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비장의 카드(2)
“그 청년은 갔는가?”
“네. 곧장 공항으로 떠났습니다.”
“허허.”
“저, 회장님. 저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건지…….”
“저희도 답을 듣고 싶습니다.”
반스의 창립자이자 전신이던 회장님은 지금껏 경영진의 의견을 한 번도 무시하신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허허 웃으시며 그리하라는 말만 하셨기에 사실상 주식만 틀어쥔 이빨 빠진 호랑이가 아니냐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그런 회장님이 독단으로 영업부 총괄이사를 감독으로 앉히고 무리하게 일을 진행한 것도 모자라 오늘은 무릎까지 꿇으신 것이다.
설명이 필요했다. 수긍할 만한 설명이.
“우선 자리를 옮기지.”
지팡이에 의지한 느릿한 걸음으로 경영진들을 데리고 간 곳은 집 바로 옆 창고였다.
너무 낡아 불도 들어오지 않는 낡은 창고에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통로만 빼고 빽빽하게 책상과 의자들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마치 원래부터 회색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화구들이 책상마다 가득했다.
“여기가 우리 반스… 아니, 옛 이름인 구로시의 사무실이네.”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번 들인 사람을 내치는 법이 없었던 회장님의 경영진들은 모두 이곳에서 말단직원을 거쳤으니까.
각자 맡은 업무는 달랐으나 이 작은 창고에 모여 철야를 했던 추억만큼은 같았다.
“모두 눈을 잃은 게야. 그때의 열정과 희망을 담았던 눈들이 여기 쌓인 먼지처럼 탁한 잿빛으로 변했지 뭔가? 그런데 얼마 전 오카타가 찾아왔지. 다시 만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날 오카타는 그때의 눈을 하고 있었네. 우리가 돈이 아닌 꿈을 좇았던 그때의 눈 말이야.”
회장의 말에 저마다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경영진들은 버블경제의 정점을 관통한 세대였다. 일은 많고 일할 사람이 적어 계약이 깨지는 바람에 흑자도산을 걱정하는 시절에 높은 몸값을 마다하고 열정 하나로 이 바닥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하지만 열정은 유한했다.
마른 장작처럼 불타오르다가도 관록이 붙으면 이내 은은한 숯불이 되고 만다. 초심을 잃었다는 말 따위로 치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익숙함과 염증의 어딘가 불편한 사이에서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어, 미나미 상? 우리 전에 같이 일할 때 작화 팀 명단이랑 연락처 아직 있나?”
그 통화 한 통이 시작이었다. 실례가 될까 싶어 입을 가리고 조곤조곤 나누는 통화 내용은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있던 간부들의 귓가에 선명히 박혔다.
의자에 먼지도 개의치 않고 한 자리씩 차지해 앉은 간부들은 저마다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노우에 과장. 잘 지냈나? 다른 게 아니라. 작품 하나를 같이할까 해서.”
“이제 애들 다 자랐지? 집에서 놀고 있으면 다시 복귀하는 건 어때? 아니, 아니. 컴퓨터는 몰라도 돼!”
‘우리는 아직 꿈을 잊은 게 아니었구먼. 허허.’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오카타와 자신, 그리고 같이 늙어버린 노장들의 열정에 다시 한번 불을 지펴준 사람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건너온 젊은 청년일 줄이야.
“그 구단주 이름이 민호라 했던가? 참으로 은인이야. 늙어가는 몸과 마음을 살려주었으니 은인이고 말고. 그나저나 내 펜이 아직 쓸 만한지 모르겠구먼.”
마지로 회장은 혹여나 손이 떨리진 않는지 이리저리 쥐어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 *
“니가 그걸 와 들고 있노? 이야기나 들어보자.”
공항에서 곧장 문방구로 향한 나는 먼저 문을 따고 들어가 방에 앉아 있는 회장님께 인사 대신 질문에 대답을 먼저 해야 했다.
삼정공업은 삼정계열사 지배 구조 가장 위에 있는 지주회사다.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계열사들의 주식 지분율에서 특별한 개편이 없는 한 삼정공업의 대주주가 삼정그룹의 주인이 된다.
아직 후계자도 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두 형제와 막역하게 지내는 내가 그 삼정공업의 주식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회장님께 사뭇 다른 의미로 전달됐을 것이다.
주식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다. 지주회사의 주식이 얼마나 메리트가 없는지 말이다. 당장에 주식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도 인터넷 검색만으로 지주회사 주식은 사는 게 아니라는 게시글을 엄청나게 접할 수 있었다.
자회사의 리스크를 모두 떠안고 있는 주식이다. 게다가 지분율 방어와 세금 문제로 주식 가격이 오르는 행보를 하기 어렵다. 오르기는커녕 내려가지만 않아도 다행인 주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달라 했으니 회장님이 이리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는 것도 당연했다.
“이걸 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나는 장롱 위에 있던 쿠키 박스 속 편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그 옛날 할아버지께서 고 조병기 회장님에게 받은 편지였다.
“이리도가!”
뺏다시피 급하게 편지를 가져간 회장님은 봉투를 열어 편지를 읽어갔다.
길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나 회장님의 손에 들린 편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접힐 수 있었다.
“이게… 이게… 사실이가? 느그 할아버지가 이걸 들고 있었단 말이가?”
“네, 워낙 무던한 분이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따로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이 편지도 제가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왔습니다.”
“얼매나 들고 있노?”
“600주를 조금 넘게 들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우려하실 만큼의 금액이 아닙니다.”
배당금으로 알음알음 더 사 모았으니 21억이 조금 넘는 돈이다.
분명 적은 돈이 아니다. 내 나이에 이 정도 되는 돈을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본다면 그리 많은 돈도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만한 돈이 아니라 그 인생을 지켜줄 만한 돈이다.
불의의 사고, 혹은 큰 병, 아니면 갑자기 잃은 직장.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 두어 개를 막아줄 든든한 버팀목이지 스포츠카와 요트를 타고 수백만 원짜리 샴페인을 마실 돈이 아니다.
그래서 나도 없는 돈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갑자기 들어온 큰 목돈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기뻤으나 이내 마음이 차분해졌다. 무엇보다 내 돈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베풀었던 도움이 큰돈이 되어 돌아온 것뿐이다.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이 가치 있는 돈이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나와 접점이 없는 돈이다.
하다못해 로또라도 당첨되었다면 내가 산 로또가 당첨된 것이다. 비트코인이나 주식을 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종목일 것이다.
그러나 이 돈은 나도 회장님도 알지 못했던 그 옛날 두 사람의 인연이 남긴 흔적이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아 이 돈을 마지막으로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라모 니 할배랑 우리 아버지랑 막역한 사이다 이 말이제?”
“네. 자식의 결혼자금까지 빌려준 사이셨으니까요.”
“끌끌. 인연이 이래 재미있는 기라. 커피 좀 내 온나. 얼음 띠아가.”
“지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수수께끼가 풀린 회장님은 목이 타셨는지 얼음을 넣느라 물 조절에 실패한 묽은 커피믹스를 군말 없이 시원하게 드셨다.
“잠깐만. 카모 니는 이걸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내한테 말 한마디 안 한 기가?”
“철진이와 상진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와?”
“사실 그때는 회장님과 그다지 연을 맺고 싶지 않았습니다. 상무님과의 첫 만남도 그랬고요.”
“뭐라꼬? 이노마가!”
“하핫. 그리고 이 편지는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 고 조병기 회장님의 편지지 저희 편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웃으면서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철진이와 상진이는 몰라도 조동욱 회장님과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뒷조사를 위해 찾아온 상무님도 그렇고 회장님과도 의심으로 점철된 만남이었다.
애니메이션 제작 일정이 틀어지지만 않았다면 영원히 꺼내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편지다.
편지를 빌미로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들먹여 떨어지는 콩고물을 바라지 않았다. 지금 이 편지를 보여드리는 것도 출처를 물으셨기에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지 이만큼 우리가 인연이 깊으니 좀 더 챙겨달라는 바람 따위는 없었다.
“주식은 넣어 놓그라. 그래도 그거 배당금 꽤 댈 낀데. 아깝구로. 20억은 내 그냥 보내주꾸마.”
“안 됩니다.”
“와 안 되노? 그냥 준다카는데?”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선뜻 내주셨겠습니까?”
“…….”
“그래서 받지 못합니다. 주식을 가져가 주시고 그 값만 주셨으면 합니다. 그냥 시장가로 던질까도 했는데 그래도 회장님께서 가장 필요한 사람인 듯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움은 이미 과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가 받은 돈은 회사 빵꾸 난 주머니 매꾸고?”
“없어도 되는 돈입니다.”
“하! 누가 보믄 내보다 더 돈이 많은 줄 알겠고마!”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비록 구단주라는 직책을 맡고 소위 ‘억’ 소리 나는 연봉을 받지만, 평생 이 돈을 다시 모으라 한다면 장담할 수 없었다.
결혼을 포기하고 시골 문방구에 붙은 작고 낡은 방에서 큰 욕심 없이 살고 있다. 치열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구단주를 그만두더라도 무언가 큰돈을 벌만 한 일을 찾아가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도 되는 돈이어야 했다. 원래 용도가 그러했으니까.
“할아버지가 없는 살림에 어려웠던 고 조병기 회장님을 도운 보답으로 받은 돈입니다. 직원들 스무 명이 몸담은 회사를 살리는 데 쓰임은 이 돈의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그렇게 여기는 게 저도 마음이 편하고요.”
“몬난 놈! 어떤 빙시가 준다는 돈을 마다한다드노! 와 아주 자선사업이라도 하지? 이봐라. 그래 살아가 뭐가 남드노? 니 할배 매키로 여 골방에 박히가 궁상맞게 살 끼가! 계열사에 적당한 자리 하나 해줄 끼니까 고마 이번엔 억지 부리지 말고 들어온나. 알긋나!”
과한 역정이시다. 하지만 그 속에 나에 대한 정이 담겨 있음이 느껴졌다.
“식사하셔야죠. 반찬은 별로 없는데 김치찌개 괜찮으실까요?”
어차피 끝나지 않을 논쟁이었다. 인연이 닿은 사람이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내가 잘되길 바라듯, 나도 우리 회사의 직원들이 잘되길 바랐다. 서로 향하는 곳이 다르기에 잡히지 않을 꼬리를 물려 뱅뱅 도는 강아지처럼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었다.
“벌써 가시게요?”
밥을 차리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는 나보다 회장님이 먼저 일어나셨다.
“쉰 소리 듣고 있을라 카이 속이 디비진다. 주식은 내일 따로 재무팀 아들 보낼 테니까 거랑 이야기해라. 간다!”
* * *
문방구에서 나온 조동욱 회장은 박 상무가 열어주는 뒷좌석 문을 닫고 조수석에 앉았다. 무언가 사적인 대화를 할 때 나오는 조동욱 회장의 작은 버릇이었다.
“박 상무야.”
“네, 회장님.”
“만약에 말이다. 내 죽고 없었으면 절마가 주식을 누구한테 들고 갔을 것 같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아도 몰라야 하는 대답이었다. 박 상무는 선을 넘어 의견을 내는 법이 없었다.
“모르기는. 반반 농가주고 사이좋게 지내라 캤겠지. 끌끌. 오늘은 고스톱 칠 기분이 아이네. 그냥 요 근처 백반집에서 김치찌개나 한 그릇 하고 가자.”
꿈같은 소리다.
형제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회사의 주인 자리를 두고 사이좋게 지내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동욱 회장은 눈을 감고 백반집에 도착하는 동안 그 꿈같은 일이 일어나는 상상에 잠시 빠지기로 했다. 상상에는 돈이 들지 않으니.
“참, 맞다. MM 프로팀 지분도 24%는 정리해가 내일 같이 주식값에 묶어 넘기라 캐라. 고마 단물만 빨리고 재미는 없네.”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도착하믄 깨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