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걸스 패닉(3)
“어? 오늘 월요일도 아닌데 어떻게 왔어?”
“치. 뭐야, 오면 안 돼? 오늘 병원 수술 장비 정비하는 날이라 모처럼 시간 내서 왔더니 반기지도 않네.”
“아니야. 잘 왔어.”
“그런데 다들 모여서 뭐 하는 거야?”
“어? 아, 오락기가 고장 나서 수리했는데 잘 되는지 점검하고 있었어.”
변명치고는 상당히 그럴싸했다. 장정 여섯이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그 작은 화면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뒤에서 화면이 보일 리 없다.
딸깍.
내 말을 듣고 가장 측면에 있던 상진이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 오락기를 꺼버렸다.
더할 나위 없는 환상의 타이밍.
그렇게 천국으로 가는 문이 닫혀버렸다.
선택의 기로에 선 자에게 고민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착실하게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쓰고 겨우 마지막 기회에서 어렵게 달성한 100%의 서비스 컷이 로딩되기도 전에 오락기는 너무도 허무하게 꺼졌다.
아쉬움과 울분이 일었으나 누구도 그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지금껏 우리의 모든 희망과 열정을 담았으나 차마 남에게 보이기에는 부끄러운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만큼 쌓아온 평판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내들에게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누구도 상스러운 그림을 보기 위해 오래된 오락기 앞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오락기? 우와! 그러고 보니까 우리 동네 문방구에 오락기가 없었어! 그래서 이거 지금 잘 돼? 아까 소리 지르던데.”
“어? 어. 일단 켜니까 나오긴 하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했던가? 한 번 했던 변명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이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내키지 않는 일이나 여섯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거짓말이다. 멈출 수도, 중간에 거짓이었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크흠. 그럼 우린 가볼게.”
“나도.”
“저도요.”
“가시게요?”
이 살얼음판에 나만 남겨두고?
한마음이 되어 서로의 유대감을 확인했던 방금까지의 끈끈했던 우리는 그곳에 없었다. 모두 이리저리 눈을 피하며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도주에서 너무나 불리했다. 저들처럼 도망쳐 봤자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이 문방구였으니까.
성에 갇힌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거나 혹은 자결하거나. 도망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미안.’
가지 말아 달라는 내 무언의 눈빛에 전부 그렇게 답하는 듯했다.
이 난관을 같이 헤쳐갈 동지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둘 차를 타고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버렸기에 결국,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남은 사람은 나밖에 남지 않았다.
“오빠! 이거 어떻게 켜?”
“하게?”
맙소사.
“고쳤다며? 나, 이거 아랫동네 있을 때부터 하고 싶었는데 못 했거든. 그때 두꺼비가 우리 오면 엄청 괴롭혔잖아.”
“맞아. 나도 그래서 거기 잘 못 갔었지.”
아랫동네는 우리처럼 분교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문방구도 그 당시 우리에게는 큰 백화점 못지않은 가게였지만 학생 수가 몇백이 넘는 진짜 학교 앞 문방구는 비교조차 안 되는 위용을 자랑했다.
할아버지께서 너무 비싸 놓지 못했던 오락기가 무려 4대, 뽑기와 불량식품, 그리고 장난감의 종류와 양도 훨씬 많았다.
물론 있을 건 다 있는 할아버지의 문방구를 놔두고 굳이 아랫마을에 가서 장난감이나 과자를 사는 아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오락기는 달랐다.
당시 시내에 있는 오락실은 우리 코흘리개들에게 무법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금품 갈취는 엄청난 중범죄로 다루기에 그런 일이 없지만, 그 시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락실에는 슬며시 다가와 가진 돈을 내놓으라 하는 이른바 양아치가 항상 상주하다시피 했고 아직 중학교도 가지 못한 햇병아리는 그들에게 너무나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오락실에 아는 인맥(?)이 없다면 고스란히 주머니가 털린 채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억울한 사연을 부모님께 이야기해 봤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그런 곳을 갔느냐며 안 그래도 억울한 마당에 2차 피해까지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오픈된 문방구의 오락기는 이런 아이들이 안심하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게임의 개수도 적고 아이들의 취향을 알지 못하는 문방구 주인의 다소 아마추어적인 안목으로 게임을 선정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재미없는 게임을 해야 했지만, 아쉬운 대로 그거라도 감지덕지로 여겼다.
그런데 아랫마을에 사는 두꺼비라는 녀석이 늘 문제였다.
* * *
치이이익.
“있어?”
“없는 것 같은데?”
우리는 만둣집 찜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를 방패 삼아 먼발치의 문방구를 염탐하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에는 행여 떨어뜨릴까 싶어 주머니에도 넣지 못한 백 원짜리 동전이 하나씩 꼭 쥐여 있었다.
“저번에 성환이한테 들었는데 두꺼비 태권도장 다녀서 화요일은 바로 거기로 간다고 했어.”
“그래?”
뜻밖에 기쁜 소식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작전이었기에 섣부른 예단은 금물이지만 구체적으로 소문의 근원지까지 나온 터라 꽤 신빙성 있는 정보였다.
두꺼비가 없다면 아랫동네 아이 중 누구도 우리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비비탄 총싸움을 비롯해 여러 경기로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으나 경기가 끝나면 모두 길에서 만날 때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신사적인 모습을 지켰으니 말이다.
“알겠지? 하고 싶은 게임 한다고 기다리지 말고 빈자리 있으면 얼른 들어가.”
“응!”
게임기는 넷. 우리는 일곱이다. 아랫마을 아이들이 이미 차지한 두 대의 게임기를 제외하면 결국 한 번에 4명이 최대다.
이 인원이 모두 재미있는 게임을 하겠다고 동전을 오락기 위에 올려두고 기다렸다간 두꺼비의 눈에 띌 수 있었다. 얼른 한 판씩 하고 들키기 전에 빠져나오는 것이 우리가 세운 지극히 단순한 작전이었다.
“가자!”
아이들의 뜀박질이 빨라졌다.
드디어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혹시나 두꺼비가 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인 달리기였다.
“난 이거!”
“나도 같이하자!”
망설일 틈이 없었다.
눈대중으로 아무도 앉지 않은 두 오락기 중 마음에 드는 게임이 나오는 오락기를 하나씩 차지한 아이들은 누가 먼저 넣을세라 얼른 동전을 넣고 아래로 떨어지는 괴돌이를 받아먹었다.
달리기가 느려 뒤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친구들이 하는 게임을 잠자코 지켜봤다. 그중에는 유독 키가 작고 달리기에 어울리지 않는 분홍치마를 입은 공주, 설란이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형이 망볼 테니까. 그냥 편하게 구경해.”
“응!”
딴에는 큰 모험을 했다.
오락기라곤 제대로 만져본 적도, 구경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할아버지의 문방구에 모여 매일같이 떠드는 이야기 중에는 아랫동네 오락기가 빠진 적이 없었다.
운이 좋아 사촌들이 왔을 때나 혹은 친척 집에 놀러 갔을 때 삼촌의 손을 잡고 오락실에 갔었던 아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며 게임을 직접 해봤으면 하는 아쉬운 한탄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께 오락기를 사자고 떼도 써봤지만 그렇게 덜컥 살 만한 금액이 아니었다.
나중에, 좀 더 있다가. 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담긴 미안함을 눈치챈 뒤에는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번도 오락기를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을 모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심했다. 대장이라 따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사람이 나였으니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아이들을 데려온 나에게 있었다.
그리고 걱정했던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이었다.
“누가 허락도 없이 여기서 게임 하래?”
혹시나 하는 걱정에 연신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는 내 뒤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 두꺼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태권도복을 입고 흰 띠를 맨 두꺼비와 두꺼비를 따르는 사천왕이 고까운 표정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아이들의 손이 굳었다.
아랫마을 골목대장인 두꺼비는 비슷한 또래였으나 뭘 먹었는지 두 배는 나가 보이는 덩치와 키가 우리보다 한 뼘은 더 컸다. 두꺼비라는 별명답게 심술이 덕지덕지 박힌 얼굴은 덤이었다.
그 생긴 모습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큰 공포일진대 심지어 비슷한 인상의 사천왕 네 명도 데리고 다녔다.
“너희들 문방구 가서 하란 말이야! 여긴 우리 문방구니까! 아~ 너희 문방구 거지라서 오락기도 없지?”
“에에~ 거지래요~”
“거지들은 빨리 일어나! 이제 우리가 할 거니까!”
두꺼비의 말에 사천왕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우리를 놀려댔다.
“잠깐 나랑 저기서 이야기 좀 해.”
나는 두꺼비를 데리고 문방구 뒤편에 있는 작은 공터로 장소를 옮겼다.
“거지 대장이 무슨 할 말이 있으셔?”
“자.”
나는 로봇이 그려진 작은 주머니 지갑에 들어 있던 천 원짜리 지폐를 두꺼비에게 내밀었다.
“이거 줄 테니까 오늘만 우리 애들 오락하게 해줘. 다시는 안 올게.”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떨구었다.
두꺼비에게 돈을 주고 머리를 숙인 것이다.
분한 일이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골목 대장이다. 한 동네를 대표하는.
그런 골목 대장으로서의 자부심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피나는 노력과 배포, 그리고 책임감이 필요했다. 정통성 있는 골목 대장은 그런 아이에게 계승된다. 그 칭호의 무게는 아직 교복도 입지 못한 아이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고통스러웠다.
하나 두꺼비는 아니었다.
그저 또래보다 조금 더 큰 덩치와 부유한 가정의 넉넉한 용돈으로 아이들을 매수했다.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폭군처럼 군림했다.
그런 두꺼비에게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나를 믿고 따라와 난생처음 전자오락을 해보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덥석.
“흥! 오늘만이야!”
빼앗다시피 내 손에서 지폐를 가져간 두꺼비는 그 말만 남긴 채, 의기양양한 기세로 분식집을 향해 걸어갔다.
미니카도,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무엇 하나 나보다 잘하는 게 없는 저 밉상스러운 녀석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다. 자존심을 굽히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거면 된 것이다.
나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콧물을 들이켠 뒤 다시 아이들이 있는 오락기로 돌아왔다.
“형, 두꺼비는?”
“두꺼비가 오늘은 하게 해준대.”
“앗싸!”
“힝… 나는 두꺼비 때문에 얼마 못 하고 죽었는데…….”
“자. 이걸로 해.”
“정말?”
“자, 너희들도 한 판씩 더해.”
나는 울먹이는 아이들의 손에 동전 한 개를 쥐여줬다.
“와! 민호 형 최고! 그런데 민호 형은 게임 안 해? 이거 진짜 재미있어! 2인용으로 같이 하자!”
“형은 오락 많이 해서 이제 재미없어. 너희들 많이 해. 형은 구경할게.”
“응!”
그날 나는 아이들이 하는 오락을 구경하며 문득 은석이 형이 나에게 사줬던 떡꼬치가 생각났었다.
그 비싼 떡꼬치를 사주며 자신은 먹지 않았던 은석이 형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 * *
딸깍.
오락기의 전원이 다시 올라갔다.
“켜줄 테니까 해봐. 그런데 무슨 게임이 깔렸는지 모르겠네. 난 청소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
문득 옛 추억이 떠오른 나는 통할까 싶은 거짓말을 하나 더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