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09화 (109/151)

#109. 천렵(1)

구슬치기는 삼일천하로 끝이 났다.

분명 재미로는 다른 장난감에 비해 그리 떨어지지 않았으나 문제는 더워도 너무 더워진 날씨다.

아무리 학교 건물 옆 구슬치기 경기장이 시원하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땡볕에 비해서 시원하다는 뜻이지 밖에서 종일 놀아도 될 만한 곳은 아니었다.

그 시절이야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전기세가 아깝다며 자주 틀지 못하고 등목으로 더위를 달랬다. 상대적으로 그만큼 시원한 곳을 찾기도 어려웠고 분명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은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우리는 에어컨 바람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다.

문방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기 싫고 그렇다고 방 안에서 무언가 하자니 남자 넷이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 몸을 부대끼는 터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가만히 앉아 비디오를 보는 것뿐이었다.

“형, 이거 다음 편 없어요?”

“없어. 비디오판매점에 물어봤는데 자기들도 못 구했대.”

멍하니 비디오를 보다가 다음 편을 자연스럽게 찾는 상진이의 곁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간 우리가 얼마나 무기력하게 지냈는지 잘 나타내는 모습이다.

물론 이렇게 작은 브라운관 티비로 옛날 비디오를 보는 맛은 생각보다 중독성이 강해서 지금껏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감상했지만 결국 마지막 편도 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다시 1편부터 한 번 더 볼까?”

“야, 뭘 더 봐. 으아! 몸이 다 찌뿌둥하네.”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이나 비디오를 봤더니 스트레칭 한 번에 몸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답답해서 안 되겠다. 나가자.”

“어디 가므니까? 날도 더워 죽겠는데.”

“맞아. 지금 나가면 쪄 죽어.”

“여름이잖아. 물놀이 가야지.”

“바다요?”

“바다 좋다! 해운대 갈까?”

“해운대는 너무 멀지않스므니까. 인천도 좋스미니다.”

내가 물놀이를 가자는 말에 다들 바다를 떠올렸나 보다. 하지만 모두 정답이 아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난 창고에서 뭐 좀 꺼내올 테니까. 너희들은 내 차 트렁크에 장작 좀 넣어줘. 에어컨도 좀 틀어 놓고.”

나는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창고로 들어왔다. 지난번 미니카 트랙을 꺼내면서 얼추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파악해 놓은 상태다.

“분명 이쯤 있었는데…….”

창문도 하나 없는 창고는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해 스마트폰의 플래시에 의존하지 않으면 쌓여 있는 박스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먼지 쌓인 박스를 두어 개 덜어내자 드디어 원하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태도 좋다. 조금 먼지가 쌓이긴 했어도 그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어디 한 군데 구멍 난 곳이 없다.

“준비 다 됐지?”

“형, 그건 뭐예요?”

“그물이랑 통발. 여름이잖아. 요 앞 냇가에 가서 천렵하자.”

천렵. 말 그대로 물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논다는 뜻이다.

7월의 무더운 여름은 아이들에게도 큰 제약이 따랐다. 학교 운동장의 미끄럼틀, 철봉에 살이라도 닿았다가는 비밀기지를 불 정도로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축구, 농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데다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놀이는 달리기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기껏해야 그늘이나 시원한 건물 벽에 기대 쮸쮸바나 사 먹는 게 전부였다.

이런 날씨에 천렵은 그야말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종의 피난과도 같았다.

이른 아침에 갔다가 시원한 물에서 마음껏 놀고 고소한 은어구이까지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냇가는 상류로 갈수록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어른들도 곧잘 가는 곳이기에 굳이 고기를 잡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 시절은 모르는 아이들이라도 배가 고프다 하면 잡은 물고기와 음식을 나눠주는 게 당연했으니까.

나는 트렁크에 그물과 통발을 싣고 운전석에 올랐다.

“요 앞인데 더우니까 차 타고 가자. 잠깐,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 임시휴업 붙였어?”

“아! 깜빡했어!”

“야 씨, 빨리 갔다 와.”

내 다그침에 철진이는 다시 문방구로 들어가 달력 뒷면에 급하게 적은 임시휴업 간판을 붙였다.

“이거 꼭 붙여야 해?”

“그래도 간간이 손님 오잖아. 저번처럼 기다리시면 어떡해.”

오락기와 평상에 미니카 트랙을 그대로 놔두고 자리를 비우면 의외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인다.

내가 오후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문방구에 계속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제법 되기에 가뭄에 콩 나듯 손님도 드문드문 오는 편이다. MM 프로팀 직원이나 잠시 마을에 들른 어르신들의 가족이 이따금 추억의 장난감을 한 아름 사가게 되는데 이게 제법 매출이 되고 있었다.

지난번 구슬치기 때 손님이 왔다가 그냥 가셨는지 오락기에 백 원짜리 몇 개가 들어 있던 걸 발견한 뒤부터는 자리를 비울 때 꼭 이 임시휴업 간판을 붙인다.

어찌 되었든 영업시간에 농땡이를 피우는 셈이니까. 저 임시휴업 간판을 붙이면 죄책감이 조금 줄어든다.

“자, 이제 가자.”

나는 너튜브로 즐겨듣던 노래를 틀고 핸들을 잡았다.

(와! 여름이다! 따다단 단단~)

“형…….”

“뭐, 왜?”

“검색해 보니 이 노래 우리 4살 때 나왔스므니다….”

“어허! 명곡은 세월을 가리지 않아!”

우리는 떠난다. 무더운 여름을 이겨낼 시원한 냇가로.

* * *

(부회장님, 정현석 이사님 오셨습니다.)

“이사님이 아니라 그냥 이사. 압존법 몰라?”

(죄송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운데 가장 짜증 나는 사람에게 존칭까지 붙여서 안내하는 바람에 괜히 비서에게 괜히 불똥이 튀었다. 그러나 비서는 자주 있던 일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죄송하다는 짧은 사과를 끝으로 다시 손님의 거취를 물었다.

“들여보내.”

탁.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고 담배를 물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그냥 가는 길에 들렀지.”

문을 열고 들어온 정현석 이사라 불린 남자는 깡마르고 볼품없이 작은 키의 중년이었다. 체구는 왜소했으나 그 눈매만큼은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100㎏이 넘어가는 자신과 도저히 같은 배에서 난 형제라고는 볼 수 없는 외형이다.

“공사다망하다는 놈이 갑자기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오셨나 그래?”

지나가는 길에 그냥 들를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지 않음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뱀 같은 새끼. 냄새가 났나 보네.’

남자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세 형제 중 가장 뒤가 구린 짓을 많이 하는 놈이다. 아버지께는 세상 다시없을 효자 노릇을 하는 척하다 승계 구도에서 밀리자 본성을 드러내고 외국 자본까지 끌어들이려던 놈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을 찾아올 리가 없었다.

“저번 주말에 아버지한테 애들 보냈잖아.”

“그래. 노인네 나이가 들어서 옹졸해진 건지 병문안 갔을 때 애들 좀 뻗댔기로서니 그걸 다시 부르고 말이야. 후.”

남자는 의도적으로 담배 연기를 동생에 앞으로 뱉었다. 그러나 동생은 개의치 않은 듯 더 가까이 다가와 정인성 부회장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나전칠기 명패를 밀치고 엉덩이를 걸쳤다.

“그냥 그것 때문에 애들을 불렀을까?”

“뭔 소리야?”

“생각해 봐. 아버지가 애들을 따로 부른 적이 있었는지.”

없었다. 굳이 자식들을 다 부르지 않고 손자들만 부른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지 그제야 의문이 풀린 정인성은 말없이 동생을 바라봤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는 뜻이다.

“내가 서준이한테 스마트워치를 끼워놨거든. 위치 추적으로 알아보니까 어디로 갔는지 딱 나오더라고.”

“어딘데?”

“맨입으로?”

“지랄하지 말고 빨리 말해. 나 바쁘니까.”

“여기야.”

폰 화면에 떠 있는 지도는 조카의 얼굴이 박힌 아이콘이 이곳저곳 어지럽게 발자국을 찍어놓았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문 곳이 눈에 띄었다.

“민호 문방구?”

“여기 웃기는 곳이야. 아니, 그냥 시골 문방구인데 사장이 좀 특이해. 아버지가 투자한 그 장난감 자동차팀 있지?”

“그래, MM이던가? 이번에 완구사업도 한다고 우리 돈 다 긁어갔다.”

“거기 구단주가 이 문방구 사장이야.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아버지가 그깟 장난감 팀 구단주한테 손자들을 데리고 갔는지 말이야.”

“뭐 애들 장난감 사주고 점수 좀 따려고 했나 보지. 애들 할아버지 만나러 간 것까지 일일이 뒷조사하면 인생 피곤하겠네.”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 여겼다. 오히려 그까짓 문방구에 아버지가 애들을 데려간 것보다 그 사실을 음침하게 위치 추적을 해서 알아본 동생의 성격이 더 꺼림칙하게 다가왔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난 신경 쓰여서 조금 파볼 생각이거든.”

“그래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이야기 끝났지?”

축객령.

더 들을 필요도 없는 하찮은 헛소리다. 남자는 고개를 돌리고 손을 휘휘 저어 어서 나가라 명령했다.

“아직 아버지 주식 남은 거 알지? 잘 생각해 봐. 그거 우리 애들한테 가면 최대 주주가 바뀔 수도 있어. 지금 다른 주주들 구워삶아 봤자 다 아버지 회사 일으킬 때부터 도왔던 개국 공신들이라 씨알도 안 먹히잖아. 그래서 형도 아직 부회장실에 있는 거고.”

“너 이 새끼 지금 말 다 했어?”

분을 못 이긴 남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자 동생은 뒤돌아서 경망스럽게 손을 흔들고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개 같은 새끼.”

남자는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손자들을 시험하는 거라고?’

동생이 던지고 간 의문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쯤은 모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의 눈에는 세 형제가 모두 눈에 들지 않았고 분란의 소지가 적은 장자 승계로 자신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놈 말대로 손자들한테 주식이 가면 후계 구도가 달라진다.’

사상누각.

겉으로는 무난한 승계 작업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나 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손바닥 뒤집듯 차기 총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뿐이랴? 아버지를 지지하는 대주주들의 지분만 합쳐도 무시 못 할 세력이 된다. 가장 많은 주식을 받았다 해서 끝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두 동생이 아버지의 말에 벌벌 기면서 비위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동생의 말을 그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그 후폭풍이 너무 컸다.

아버지는 아직 젊으셨다. 나이가 있다고는 하나 그 정정함으로 아직 15년, 20년은 거뜬히 살아 계실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식을 건너뛰고 장성한 손자에게 경영권이 넘어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만약 마음에 드는 손자가 있다면 말이다.

‘그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뱀 같은 둘째 놈은 여기저기 들쑤시며 정보를 캐고 있을 테니.

남자는 전화기를 들었다.

(네, 부회장님. 수행팀 장설우 과장입니다.)

“그래, 장 과장. 내가 좀 알아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대외비입니까?)

“문서도 남기지 마.”

(알겠습니다. 작업은 지금 바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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