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11화 (111/151)

#111.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1)

“대현그룹 수행팀에서 민호 군에게 접근한 것 같습니다.”

“글마들이 문방구를 왜? 그카고 전에 정 회장 부탁으로 눈이랑 귀는 다 떼지 않았나?”

조동욱 회장은 생각지도 못한 보고를 받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현그룹 수행팀이라면 뒤가 구린 일을 도맡아 하는 부서다. 물론 박 상무가 있는 삼정그룹의 비서실보다야 그 능력이 한참 떨어지지만 들러붙으면 제법 귀찮은 일로 번지기 일쑤였다. 그런 곳에서 난데없이 민호에게 접근했다 하니 심기가 불편해진 것에, 지시를 어기고 아직 대현그룹을 감시하고 있던 박 상무에 대한 언짢음이 더해졌다.

“감청은 따로 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서실에 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지들이 알아서 그런 정보를 유출시킸다고?”

“여기 있습니다.”

「대현그룹 수행팀이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의 감시를 지시받음.」

프린트 된 이메일은 제목도 없이 짤막한 한 줄이 전부였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리나? 정 회장이 그럴 양반은 아닐끼고.”

“수행팀 내부 소행인지 아니면 지시한 쪽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제보가 사실이고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이면 정인성 부회장과 그 형제들이 삐거덕거리면서 흘러나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글마들 장남이 다 가져가기로 했는데 뭔 뒷말이 그래 많이 나오노. 남일 같지가 않다카이. 쯧.”

친구처럼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나 나이는 정진수 회장이 10살 가까이 더 많았다. 지기 싫어하는 성정 탓에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고마 말 편하게 하면 되겠고마.’라고 멋대로 말을 놨고 자신과 비슷하게 겉늙은 외모에 정진수 회장이 흔쾌히 허락한 결과였다. 두 사람이 태어난 시대는 워낙 아이들이 빨리 죽어 출생신고를 늦추다 보니 실제 나이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1, 2위 기업의 주인들이다. 그릇에 담긴 밥은 한정적이고 계열사들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살벌한 경쟁을 이어가는 중이다.

애증의 관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는 당장에 목에 칼을 겨누고 밥그릇을 노리는 라이벌이었다.

그런 친구의 자식들이 구린 짓을 꾸미는 게 조동욱 회장은 못마땅하면서도 서글펐다. 돈 앞에서 장사가 어디 있던가? 부모 형제도 서로 칼을 겨누고 등에 비수를 꽂는다.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십수 년 전 정진수 회장이 떠올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거 뭐 집안 사정에 귀띔도 못 하고 답답한기라.”

“민호 군이 걱정되진 않으십니까?”

“하! 글마가 와? 니 저번에 그래 당해놓고도 문방구가 걱정되드나?”

박 상무의 질문에 조동욱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알려주는 편이 나중에 대처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고마 입 다물고 있어라. 글마 꼬리가 아홉 개다, 아홉 개. 구미호다, 이 말이다. 지금 니가 말해주뿌모 싸잡아 물라 칼끼라. 니 글마가 와 그 장난감 사업 하는지 아나?”

“관련 업종이라 경쟁력이 있다 판단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데. 돈 벌라카믄 진작 딴 거 찾아서 했지 만다꼬 그 돈 많이 드는 거 하겠노. 글마가 용서가 안 되는 기라. 즈그 아들 직장이 걸린 경주에서 그래 재를 뿌리노니까 말이다.”

조동욱 회장이 지켜본 민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가 평생 모아도 못 만질 큰돈을 미련 없이 던질 정도로 욕심이 없으면서 자신의 사람이 다치는 꼴은 보지 못했다. 아니, 자비가 없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본인은 깨닫지 못하는 듯했지만, 알토란 같은 사업들을 제쳐두고 굳이 수익성도 낮고 안정성이 떨어지는 완구제작사업에, 그것도 미니카를 만들겠다 하는 이유는 그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제? 세상천지에 친구 밥그릇 쪼매 건드맀다고 니 밥그릇 다 내놔라카는 날강도가 글마 말고 또 있겠드나? 끌끌. 고마 모른 척하고 지키 보자. 나서모 내나 주 회장이나 서로 면만 상해뿐다.”

“네. 알겠습니다.”

“그라고 가 너무 보듬어주믄 난중에 지 앞가림 몬 한다! 니 와 웃노?”

“아닙니다. 두 자제분께 하던 말씀을 그대로 하셔서요.”

“크흠.”

두 형제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민호에게도 그대로 하는 회장님의 모습에 박 상무가 살포시 웃음을 짓자 조동욱 회장은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그나저나 큰일로 번지믄 안 될 낀데. 쯧.”

이 일로 되려 걱정되는 쪽은 대현그룹이었다. 감시를 왜 붙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머리가 비상하기 짝이 없는 문방구가 알아차린 뒤에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는 자신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기에.

***

큰일이다. 지금 내가 들은 통화 내용이 사실이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네? 그게 무슨……? 아니, 그냥 화상회의를 하셔도… 알겠습니다.”

“누군데 그리 난감해하십니까?”

“반즈의 마사키 감독입니다. 대략적인 콘티가 완성됐답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그럼 좋은 일 아닙니까?”

한국어 발음이 조금 어눌한 통역사를 통해 들은 소식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콘티의 내용이 문제였다.

“그… 제 이야기를 콘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네? 구단주님 이야기를요?”

차마 내 입으로 꺼내기도 민망한 말이다. 내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겠다니!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유추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계약이 성사되고 화상회의로 스케줄을 협의 중에 확인할 내용이 조금 늦게 나와 잠깐의 틈이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시간을 채우려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고 그때 마사키 감독이 내가 미니카대회에 나오게 된 계기를 물어봤었다. 당시에도 그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웠는지 꽤 질문이 많았었다.

“일을 저지르고 보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하하…….”

나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오랜만에 다시 펜을 잡고 의욕 넘치는 감독으로 돌아온 것이 화근인 듯했다. 앞뒤 순서가 없는 일 처리는 전형적인 외골수 예술가다.

콘티라 함은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고 그림의 구성까지 나온 결과물이다. 그 완성도나 속도까지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문외한인 내가 알지 못하지만 분명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상황까지 이미 진행된 상황이다.

“그럼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끄덕끄덕.

나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황당한 일을 겪어 화를 낼 타이밍도 놓쳐버렸다.

“그리고 지금 한국으로 넘어올 비행기를 타기 전이랍니다. 이리 급하게 오는 걸 보면 그쪽도 저질러 놓고 보니 아차 싶었나 봅니다.”

허락은 어려우나 용서는 쉽다. 지름신이 온 유부남들이 장바구니의 결제창에서 외우던 기도문이 나에게 통용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화를 낼 수 없는 처지다. 내 입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개입하지 않겠다 했으니…….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지금 당장 콘티를 가지고 한국에 가겠으니 봐달라 청했다.

“지금 비행기를 타기 전이면 두세 시간 뒤에 도착하겠군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통역사분도 같이 오신답니다. 마침 하시모토 부장도 출장 중이라 그러라 했습니다. 그럼 수고 좀 해주세요.”

우리 팀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이 나다. 오전만 일하고 횡 가버리는 지극히 게으른 근태를 지키고 있으니 응당 내가 마중을 가는 게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멀리서 온 손님에게 작은 경차를 직접 몰고 가 모셔오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았다. 나 또한 일본에 갔을 때 그리 대접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나마 의전용이라 부를 만한 차는 차재훈 부장의 세단이었다.

우리 팀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듯이 큰 차에는 큰 업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

급작스러운 콘티의 완성과 그 콘티를 완성한 마사키 감독의 방문. 모두 반가운 소식이다. 다소 지연되었던 일정을 조금이라도 당길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단 한 달이라도 제품 출시를 앞당길 수 있다면 수억 단위의 비용이 절약되기에 우리는 일정을 조율하는 데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협력 업체들과 정신없이 통화를 주고받는 와중에 드디어 기다렸던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례인 줄 알았으면 하면 안 되지!

나는 목젖까지 올라온 불만을 삼키고 애써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결례라니요. 당찮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죠,”

저번 일본 방문에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다. 계절이 변하긴 했으나 그때도 무더운 늦봄이었으니. 그러나 다시 만난 마사키 감독은 처음 만났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얼마나 강행군을 했는지 눈 밑은 다크써클이 선명했고 마르다 못해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다.

웃돈을 얻어 제작 기간을 줄여달라 했지만 그렇게 줄어드는 공수는 본격적으로 원화 작업이 들어갈 때 이야기다. 이렇게 시나리오와 콘티를 다듬는 초반 공정은 감독을 비롯한 소수 인력의 몫이겠지.

일정에 쫓겨 이런 몰골이 된 사람은 지겹도록 보아왔다. 다름 아닌 졸음을 깨려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를 하며 봤던 예전 직장의 내 얼굴이었으니까.

“피곤하실 테니 서로 사족은 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회의실은 이쪽입니다.”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잠들 것 같은 마사키 감독에게는 짧은 회의가 가장 큰 선물이리라. 예의상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답했어야 할 통역사의 입에서는 넙죽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본심이 솔직하게 나올 정도로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는 뜻이다.

통역사를 통해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니 시간은 단순한 계산으로도 두 배다.

“아, 파일로 따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마사키 감독의 낡은 서류가방 속에서 플레시메모리 대신 두꺼운 에이포용지 뭉치가 나왔다. 얼마나 넘기고 얼마나 넘기고 수정했는지 용지는 휘갈긴 글씨와 덧붙인 그림에 이미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자리 배치를 다시 해야겠군요.”

직원 스무 명이 앉아 있는 회의실 의자는 아무리 당겨도 작은 에이포용지의 내용을 다 같이 볼 위치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구연동화를 들려주는 선생님 앞 유치원생처럼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주인공의 이름은 민수입니다. 32살로 블랙기업에 다니던 와중에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으로…….”

콘티를 한 장씩 넘기며 설명을 이어가는 마사키 감독과 된소리가 잘 안 되는 통역사의 말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 콘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애니메이션 콘티의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는 당연히 아니다.

“이거 구단주님 이야기 아니야? 아무리 봐도 구단주님이 주인공 같은데?”

“쉿!”

아무리 자기들끼리 귀에 속삭여도 다 들린다. 어깨가 다닥다닥 붙을 만큼 가깝게 모여 앉아 있으니 말이다.

귀가 빨개질 정도로 낯부끄러운 상황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창피하고 민망했던 날이 또 있었을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