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96화 (96/151)

#96. 걸스 패닉(2)

땅따먹기.

그 옛날 갤러그 시절부터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고전 게임 중 하나다.

게임은 간단했다. 조금씩 조이스틱을 움직여 동그란 구슬이 이동하면 그 뒤로 선이 생긴다. 그 선이 내가 따먹은 땅까지 이어지는 데 성공하면 그만큼의 안전한 땅이 넓어지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걸스 패닉의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각 그림에는 몬스터와 보스 몬스터가 있다.

이미 따먹은 안전한 땅에서 한 발짝이라도 나오는 순간 그 모든 몬스터의 타깃이 되어 온갖 공격을 받는다. 이 공격이 실로 잔인하기 짝이 없어서 조금만 무리했다간 속수무책으로 죽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브로 나오는 각종 미니 게임들도 뒤에 있을 컷씬에 영향을 미친다. 단순히 땅따먹기만 잘해서는 원하는 컷씬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도 이 게임의 난이도를 올리는 요인이었다.

조금씩 안전하게 공략한다면 어떨까? 그 작은 화면에서 1㎝ 남짓한 거리만 이동한다면 말이다.

“형! 시간! 시간!”

「Game over.」

“아, 근처도 못 갔네.”

“조금 과감하게 해야 하나 봐요.”

“좋아! 이번엔 내가 한다!”

무릅 형의 아쉬운 패배에 뒤이어 철진이가 나섰다.

“오! 스타트 좋다!”

시원시원한 돌진이다. 검은색 화면을 마치 제 땅인 양 파죽지세로 뚫고 가는 철진의 구슬은 단번에 절반 가까이 되는 땅을 차지했다.

저것이 정답인가?

위험을 감수하고 순간의 운과 제발 들어올 때까지 때리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해법이었나?

“어, 어어?”

철진이가 먹은 땅이 이제 막 50%를 넘었을 무렵, 보스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쏘는 미사일도 늘어났다.

“2페이지가 있었어…….”

그래, 호락호락한 승부가 아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보스는 더 악랄한 패턴으로 공격을 바꾸었다.

「Game over.」

결국, 철진이의 최후도 무릅 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탕평책이 필요할 때입니다.”

지환이가 갑자기 은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했다.

“뭐, 탕평채? 여기 멀어서 중국집 배달 안 오잖아.”

“빠가, 철진 상. 탕평책입니다. 조선 후기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영조께서 펼친 정책입니다. 우리 마을도 이장님의 그런 탕평책으로 균형 있는 발전이 가능했다고 그러셨습니다.”

“어, 엉…….”

도대체 지난 설날 이장님과 지환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환이는 유독 역사 지식에 관해서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 해박했다.

“그래, 적절히 섞는 게 방법일지도 몰라.”

태초부터 내려온 진리.

음과 양, 하늘과 땅, 불과 물. 동양의 철학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중요시했다.

“내가 해보겠스므니다. 자, 이렇게 안전할 때는 빠르게! 그리고 위험할 때는 조금씩!”

「Game over.」

“으하하! 탕평책 같은 소리 하네! 20%도 못 먹었구먼.”

모두가 정답이 아니었다.

각자의 전략으로 수없이 도전했지만, 우리 여섯 명은 100%는커녕, 클리어조차 한 번밖에 하지 못했다.

그나마 운 좋게 보스가 내 땅에 걸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틈을 타 얼른 땅을 넓혔던 내가 첫 승리를 따냈다.

“오, 그래도 민호 형이 깼네요!”

“이건 클리어한 게 아니야.”

“왜요?”

“이제 보면 알아.”

「Stage clear!」

예상대로 스테이지 클리어라는 문구와 함께 나오는 사진은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걸스 패닉에서 어설픈 승리는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었다.

80%가 넘으면 클리어, 그리고 90%가 넘어야지만 비로소 제대로 된 그림을 만날 수 있다. 퍼센트를 낮게 해서 클리어하면 가려졌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지만 그게 전부라는 게 문제다. 우리가 간절하게 바랐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80%로 언저리에서 클리어한 플레이어가 얻는 것이라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닿았는데! 라는 아쉬움뿐이다.

“잠깐, 이제 돈 있는 사람 누구예요?”

「5월 26일

조철진: 1,400원 -> 0원

조상진: 2,600원 -> 0원

김민호: 2,700원 -> 100원

이지환: 2,100원 -> 0원

권성준: 1,000원 -> 0원

배재익: 1,000원 -> 0원」

달력에 적힌 스코어는 처참했다.

속이 더부룩해질 정도로 오락기에서 나오는 괴돌이를 잔뜩 먹으면서 정신없이 게임을 했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돈은 내가 가진 100원이 오늘 도전의 마지막인 셈이다.

“잠깐 방에 들어가서 회의 좀 하죠.”

나는 마지막으로 넣으려던 동전을 다시 손에 쥐고 타임을 선언했다. 오후의 지는 해는 너무나 따가웠다. 점점 더워지기 시작하는 날씨에 우리는 지쳐 있었고 덩치가 있는 성준이 형과 철진이는 등에 땀 자국이 선명했다.

삑.

벽에 걸린 작은 에어컨이 켜지고 좁은 방은 금방 냉기가 돌았다.

슥슥.

나는 찢어서 모아둔 지난 날짜의 달력을 꺼내 볼펜으로 걸스 패닉의 게임화면을 그렸다. 일종의 상황판으로 쓸 작정이다.

“우선 스타트 지점부터 문제입니다. 어느 쪽으로 땅을 넓혀가더라도 보스가 따라옵니다. 마지막까지 가면 스피드도 빨라지고요.”

“그래도 아래쪽부터 공략하는 게 낫다니까!”

“아니, 그보다 보스가 2페이지로 들어가기 전에 뭔가 수를 써야…….”

“조금 멀리 둘러 가더라도 아이템은 일단 다 챙겨야 해요!”

저마다 플레이하면서 알아낸 정보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공략 영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 모두 그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렇게 쉬운 길을 가자고 일본씩이나 가서 험한 꼴을 당하면서까지 팩을 구해온 것이 아니다.

게임 잡지도 사기 어려웠던 그 시절, 우리에게 공략은 오로지 어깨 너머 도둑질하듯 배우거나 혹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고 탁한 눈으로 종일 오락실에 앉아 있던 아저씨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봐야 하는 귀중한 정보였다.

그렇게 다소 비밀스럽게 전승되는 공략이어야지만 진정한 문방구 오락기의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원칙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사실 이 작은 단칸방은 그야말로 인터넷 세상이나 다를 바 없다. 모두 자신이 정답이라 외치고 있지만, 그 속에 진짜 진리를 찾는 것은 내가 스스로 걸어가야 할 길이다.

검증하고 또 검증해야 한다. 기회는 이제 단 한 번이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고작 하루치 데이터가 쌓인 조언들. 마치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럴싸하게 다른 레시피를 베껴 적어놓은 인터넷 블로그의 포스팅들이 섞여 있는 검색 결과를 보는 기분이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 시각은 필요치 않은 정보를 줄 뿐이다.

시야가 차단되고 복잡한 마음이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난 뒤 나는 귀에 들리는 정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쉬운 스테이지, 초반에 먹어야 할 아이템, 그리고 자잘하고 쓸모없어 보이는 팁까지.

그렇게 모인 정보들은 오히려 나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틀렸다면?

지금 다섯 명이 내놓은 훈수가 모두 그럴듯하게 포장된 거짓이라면?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저들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해본 경험조차 없는 자들이다. 정답에 가까이 가본 사람은 있어도 닿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형, 자요?”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길은 반대쪽에 있었어…….”

“네?”

“가시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다섯 명에게 확신에 찬 어투로 전장으로 향하자 말했다.

나는 학용품 코너에 꽂혀 있던 이름 모를 로봇이 그려진 빛바랜 책받침 한 개를 꺼내 오락기 위에 올렸다.

저물어가는 해 때문에 조도가 낮은 브라운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음을 방지하는 그 시절 우리만의 비법이다. 붉은색 목욕탕 의자도 햇빛에 적당히 열을 받아 거부감 없는 온도가 되어 있었다.

가려진 햇빛과 하만슬러 같이 편안한 의자.

이제 내 플레이를 방해할 요소는 모두 사라졌다.

땡그랑.

드디어 마지막 동전이 들어갔다.

드르르륵.

과자 배출구에서 무언가 동작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괴돌이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오늘만 족히 만 원 가까이 매출을 올린 오락기다. 괴돌이도 이미 채워두었던 양이 다한 모양이다.

참으로 매정하구나. 마지막 도전자에게 식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니…….

상관없다.

괴돌이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고 바지에 기름기를 닦는 루틴이 깨지긴 했으나 처음부터 틀을 깨려 마음먹었던 게임이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탁탁.

나는 매끄럽게 움직이는 조이스틱을 좌우로 흔들며 몸을 풀었다. 별것 아닌 그 손짓이 긴장했던 근육을 풀어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그림은 총 8개. 나는 그중에 가장 차분해 보이는 표정으로 안경을 낀 여자가 그려진 그림을 골랐다.

“형, 괜찮을까요? 이거 우리 한 번도 안 해본 건데.”

“설마?”

“무릅 형, 왜요?”

“민호는 지금 100%를 노리고 있어.”

“네!?”

100%.

90%를 넘어서는 아득한 경지다.

보스 몬스터를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가두고 모든 땅을 먹어야만 나올 수 있는 수치다. 심지어 그 보스 몬스터는 그림 밖의 빈 공백에 가둬야 했다.

극악의 난이도.

그렇게 100%를 달성하면 엄청난 보상이 뒤따른다.

내가 차분한 머리의 여자 그림을 고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역동적인 동작을 하고 있다면 보스몬스터를 몰아낼 공간이 그만큼 줄어든다. 최대한 동작이 평범해 보이는 그림을 선택한 것이다.

그림이 로딩되고 나는 더 이상 주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작은 구슬은 이 거대한 그림을 모두 밝히기에 너무나 연약하고 느렸다. 온 신경이 조이스틱을 잡은 손과 눈에 집중되는 순간.

구슬은 아직 밝히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곳은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곳이다.

안정적으로 땅을 먹는 것도, 무리해서 크게 나가는 모험을 하는 것도. 모두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작은 구슬이지만 단 하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먹은 땅은 아무리 강한 보스몬스터라도 침범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조금씩 마치 얇은 밧줄처럼 땅을 이어가며 보스몬스터에게 다가갔다.

투두두두두.

과한 크기로 날아오는 유도 미사일을 피해가며 조금씩 숨통을 조이던 내 구슬은 마침내 보스 몬스터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형! 조금만 더 가두면 완전히 못 빠져나올 것 같아요!”

나름대로 분석한 상진이의 외침이 들렸다.

하지만 이 역시 정답이 아니다.

보스몬스터는 무작위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나름의 지능이 있었다. 내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순간을 인식하고 달려온다. 그렇다면 그 거리를 늘리는 게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위험을 동반한다. 이미 고양이를 구석에 몰아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했다. 지금은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다.

우리 목표는 100%를 달성해 야한 그림을 히든 동영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 목적을 잊는다면 살아가는 이유를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달려!”

“쭉쭉 달려요!”

내 구슬은 모두의 응원을 담아 힘차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넓은 그림의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00%!」

“와아아!”

“오빠.”

“이걸 진짜 볼 수 있네!”

“민호가 해낼 줄이야!”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모두의 환호성은 마지막 도전에 간절했던 만큼 크고 열렬했다. 그런데 그중에 묘한 이질감이 섞여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응?”

“오빠! 뭐 해? 불러도 대답도 안 하고. 오늘 병원 쉬는 날이라 모처럼 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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