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비장의 카드(1)
삐리리리.
“네,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구단주님, 반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계약하겠다고 합니다!)
“잘됐습니다! 그럼 하시모토 부장이 내일 방문해서 계약서 원본 받아오시고 관련 협의도 부탁드립니다.”
무려 4일이나 걸렸다. 당일 당장 계약을 수락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지금까지 말이 없는 걸 보면 포기하고 다른 업체를 구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전화를 받는 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들릴 정도로 한층 격앙된 것은 당연했다.
(저, 그런데 반스의 회장이 구단주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합니다.)
“저를요?”
계약이 성사된 것은 너무나 다행이다. 사실상 우리 미니카 사업에서 가장 큰 고비가 바로 애니메이션 제작이었다. 제작만 된다면야 방영 일자에 맞춘 출시가 가능했고 그 애니메이션이 홍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실무 협의로 하시모토 부장과 조율을 하면 될 일에 굳이 회장이 직접 나를 보자 하다니? 이는 곧 업무 외적으로 무언가 하려는 말이 있어서다.
불리한 만남.
상대방은 요구할 내용을 알지만 우리는 추측성 예상만 가지고 가야 한다.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갑이나 칼자루는 저쪽이 쥐고 있는 셈이다. 최악의 경우엔 노골적인 리베이트까지 요구할지도 모른다.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일정을 알려주면 맞춰서 가겠다 전해주세요.”
어쩐지 잘 풀린다 했다.
* * *
일본에 다시 온 것은 일주일 만이다.
지난번 악몽(?)이 마지막 일본여행이라 생각했건만 일주일 만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대접이었다.
경비에게 정문에 서 있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해야 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오늘은 공항에서부터 고급 세단을 타고 온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어찌 되었든 좋은 징조다.
아무리 규모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돈을 주고 일을 맡긴 쪽의 대표다. 응당 급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면 상식이 통할 이야기가 오갈 수 있다.
“그런데 굳이 구단주님을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를 바라야겠지요.”
우리를 태운 차는 도심을 지나 어느덧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빡빡한 간판과 콘크리트 빌딩이 아닌 벼가 자라는 탁 트인 시골 풍경은 내가 매일같이 다니던 출퇴근 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끼익.
“도착했습니다.”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분께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린 우리는 정갈한 2층 목조주택 앞에 섰다.
집 앞마당의 정원에는 70, 아니, 어쩌면 80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연못에 무언가를 뿌리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무늬가 들어간 유카타를 입은 노인이 한 평이나 됨직한 연못의 잉어들에게 밥을 주는 모습은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그 장면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나를 이곳에 부른 회장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먼 길을 오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희 쪽의 무례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고개를 숙여 인사치레가 담긴 빈말이 오갔다.
“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또르르, 딱.
연못에 흐르는 물의 무게로 대나무가 바위를 때리는 맑은 소리가 신기했다. 시시오도시라 했던가? 실제로 들어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어쩐지 정겨운 소리다. 불편한 자리에 왔다는 사실도 잠시 있게 해주는.
“저는 MM 프로팀의 구단주를 맡고 있는 김민호입니다.”
“반스의 늙은이, 마지로 준이치입니다. 자, 차가 식기 전에 드시지요.”
여름의 초입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땀이 맺힐 지경이지만 초대받은 입장에서 권하는 음식을 마다할 수 없었다.
호록.
“입에 맞으십니까? 이 늙은이가 텃밭에서 직접 길러 말린 차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올해가 마지막인 듯싶어 남은 차를 다 우려오라 했습니다. 귀한 손님이니까요.”
“정말 깊은 맛이 납니다. 이렇게 귀한 차를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뿔싸. 차가 아니라 독약이다.
노인의 꺼져가는 생명을 대가로 만든 마지막 잎새를 얻어먹은 격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능구렁이가 굳이 이런 부담을 주는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도 그냥 당해줄 순 없다.
탁.
나는 다소 거친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 보지요.”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
“저희가 지급할 비용은 없어도 그만인 돈이 아닙니다. 저희 회사의 사활이 걸린 돈입니다. 다만 총괄이사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해 그리 속였습니다.”
불리한 상황은 어떻게 발버둥 쳐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흐름에 잠시 올라타야 한다. 이미 지고 있는 게임은 1:2나 1:10이나 결과가 같기 때문이다. 악수가 정해져 있는 싸움. 패배할 게임에 미리 그 악수를 털어내는 것이 다음 게임을 도모하는 방법이다.
“그러시군요. 허허. 이 늙은이가 그것도 모르고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부담을 드릴까 싶어 계약 후에도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한 방 먹었습니다그려.”
생애 마지막으로 만든 차와 사활을 건 돈으로 일을 맡긴 회사. 중함을 따지기 어려운 무게다. 악수로 여겼던 패가 카운터펀치가 된 셈이다.
나는 적당히 식은 차를 마저 들이켜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중히 여기지 않을 생각입니다.”
“회사의 미래까지 내다 건 돈을 이리 덜컥 주시고 중히 여기지 않는다니요?”
“그런다고 달라질 결과가 아니니까요. 계약서대로 진행하면 될 일입니다. 저희는 제작비를 지원하고 애니메이션은 반스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허허.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비즈니스다. 그런 동정에 이끌려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완성도가 달라진다면 이렇게 번듯한 회사를 차리기 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마당에 갑자기 회사의 명운이 걸린 상황이니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무리한 요구를 해도 곤란하다는 정중한 거절을 막을 방법 따위는 없다.
“이제 저희는 드리고 싶었던 말을 모두 드렸으니 하실 말씀이 있으면 경청하겠습니다. 회, 회장님!”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좋지 않은 패를 털어내고 다음 게임을 준비하던 찰나, 정자세로 앉아계시던 회장님이 갑자기 공손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셨다.
“이 늙은이가 과한 부탁이 있어 이리 보자 하였습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서 고개를 드시지요.”
“저희 회사 역시 이 애니메이션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책정된 제작비는 이미 세 배를 넘었습니다.”
제작비가 3배를 넘었다고? 어째서?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연세로 손자뻘인 나에게 무릎까지 꿇을 사안이다. 최악은 계약 파기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 놀라운 내용이었다.
“이번에 감독을 맡은 오카타가 이사직을 내려놓고 감독을 맡겠다 했습니다. 자신의 연봉, 부족하다면 모은 재산까지 털어놓겠다 했지요. 저도 회장직을 걸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구단주께서 회사의 사활을 걸었듯 우리 반스도 사활을 걸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네?”
“최소 6개월 혹은 1년 가까이 일정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회장이 손짓하자 곁에 있던 직원이 작은 파일을 하나 내밀었다.
그 파일에는 테두리가 삭아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그림 한 뭉치가 들어있었다.
“그 그림은 우리 반스가 처음 이름을 걸고 만든 ‘오성용사’라는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입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살다 보니 참 많은 것을 얻고 잃었습니다. 얻은 것은 돈 몇 푼이나 잃은 것은 꿈이었습니다. 저는 죽기 전 그 꿈을 다시 한번 이뤄보고 싶습니다. 오카타 감독의 작품으로 말이지요. 그래서 옛 방식대로 제작하려 합니다. 그때 그 시절 직원들을 다시 모아 한 장 한 장 손수 그려 살아 꿈틀거리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 오카타 감독의 꿈이자 제 꿈입니다.”
양자컴퓨터가 나온 세상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큰 지식이 없는 나조차 요즘 나오는 애니메이션 대부분이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손수 그린다니? 그런 고루한 클래식을 고집할 작품성과 명성이 담긴 감독이나 소위 영화라 불리는 작품이 아니다. 성공할 확신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러니 손자뻘 되는 나에게 이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최소 6개월도 그저 듣기 좋으라 하는 소리일 뿐. 1년이 더 걸린다는 말이었다. 1년이면 프로젝트가 엎어지고도 남을 기간이다.
거절해야 한다.
그리해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고 있다. 아직 시작한 일이 아니기에 충분히 되돌릴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하지만 반스도 사활을 걸었다. 고작 애니메이션 하나 엎어진다 한들 회사가 기울겠냐만은 제작비의 3배를 들여 만든 작품이 대중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간판 작품이 많은 회사가 아니다. 기껏해야 1년에 두 작품, 그마저도 다른 회사의 재하청이거나 혹은 지금처럼 완구 판매 목적으로 제작된다. 제작비 지원이나 투자 없이 단독으로 흥행할 만한 IP로 작품을 낼 여력이 없는 곳이다. 그랬기에 다미야에서도 입맛에 맞게 주무르려 계약을 진행했다.
그 때문에 반스 회장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만약 이런 규모가 작은 회사에서 실험적인 작품을 내고 성적이 초라하다면 어느 완구회사나 투자자가 돈 내고 일을 맡기겠는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남의 돈으로 모험을 하겠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지금의 상황이 오기까지 내용이 정리되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
“이렇게 하시죠. 6개월을 더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제작비에서 50%를 더 올려서 다시 계약서를 쓰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시간을 주고 돈을 얻을 수 있듯이 돈을 주면 시간을 살 수 있다.
인력이 필요해 시간을 더 달라 한다면 결국 혼자서 그릴 양을 두 명이 그리면 된다. 그렇게 단순한 계산으로 될 일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이미 과한 양보를 했다. 그 이상은 수용할 수 없다.
필요한 돈을 다시 마련하는 문제가 남았지만 지금 와서 계약을 파기하고 다른 제작사를 찾는다 한들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터였다.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나를 옭아매려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시간을 달라 청했다. 3배의 제작비도 아마 타이트하게 잡은 수치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같은 운명에 묶여버렸다.
“납기 일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한배를 탔군요.”
나는 반스 회장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협상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지출이 발생하지만, 최악의 수는 면했다. 아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우리 팀의 생산 일정 또한 어찌 될지 모르니 말이다.
문제는 6개월 동안 나갈 유지비와 높아진 애니메이션 제작 단가다.
문방구에서 점심을 대접했을 때 들었던 두 회장님의 말씀이 맞았다. 지금부터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야 할 차례다.
* * *
누구도 성공을 기약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협상을 마치고 나온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곧장 전화를 걸었다.
돈이 나올 구멍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 필요한 돈이 을마라고?)
“최소 20억 정도는 더 필요합니다.”
최소한의 비용이다. 12화에 회당 1억씩의 제작비가 추가되고 나머지 8억은 6개월간 딜레이되는 일정에 대한 예상 지출금이었다. 분명 더 필요할 테지만 그 이후는 구단 운용비를 쥐어짜면 어찌어찌 막아낼 금액이었다.
(그래, 필요한 액수 적어서 대현이랑 노나가 보내라.)
“약속된 금액을 넘었습니다. 제 실수로 일어난 문제니 그냥 받지는 않으려 합니다. 대신 물건을 사주셨으면 합니다.”
(뭔 소리고?)
반스의 회장과 감독은 자신의 직함과 재산을 걸었다. 나 또한 그러함이 공평했다.
가진 돈의 전부. 숨겨놨던 마지막 카드를 쓸 차례다.
“제게 삼정공업의 주식이 조금 있습니다. 이걸 사주셨으면 합니다.”
(뭐, 뭐라꼬? 그걸 와 니가 들고 있노? 니 지금 어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