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걸스 패닉(1)
개당 만 엔이니까 3만 엔.”
“아까 먹은 음식이랑 같이 계산해 주세요.”
충격적인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미쿠 씨는 메이드카페에서보다 더 익숙한 손놀림으로 게임팩을 뽁뽁이로 여러 겹 둘러 박스에 넣어주었다.
“자, 상태가 좋아서 그냥 바로 꽂으면 돼. 문제 생기면 수리는 직접 하러 와야 한다? 나 귀찮아서 국제 배송 같은 건 안 해.”
“네, 감사합니다.”
구했다.
아쉽게도 일본판은 오늘 오전에 먼저 와서 가져간 사람이 있었기에 실패했지만, 다행히 한국어판은 남아 있었다.
이걸 일본에서 구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판의 전설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나 정식 수입도 되지 않은 게임을 문방구 앞에서 버젓이 켜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던전드래곤, 삼국지전기 같은 굵직한 게임도 같이 구했으니 성을 공략한 전리품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다.
“나도 한국으로 놀러 가면 꼭 들를게. 일본에는 이 작은 화면으로 하는 오락기가 이제 없어서 그리웠거든.”
“설마 그렇게 입고 오실 겁니까?”
“이 자식이 끝까지!”
“그럼 가보겠습니다.”
짧고 강렬했던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아키하바라 거리로 나왔다.
억지로 교환하다시피 한 명함 때문에 전화번호와 사무실 주소가 알려진 건 조금 꺼림직하지만, 만에 하나 고장이 나더라도 수리를 맡길 루트가 생겼다.
「민호: (사진)
민호: 영수증 보이지? 4만 엔이니까 인당 10만 원씩 쏴라.
철진: 일본판이야!?
민호: 아니 그건 먼저 누가 가져갔대. 그래도 한국판은 구했다.
지환: 그게 어딥니까? 못 구한 것보다 낫습니다.
철진: 쓰읍. 아쉬운데…….
상진: 그런데 성준이 형이 개당 만 엔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민호: 나도 피해자야. 모르는 게 나을 뻔했다고!
상진: 네?
민호: 여하튼 10만 원이다.」
게임팩의 구매 비용은 네 명이 똑같이 나눠 내기로 했었다.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네 명이 백 원씩 내고 게임을 하면서 40만 원을 채우려면 족히 연 단위의 세월을 바라봐야 하는 백년대계의 투자.
오락기를 하기 위해 오는 또 다른 멤버인 성준이 형과 무릅 형은 오히려 매출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너무 잘해서 백 원짜리 동전 한 개로 한 시간 가까이 즐기다 가니 회전율이 극악이었다.
그 때문에 매출의 1등 공신은 역시 철진이지만 요즘 물이 올라 철진이 역시 컴퓨터와 붙으면 끝판왕까지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미쿠 씨나 성준이 형에게 오락기 매물이 더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할까? 상태만 괜찮으면 전파상 아저씨한테 맡기면 되니까. 두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매물을 찾는다면 4인용으로 즐길 때 가장 재미있는 던전드래곤이나 삼국지전기도 도전해볼 만하다.
잠깐만.
나는 두 사람의 인맥으로 이런저런 희망 회로를 돌리다가 불현듯 스치고 지나간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걔 허세가 쩔잖아.’
분명 그렇게 들었다.
성준이 형의 나이는 마흔하나. 걔라고 지칭함은 최소한 성준이 형과 동갑이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이제야 어긋나 있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서른 초반의 나이로 이렇게 오래된 중고 게임기와 팩을 능숙하게 수리하고 팔 리가 없다. 관록이 붙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자연스러운 하대도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었다. 정말 내가 한참이나 나이가 어렸던 것이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메이드복을 입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일본은 무서운 곳이다.
지난번 대회 때는 시간이 촉박해서 하지 못했던 도시 구경을 느긋하게 해보고 진짜 일본 이자카야에서 사케도 먹어보려 했던 계획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호텔 침대에 누워 편의점에서 산 도수 높은 술을 마시며 오늘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흐릿해지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 *
딩동.
“손님, 체크아웃 30분 전입니다. 연장하시겠습니까?”
“아! 지금 나가겠습니다!”
예상은 했었다.
과하게 먹은 술로 아침에 아슬아슬하게 일어나 다급하게 준비하는 상황이 닥치는 상황을 말이다.
나름의 예방을 한답시고 세면도구만 빼놓고 가방도 미리 싸두고 청소도 끝내놨다.
알람을 못 들어서 30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지만 군필자에게 30분은 샤워와 환복을 마치고 잠시 티타임을 가져도 될 만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커피포트 옆에 있던 정체 모를 허브차로 아쉬운 해장까지 마친 나는 전보다 조금 무거워진 케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전세기를 탔을 때보다 조금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거치고 비행기에 올라 한국에 도착하기까지는 채 3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마중 나온다며? 어디야?”
나는 익숙하지 않은 술이 만든 숙취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마중을 나온다던 사람도 보이지 않아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로 철진이에게 따져 물었다.
(형, 벌써 도착했어?)
“비행기 뜨고 바로 내려오던데.”
(우린 이제 출발했어. 형이 여기 주차장으로 오는 게 빠르겠다. 위치 찍어줄게.)
“이럴 거면 그냥 내 차 타고 갔지! 그러게 왜 마중 나온다고 해서는…….”
뚝.
내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자 철진이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은 굳이 마중을 나오겠다고 해서 차도 가져가지 않았건만 기어코 길바닥에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
그렇게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끝까지 먹고 쪼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빨아대다 겨우 철진이의 차에 오를 수 있었다.
“뭐야? 전부 다 가는 거야?”
차에는 세 녀석이 모두 타 있었다. 상진이와 지환이를 태워 오느라 늦은 게 분명했다.
“성준이 형이랑 무릅 형은 벌써 문방구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대.”
“나 참.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야단인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가슴이 뛰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걸스 패닉은 용기 있는 자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킨오파, 철건, 축구, 하다못해 비행기 슈팅 게임까지.
백 원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게임들을 포기하고 걸스 패닉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남자보다 여자들이 이 게임에 곧잘 앉아 있었다. 퍼즐, 틀린 그림 찾기 같은 무난한 게임을 즐기던 차에 땅따먹기를 베이스로 하는 걸스 패닉은 선정성만 빼고 본다면 여성향에 좀 더 가까웠던 탓이다.
우리 시골 오락실에서도 이 걸스 패닉의 고수는 매일 지박령처럼 붙어 있던 백수 아저씨를 빼고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클리어했을 때 나오는 서비스 씬을 아무리 보고 싶다지만 차마 여자들이 하는 게임을 뒤에서 지켜보는 추태를 부릴 수 없었던 우리는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
실력만 쌓인다면 코앞에서 생생하게 직관할 수 있다.
다급함은 모두가 같았다.
끼익.
철진이의 차는 평소보다 훨씬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빈도가 높았고 그렇게 평소보다 훨씬 일찍 문방구에 도착했다.
“팩은?”
“저도 반가워요.”
인사 대신 팩의 행방을 물어오는 성준이 형에게 나는 불만 섞인 인사를 건네고 평상에서 캐리어를 열었다.
방까지 들어가 짐 정리 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할 사람들이다. 그렇게 나는 마치 입국심사대에서 가져가면 안 되는 물건을 들킨 외국인처럼 평상 위에 원하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케리어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옷가지들 사이에 둘둘 말려 있는 박스 안에서 팩을 꺼내자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한국과 일본을 모두 통틀어 이제 구할 수도 없는 팩이다. 인터넷에는 에뮬레이터로 돌아가는 게임을 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지만 그건 진짜 걸스 패닉이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았다. 이 낡은 브라운관 화면으로 보는 걸스 패닉만이 진정한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 팩이 오락기의 메인보드에 꽂혀 동작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꽂겠습니다.”
“자, 잠깐만! 후우!”
내가 팩을 꽂으려는 찰나 무릅 형이 메인 기판에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냈다.
그래. 지금은 신중에 진중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작은 변수도 허락되지 않았다.
딸깍.
경쾌한 결합음과 함께 신성한 의식은 끝이 났다.
“만약 고장 나 있으면 어쩌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확인하지 못했다.
미쿠 씨가 송곳처럼 생긴 기계로 여기저기 찔러보며 검사를 하는 듯했지만 정작 중요한 기판은 없었기에 게임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외관상 상태가 좋을 뿐,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다시 수리하러 가야지 뭐.”
“저는 안 갑니다. 이번엔 다른 사람이 가세요.”
또 다시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 숨넘어가겠네! 내가 켠다!”
머뭇거리는 사이 인내심이 다한 철진이가 모니터 뒤쪽의 전원 버튼을 올렸다.
(딴따다 딴딴)
익숙한 인트로 노래가 들렸다.
나를 비롯한 성준이 형과 무릅 형은 이 노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눈과 손은 지금 하는 게임에 집중하지만, 귀는 항상 열려 있는 이유가 있었다. 백 원이 들어가면 저 인트로 음이 산뜻한 음악으로 바뀐다.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항상 귀를 열어 놓았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
최소한 게임이 켜지고 대기화면까지는 무사히 넘어온 상황.
“누가 먼저 할래?”
“형들이 제일 잘하지 않아요?”
“아니. 이 게임은 달라.”
나와 성준이 형, 그리고 무릅 형까지. 각자 다녔던 오락실은 달랐지만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걸스 패닉은 그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큰 각오가 필요했다.
당시 오락실은 만화방처럼 금녀의 구역이 아니었다.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아기자기한 게임들도 많았고 남자와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비율은 낮았으나 오락실은 여자들의 방문이 잦았다.
만약 걸스 패닉을 하는 도중에 여자 손님이 온다면 상스러운 게임을 하는 그 치욕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홀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각오를 다지고 걸스 패닉에 동전을 넣는다면 그 순간 오락실에 있는 모든 남자의 염원을 담아야 했다.
클리어만 하자는 어설픈 각오로 플레이를 한다면 온갖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된다.
높은 점수로 클리어할수록 배경 그림은 더욱 수위가 높아지고 만약 100%로 클리어 한다면 엄청난 컷씬이 나오는데 그걸 포기하는 남자는 더 이상 오락실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누구도 이 걸스 패닉에 고수가 되지 못했다.
여자들의 방문이 뜸한 타이밍에 확실한 재미를 보장하는 쟁쟁한 게임들을 포기해야지만 시작할 수 있는 게임. 진입 장벽은 그 어느 게임보다 높았다.
심지어 100%를 노리기 위해 무리한 플레이를 하다 보면 보스의 패턴이나 감을 익히기도 전에 허무하게 게임오버를 당해버린다.
걸스 패닉을 잘하는 남자는 찾기 어려웠다. 나도, 성준이 형도, 철건의 세계챔피언이었던 무릅 형조차도 말이다.
“그럼 내가 먼저 해볼게.”
가장 먼저 목욕탕 의자에 앉은 사람은 성격이 급한 철진이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오락실 게임의 인지도로 세계적인 선수인 무릅 형이었다.
세계챔피언의 타이틀을 가진 무릅 형이 오락기에 앉은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다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세계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한다는 중압감 대신 평균 나이 30의 할 일 없는 남자들의 기대가 어깨에 달렸고 오래된 게임 화면에서는 다소 민망한 그림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