닌 것이다.
싸구려 음식에 미쿠의 미소를 더하여 폭리를 취하는 이 소름 돋는 장사 행태는 가마솥에 레토르트 설렁탕을 끓여 회장님께 내는 나보다 더 지독했다.
분하지만 제대로 당했다.
그렇게 오므라이스를 반 정도 먹었을 때였다. 메인 스테이지에 조명이 켜졌다.
“여러분! 지금부터 민호 주인님이 주문한 나만을 위한 아이돌 콘서트가 시작됩니다! 열심히 응원해 주세요!”
홀로 무대에 선 미쿠는 나를 보며 손짓으로 뭔가 흔드는 동작을 취했다.
아, 이걸로 응원을 하라는 건가?
아까부터 용도가 궁금했던 플라스틱 봉은 조명이 켜지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은은한 형광색 빛을 발했다.
내가 형광봉을 쥐는 것을 확인한 미쿠는 바닥에 차분하게 앉아 준비 동작을 취했다. 이윽고 형형색색의 조명이 미쿠를 비추며 노래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제야 나만을 위한 아이돌 콘서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말 그대로 오롯이 나만을 위한 콘서트였다.
다소 사이드 쪽에 앉아 있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춤을 췄다.
과하게 힘든 동작이기에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 역력했으나 누가 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춤이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춤은 그리 잘 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딘가 모르게 미묘한 엇박자와 뻣뻣한 몸놀림. 심지어 몇몇 동작은 까먹었는지 당황하여 같은 춤으로 돌려막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어쩐지 귀엽고 짠해 보였다.
나는 어느새 메이드가 아닌 진짜 아이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콘서트에 간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쩌다 좋은 노래가 있으면 챙겨 듣는 수준이지 걸그룹에 콘서트 티켓까지 구해가며 이른바 덕질을 해본 적은 없었다.
고백하자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만만치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게 뭐가 그리 좋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나 또한 그들과 같았다.
비록 돈 때문에 하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한 춤을 보여준 미쿠가 앞으로도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민호 상, 감사합니다!”
열정적인 콘서트는 아쉽게도 한 곡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콘서트를 감상하느라 더 차갑게 식어버린 오므라이스는 어쩐지 점점 더 맛있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만의 아이돌 콘서트는 6천 엔. 소다까지 합해 이 짧은 순간에 1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썼다.
그러나 아깝지 않았다.
새로운 경험은 늘 영감을 준다. 인생의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이 영감은 마치 장난기 많은 어린아이 같아서 짧은 길을 둘러 가게 하거나 혹은 목적지를 바꿔놓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늘 새로운 영감을 떠올리며 그렇게 삶의 목적을 찾고 또다시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사물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 본질을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가 다를 뿐이다.
장인이 만든 오므라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나 메이드카페의 오므라이스 또한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참, 잊고 있었다.
「사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중고 게임 팩을 사기 위해 왔습니다.」
나는 빈 그릇을 치우는 미쿠에게 번역된 일본어가 적힌 폰을 보여줬다.
“아! 사쵸상!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이제야 내 용건을 알았다는 듯이 놀라는 연기가 가증스럽지만 이미 콘서트까지 본 마당이라 화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미쿠의 안내를 따라 조리실 옆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핑크빛 벽지와 장식이 가득한 메이드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좁은 통로 양쪽으로 천장까지 닿아 있는 선반이 줄지어 있었고 그 선반 위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지난 세월이 범상치 않은 낡은 기판들이 가득했다.
“흡.”
좁은 통로에서 미쿠를 따라 걷던 나는 갑자기 들이치는 역한 담배 냄새에 잠시 코를 막아야 했다.
“아, 미안, 미안. 담배는 안 피나?”
설마 미쿠가 담배를?
담배를 입에 문 채 뒤돌아서 묻는 미쿠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미쿠가 아니었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은 영락없는 30대 초반의 외모였다. 처음부터 마스크로 가려질 미모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더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입은 복장이 문제였다.
프릴이 과하게 달린 메이드복이다. 그리고 메이드카페 때와는 다르게 담배를 대충 물고 귀여운 눈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 목소리도 그때의 밝은 하이톤이 아닌 진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내가 진심을 다해 응원했던 미쿠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까마득한 어린 날 맛있게 먹던 번데기가 애벌레였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려주었던 때와 같았다.
그만큼 진실은 거짓보다 잔인한 법이다. 누군가 나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민다면 나는 주저 없이 파란약을 삼키리라.
원치 않는 진실에 내적 고통을 다스리려 애쓰고 있는 나에게 미쿠는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참, 소개가 늦었네. 내가 여기 사장. 부업으로 중고 게임팩도 팔고 있어. 밖이랑 조금 달라서 놀랐지?”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게 있다.
“한국말을 하시네요?”
“어. 나름 잘하지. 한국드라마 좋아하거든.”
“성준이 형이 일본어로 전화하길래 저는 한국말을 못 하시는 줄 알았어요.”
“걔 허세가 쩔잖아.”
“그렇긴 하죠.”
나는 존댓말을 꼬박꼬박 썼는데 미쿠 씨는 하대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한다는 미묘한 어드벤티지를 이용하는 노련함이다.
“그래도 제법이야? 난 살짝 골려주려고 메뉴판을 줬는데 춤까지 추게 할 줄 몰랐네.”
통로 끝에 있는 작은 사무용 책상에 올라타 양반다리를 한 미쿠 씨가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뻐근하다는 듯이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이미 내가 문을 열었을 때부터 누군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노련한 접객도, 그리고 뻣뻣한 춤 동작도, 누가 봐도 가장 고참이었으나 구태여 다른 직원보다 먼저 달려와 반긴 것도 말이다.
“마음 같아선 환불하고 싶습니다.”
“뭐 이 자식아? 즐길 대로 즐겨놓고선! 이 미쿠의 콘서트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제 마음속의 미쿠는 죽었습니다. 그렇게 여기기로 했습니다.”
“여기 눈앞에 있는데 멋대로 죽이지 마라!”
“좋은 아이였습니다. 딴에는 능숙해 보이려고 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춤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힘든 도시 생활에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였는데…….”
“거참, 저 밖에 현역으로 뛰는 애들 중에 나보다 더 고약한 애들도 많다고. 나 정도면 준수하다니까!”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추억을 되새기는 척 놀림 받는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당황해 물었던 담배도 떨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필사적으로 변론하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흠흠. 그런데 게임 팩을 찾는다고?”
“아, 네. 그때 성준이 형한테 말씀해 주셨던 게임 전부 사고 싶습니다.”
“악취미네. 미모의 메이드를 놀리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굴리지도 못할 게임 팩까지 산다니.”
“미모의 메이드는 모르겠고 게임기는 잘 동작합니다.”
“뭐?”
“지금 저희 문방구에 킨오파98로 영업하고 있어요.”
“うそ(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메인 기판도 다 사라지고 없는 모델이야!”
비슷한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들었다. 처음 게임기를 살 때도 이젠 어디서 구하지도 못하는 모델이라 했고 성준이 형과 무릅 형이 왔을 때도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혹시나 규격을 헷갈릴까 싶어 찍어온 게임기의 사진을 미쿠 씨에게 보여줬다.
“세상에! 이게 아직 있었네!”
“그러게요. 미쿠 씨는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