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구슬치기(1)
“충전식이 더 간편하지 않을까요? 독자 규격으로 하면 소모품 구매 수익도 기대할 수 있고요.”
“안 됩니다. 무조건 건전지가 들어가야 해요. 튜닝하는 부분에서는 최대한 선택지를 많이 줘야 합니다.”
“그러면 무게 중심을 맞추기가 어렵습니다.”
“그 역시 튜닝으로 극복해야죠.”
열띤 회의는 그야말로 신, 구 세력의 대결이다.
미니카의 유행을 관통했던 세대와 그렇지 못하고 바로 컴퓨터 게임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는 추구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독자 규격으로 개발한 미니카는 어느덧 설계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아니, 사실상 이제 틀을 만들어 찍어낼 오더만 넣으면 당장 다음 달이라도 완성품을 받아볼 정도로 진행되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에 6개월의 시간을 더 번 만큼 만전을 기할 여유가 생겼기에 회의는 미니카의 여러 개선방안이 주제로 자주 올라왔다.
낙장불입.
한번 찍어내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특히 자유로운 튜닝을 메인 컨셉으로 잡은 우리들의 미니카는 한번 호환되는 부품들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 어딘가 부족하고 아쉽다 해서 새로운 버전으로 구조를 확확 바꿀 수 없었다.
물론 나는 이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다. 그래서 지금껏 말석에 앉아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다. 차재훈 부장과 하시모토 부장도 마찬가지, 토론의 자유로움은 상급자가 입을 다무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무리 우리 팀이 수평적인 조직이라지만 직급에서 오는 말의 힘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전지도 영향을 많이 주고 건전지가 들어가면 진동에 의한 접지 부분에서도 튜닝을 할 수 있어요.”
“맞아요. 저희도 대회 때 그 부분을 많이 고심하니까요.”
“흐음…….”
답이 나오면 해설집을 펼쳐 확인하는 과정이 남았다.
우리 팀은 대한민국 미니카 대표선수가 나를 포함해 무려 10명이다. 단순히 작년 성적을 놓고 보더라도 1위부터 5위 사이의 선수가 모두 모인 셈이다.
이들의 의견은 그 어느 경험자보다 신뢰성이 높다.
“자, 얼추 정해진 것 같은데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할까요? 건전지를 넣는 방향으로 해서 샘플 작업을 해달라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직장생활은 의외로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이렇게 빨리 끝내주지 않으면 했던 이야기가 빙빙 돌면서 시간을 잡아먹고 결국 확정된 사안 없이 회의록만 쌓인다. 아쉬운 이야기가 있다면 다음 회의 안건으로 내면 그만이다.
나는 끄적거리던 다이어리를 덮고 얼른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벌써 퇴근하십니까?”
전자담배를 챙겨 따라 나온 차재훈 부장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지금 시간은 11시, 보통 12시 전후로 퇴근을 하는 나에게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아뇨. 오늘은 갈 곳이 있습니다. 출장… 이라고나 할까요?”
“출장이요? 직원 한 명을 붙여드릴까요?”
“아닙니다. 저도 모시고 가야 할 분이 있어서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 입에서 모시고 가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면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차재훈 부장은 내 말뜻을 금방 이해하고 노고에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뭘요. 여하튼 잠시 다녀올 테니 아마 메일은 3시가 넘어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차재훈 부장과 잠깐 대화 후 차에 오른 나는 서류가방을 조수석에 던지고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이제 출발합니다. 네비로는 1시간 정도 걸리네요.”
* * *
끼익.
내 오래된 경차는 삼정그룹 본사 건물 로비에 멈췄다. 양쪽으로 고급 세단들이 즐비한 이 로비에 여기저기 찍힌 자국이 가득한, 그마저도 왼쪽 문짝 두 개는 최근에 교체해 색이 하나도 맞지 않는 경차가 떡하니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 왔나? 이것 좀 치아봐라.”
뒷좌석을 다 치워 놨는데 굳이 조수석에 앉겠다며 문을 여시는 바람에 서류가방은 다시 뒷좌석으로 내던져졌다.
“곧장 병원으로 갈까요?”
“그래, 뭐 짜달시리 병문안이라고 사온 거 없제?”
“아, 있는데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냥 문방구에 있던 거라서요.”
“몸만 오라카이! 글마 그거 돈도 많아서 뭐 선물해줄 필요 없다!”
“그래도 빈손은 좀 그래서요.”
굳이 가진 돈으로 따지자면 그 말을 꺼낸 회장님이 가장 많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회장님은 정말 말씀대로 양손이 허하셨다.
나는 다시 시동을 걸고 로비를 빠져나왔다. 목적지는 이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삼정병원. 우리는 병문안을 가는 길이다.
허리를 다치셨다는 대현그룹의 정진수 회장님의 병문안을 말이다.
“그런데 제가 가도 될까요?”
“와?”
“다치신 것도 극비인데 제가 괜히 가는 건 아닐까 해서요.”
대현그룹은 경영권 승계작업이 진행되는 와중이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회장님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여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민감한 일에 굳이 내가 병문안을 갈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니가 원인 제공자니까 가야지. 끌끌.”
“네?”
“아이다. 카고 이거 아는 놈은 다 입 무거운 아들이니까니 실때없는 걱정하지 마라. 일은 잘되 나가나?”
“순조롭습니다. 일정이 조금 밀린 것 말고는요.”
“물건 파는데 일정 밀리는 것만큼 큰 문제가 어데 있다카드노!”
“하핫. 그러게요.”
“속 편한 소리하고는. 쯧! 그때 보낸 업체들 연락처는 다 돌리봤나? 쓸 만하드나?”
“네. 라인도 다 여유분이 있어서 금방 찍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크흠. 망하모 내 돈도 날리는데 당연하지.”
회장님이 따로 알려주신 공장들은 다름 아닌 지금 내 문방구에 물건이 납품되는 업체들이었다. 이런저런 자잘한 장난감부터 미니카 부품까지 찍어내는 곳들이라 어느 정도 공정이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덕분에 비교적 빠르게 부품을 생산할 업체를 선정할 수 있었고 이는 회장님의 도움이 정말 컸다. 발품을 팔면 얼마나 긴 시간과 인력을 소모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여유는 모두 회장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우리는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여 차 세우고 내리자.”
“안 됩니다. 여긴 직원 전용입니다.”
“답답한 소리 한다, 또! 내가 여 병원 주인인데 직원 주차장 못 쓰는 게 말이 되나!”
“엄밀히 말하면 소속이 다르시지 않습니까?”
“참 내.”
못마땅해하셔도 할 수 없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나는 회장님의 투덜거림을 애써 무시하고 곧장 핸들을 돌려 조금 멀리 있는 고객 전용 주차장에 들어갔다.
“이쪽입니다.”
“니가 글마 있는 병실을 우예 아노?”
두리번거리시며 병실로 향하는 표지판을 찾으시던 회장님은 내 안내에 눈이 동그래지셨다.
“전에 한 번 와봤습니다. 직원이 다쳐서 여기에 입원했었거든요. 도착해서는 물어봐야겠지만요.”
“직원 복지 한번 확실하고마. 특실에 입원을 다 하고.”
우리는 특실의 복도에서 정진수 회장님의 병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 둘이 병실 앞을 지키고 서 있어 누가 보더라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입원해 있는 곳이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눈지 모리나? 병문안 왔다. 문 열어라.”
“실례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을 반쯤 열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던 직원이 정중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안내를 받고 들어온 병실에는 정진수 회장님이 침대에 누워 우리를 반겼다.
“웬일인가. 이리 병문안을 다 오고.”
“왜기는 놀리러 왔지.”
“거참, 말 한번 듣기 좋게 하네. 허허. 구단주도 어서 오게. 자,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앉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회장님 곁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몸은 개안나?”
“조금 삐끗한 건데 앞으로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더구먼.”
“나이가 있는데 무리해서 그런 기라. 끌끌. 니 인자 골프는 다 쳤네.”
“자네가 그 말만 안 했어도!”
“이봐라, 또 내 탓하제? 지가 분해가 휘둘러놓고는. 우째 게이트볼은 치겠나?”
“아, 글쎄, 그건 안 친다니깐. 아직 다 넘기려면 2, 3년은 더 걸리는데 벌써 노인네 소리 들으라고?”
정진수 회장님은 대현그룹을 위기에서 구해낸 장본인이었다. 빚더미 회사를 물려받아 삼정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올린 조동욱 회장님과 비교하면 그 업적이 조금 떨어질지 모르지만, 경영권 다툼에서 걸레짝이 된 회사를 다시 일으킨 놀라운 능력을 내려놓는 것은 지금도 대현그룹의 큰 오너리스크다. 그런데 진짜 지팡이나 짚고 다닐 어르신들이 하는 게이트볼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코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다.
몸이 아파도 숨겨야 하는 처량한 신세는 자식들에게 아픈 다리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내색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어쩐지 많이 닮아 있었다.
“간만에 취미 좀 붙였는데 말이야.”
“다 늙어가 난이나 닦으면 딱 되겠고만, 무슨.”
“억울해서 그러지, 억울해서. 젊을 땐 일에 치여 살다가 이제 좀 놀아보려니 몸이 안 따라주네그려.”
돈이 산처럼 쌓여 있는 회장님들도 지나간 세월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천금을 주고서라도 사고 싶은 게 바로 젊음이라 했다.
“참, 이거 약소하지만,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 가방에서 선물로 가져온 상자를 꺼냈다.
“응? 선물?”
나름 문방구에서 요란하지 않은 포장지를 선별해 포장한 상자가 열리자 안에는 작은 유리구슬이 한 뭉치 들어 있었다.
“유리구슬입니다. 골프만큼 재미있진 않겠지만 나중에 다 나으시면 손주분들이랑 놀아주실 때 쓰실까 싶어서요.”
대현그룹의 아들들은 모두 장가를 일찍 갔다. 이제 막 4~5살의 손주들이 있었고 나름 골프와 비슷한 경기 방식을 가진 구슬치기는 이제 운동을 하지 못하는 정진수 회장님께 괜찮은 선물이라 판단했다. 쾌유를 기원한답시고 비싼 홍삼액 같은 걸 사드려 봤자 내가 사드린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걸 먹고 계실 테니 말이다.
선물은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다. 누군가에게 부담이라면 그 선물은 주지 않으니만 못하다.
싸구려 유리구슬이지만 나는 그 구슬에 마음을 담았다. 받는 사람이 어찌 받아들일지는 이제 그 사람의 몫이다.
“허허. 고맙네. 안 그래도 손주들이 집에 놀러 와서 심심하면 어쩌나 했는데.”
“내는 안 주나?”
“회장님이 다치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저거 얼마 안 하겠고마 두 개 챙기오면 뭐 문방구 망한다드나!”
“아, 사람 심보하고는. 아직 자식들 결혼도 안 했으면서.”
“니도 똑같은기라. 사람이 왔으모 커피라도 한잔 내와야지!”
“거참 누가 보면 없이 사는 사람인 줄 알겠네. 여기 커피 두 잔만 내와 주게.”
“씹을 거리도.”
“어휴, 그래그래. 다과도 좀 내오고.”
우리 둘은 그렇게 나온 커피가 다 비워지고도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비밀로 해야 하는 부상. 손님이라고는 오늘 온 우리가 전부다. 엉덩이가 무겁기를 바랐던 정진수 회장님은 좀처럼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