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05화 (105/151)

#105. 구슬치기(2)

“아이고, 그 상자 다 닳겠어요.”

“흠흠. 애들은 아직인가?”

“아까 출발한다고 했으니 곧 올 거예요.”

“남들이 보면 그 구슬이 무슨 진주알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요.”

작은 상자 가득 담겨 있었으나 손자들과 셋이 나누면 부족하진 않을까 염려되는 개수였다. 예쁜 무늬들을 골라놓고 구슬치기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거실에는 때 이른 양모 카펫이 깔렸다.

그렇게 좀처럼 가지 않는 시간을 탓하면서 몇 번이나 시계를 바라봤는지 잊었을 때쯤.

딩동.

초인종이 울리고 여느 집이 그렇듯 부부는 자식을 맞이하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나왔다.

“퇴원 축하드려요.”

“허허. 고맙다.”

양손으로 받쳐 들지도 못하는 꽃을 엉거주춤 바닥에 내려놓은 정진수 회장은 아들들과 손주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입원 기간이 길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이 나이 먹고 잔병치레 안 하면 그게 사람이더냐?”

“저희가 광고를 안 준 언론사 몇 군데에서 냄새를 맡고 물어보긴 했습니다. 다행히 삼정그룹에서 환자 이름을 다르게 알려줘서 막았다고 합니다.”

“비싼 값을 냈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앉아서 이야기 나누거라. 나는 애들 좀 보련다.”

자식이다.

머리가 굵어지고 아비의 회사를 탐내는 모습에 정이 떨어질 때도 있었으나 그래도 자식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은 몰라보게 장성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금세 짝을 찾아 결혼하고 손주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만나자마자 부모의 몸 걱정이 아닌 회사에 미칠 영향부터 우려하는 모습을 막상 눈앞에서 보니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잘못 키웠다면 잘못 키운 게지.’

핏줄이 그러했고 처지가 그러했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시대. 정진수 회장은 차라리 이렇게라도 먹고살 걱정 없이 아비의 회사만 바라는 것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아직 찌뿌둥한 허리에 한쪽 손을 대고 아이들이 있는 거실로 나온 정진수 회장은 스마트폰으로 게임 삼매경에 빠진 손자들에게 멋쩍은 듯 다가갔다.

“재미있더냐?”

“네.”

“이 할애비랑 더 재미있는 거 해볼까? 구슬치기라고 들어봤느냐?”

짤그락.

민호가 준 상자를 흔들며 답지 않게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정진수 회장은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폰게임 할래요.”

“저도요.”

“얘들아! 할아버지랑 같이 구슬치기 해야지?”

당황한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집에서는 공부하느라 게임도 못 한단 말이에요!”

“어멈아, 괜찮다. 그냥 두거라. 요즘 애들은 이런 거 안 좋아하나 보지. 나는 서재에 가 있으련다.”

정진수 회장은 서재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너희들 제정신이야? 할아버지가 심기 불편하시면 어쩌려고 그래! 조금 있다 나오시면 죄송하다고 그래! 알겠어?”

‘한밑천 남겨두길 잘했는지 모르겠군.’

늙은이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부모 대접 못 받는다는 말을 듣고 조금 남겨둔 지분이 행여나 다른 곳으로 갈까 전전긍긍하는 며느리의 말이 서재의 두꺼운 문을 뚫고 들어왔다.

이 넓은 집에 피붙이가 전부 모였건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데구루루.

책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굴리는 유리구슬에는 그 씁쓸함이 담겼다.

“구단주가 헛수고했구먼.”

딴에는 손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며 챙겨준 선물이다. 기껏해야 오천 원이나 할까? 어쩌면 포장지값이 더 들지도 몰랐을 잡동사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고마웠다.

자식들이 쾌차를 기원한답시고 사 온 녹용이나 산삼에는 어디 자기들 노력이 담겼던가? 비서를 시켜 ‘툭’ 하고 카드 한 장을 던졌음이 분명하다.

고심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 유리구슬에 비하면 없느니만 못한 것들이다.

구슬치기를 몰라 직접 구단주에게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것저것 배웠건만 그것도 다 소용이 없어졌다.

고풍스러운 책상 위를 구르는 구슬은 아버지의 병문안을 왔다는 티를 충분히 낸 자식들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 동안 멈추지 않았다.

* * *

“야! 이 중독자들아, 그만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다 큰 어른들에게 잔소리할 생각은 없었으나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처음에는 나름의 로테이션이 있었다.

이따금 비비탄 총으로 과녁을 맞히기도 하고 미니카를 꺼내 이런저런 튜닝도 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오락기에 집중되는 녀석들의 용돈 소비는 지금껏 극단적인 패턴을 보여주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린 시절 그 브레이크는 등짝을 노리는 어머니의 손바닥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그 손바닥이 되어야 했다.

녀석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린 시절 100원은 정말 소중했다. 하루 용돈은 많아야 100원, 중학교에 들어가야 300~500원을 받았다. 이 돈을 오락기에 넣고 써버리는 행동은 실로 허무하기 짝이 없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정말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아니면 그냥 뒤에서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무리 요즘 물가 대비 천 원이 돈도 아니라지만 아직 그 시절 물가를 반영하고 있는 우리 문방구에서는 하루 10판의 오락은 의외로 합리적인 소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젠 어느 정도 제재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강압이 아닌 자율적인 제재다.

“이것 좀 봐.”

“뭐? 구슬이잖아?”

“구슬치기 하게요?”

“어. 사실은 말이야. 이걸 대현그룹 회장님께 선물로 드렸어.”

“뭐라고?”

“왜요?”

“그걸 왜 줬스므니까?”

사람들은 더 이상 질 좋고 값싼 제품을 사지 않는다. 조금 불편하고 비싸더라도 감성이 담긴 물건을 원한다. 이 유리구슬은 녀석들의 간택을 받지 못한 비운의 라인업 중 하나다. 영롱한 빛을 띄고 있어 두어 번 만지작거리는 걸 봤지만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대현그룹 회장님이 받아 간 유리구슬.

타이틀만 보더라도 도저히 궁금해서 질문을 안 하고는 못 배길 내용이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중요한 순간은 지금부터다.

나는 정진수 회장님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말만 쏙 빼놓고 최대한 자세하게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정말 구슬치기를 공부해 가셨다고?”

“형이 그런 거짓말을 왜 해. 진짜라니까.”

“이게 그렇게 재미있나?”

낙승.

이번 약팔이도 훌륭한 성과를 내는 중이다. 철진이의 호기심에 들면 대부분 높은 확률로 대중(?)의 선택을 받게 된다. 이는 철진이의 동물적인 감각에 기인한 방법인데 나나 다른 아이들도 특히 음식을 고를 때는 이른바 철진이픽을 철저히 따르는 편이었다.

“10알에 500원.”

조금 비싼 편이다. 인터넷 최저가는 100알에 3천 원짜리도 있으니. 하지만 퀄리티가 달랐다. 일반적인 유리구슬은 단조로운 물결무늬가 있는 데 반해, 내가 납품받은 구슬들은 물결무늬는 물론 왕구슬과 별무늬 등등 다채로운 종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표면도 매끄럽고 깨진 구석 없는 상등품이다.

물론 매출을 올리자고 파는 게 아니다.

견물생심.

막상 그렇게 유리구슬을 선물해 드리고 나니 나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딱지치기와 더불어 무언가를 걸고 하는 유사 도박으로는 쌍두마차를 달리던 놀이였으니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나도 옛 추억에 잠겨 구슬치기를 해보려면 결국, 이 세 녀석을 구슬려야 했다.

“다 골랐지?”

유리구슬로는 비싸지만, 또 용돈에 비하면 한 뭉치를 사는 데 그리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었기에 우리 넷은 구슬 한 뭉치씩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밖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더운데.”

“어쭈. 오락기는 안 더웠나 봐?”

“아, 그건 그래도 한 판하고 방에 들어와서 에어컨 바람 쐬면 되니까 참을 만했지.”

“걱정 마. 거긴 그늘이라 여름에도 시원해.”

“어딘데 그래요?”

나는 손가락으로 학교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철진이 너 아직 열쇠 가지고 있지?”

“어. 차에 있지.”

구슬도 산 마당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크르르르르.

자물쇠를 풀고 분교의 낡은 정문이 오랜만에 열린다.

“따라와.”

나는 아이들을 운동장 옆 커다란 나무 밑으로 안내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학교 건물과 운동장 사잇길에 있는 통로다. 학교 건물 반대쪽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어 좁은 통로를 따라 사시사철 시원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이다.

무더운 날씨에도 밖에서 놀고 싶었던 아이들이 찾아낸 나름의 핫플레이스인 셈이다. 남자아이들은 당연히 구슬치기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학교 건물을 벽 삼아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를 했다.

“어때? 시원하지?”

“진짜네요.”

곧 7월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가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가는 와중에 이 나무 그늘 아래만큼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문제는 여긴데…….”

“그냥 바닥에서 치면 되는 거 아니야?”

“어허! 구슬치기는 땅이 생명이야.”

콘크리트 바닥에서 구슬치기를 했다간 하루도 못 가 구슬이 죄다 깨지고 만다. 무조건 강하게 치면 되는 그런 저급한 경기로는 구슬치기의 오묘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고 말이다.

구슬치기는 자고로 고운 흙바닥이 중요했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경기장은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이끼와 잡풀이 가득했고 여기저기 물줄기가 흐른 작은 홈들이 나 있었다.

슥슥.

역시나다. 바닥의 흙을 조금 걷어내니 안쪽에 단단한 지면이 나왔다.

학교가 세워진 이래로 하루가 멀다고 아이들이 놀았던 곳이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아이들이 가꿨던 경기장은 형체를 쉽게 잃어버리지 않았다.

“여기 겉에만 좀 걷어내자. 이렇게 단단한 땅이 나올 때까지만 걷어내면 돼.”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네 명이 나눠서 풀들이 얽히고설킨 표면을 뽑아내니 마치 커다란 장판을 들어낸 것처럼, 속살이 깔끔하게 나타났다.

“룰은 간단해. 저기 홈들 보이지? 차례대로 치면서 저 홈들을 다 들어갔다가 나오는 거야.”

“골프네요?”

“맞아.”

구슬치기는 여러 스포츠의 기원이라 불렸다. 당구와 컬링 등 발전된 스포츠의 기원을 따지고 가자면 이 구슬치기가 있다.

동그란 구슬로 할 수 있는 놀이는 그만큼 다양하다.

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구슬을 쳐내는 데스매치와 이 모든 놀이를 생략하고 철저하게 도박성만 추구하는 구슬 짤짤이도 있었다.

그러나 단연 가장 인기가 많았으며 손에 땀을 쥐는 경기가 펼쳐지는 방식은 이 홈에 순서대로 구슬을 넣는 방식이었다.

용어도 따로 지칭하지 않았다. 구슬치기는 으레 그 룰을 뜻했으니까.

홈은 9개.

“시작해볼까? 지면 알지?”

“빠빠우이므니다.”

무더운 초여름, 우리들의 내기는 빠빠우가 공식 상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추억 속으로 들어왔다. 흙바닥에 양복바지가 모두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삐리리리.

“잠깐만. 네.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아, 구단주, 잘 있었나?)

“네, 회장님.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나야 뭐 이제 멀쩡하지. 아, 다른 게 아니고 말이야. 그 구슬 말인데…….)

“네?”

나는 뒤이어 들리는 정진수 회장님의 말뜻을 이해하느라 몇 번이나 되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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