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황혼의 듀얼리스트(5)
아이들은 나만의 고유성을 좋아한다.
온전한 내 것이라는 원초적인 소유욕을 자극하고 남들과 다르다는 개성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것들에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나만의 미니카, 나만의 딱지, 나만의 총이 그러했다.
우희왕은 이런 개성을 극상으로 끌어올린 실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게임이다.
한 손에 가득 쥔 무수한 카드들. 그 안에는 만화영화에서 주인공과 활약했던 카드가 그대로 담긴다. 게다가 부족한 용돈을 쪼개 어렵게 한 묶음을 사면 그 안에 무슨 카드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기에 기대감은 끝없이 올라가게 된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잘 찢기지 않는 봉지를 입으로 물어뜯다시피 열어 확인하는 그 짧은 순간에 갈리는 희비도 끊을 수 없는 중독처럼 아이들을 홀린다.
좋은 카드가 나오면 뛸 듯이 기쁘고 설사 이미 가지고 있는 카드나 그리 좋지 않은 카드가 나오더라도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500원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구매를 포기할 정도로 비싼 가격은 아니었으니까.
카드가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구성되면 다음은 듀얼이다.
경쟁을 기본으로 하는 놀이.
내가 조합한 카드, 속칭 덱으로 상대방을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하는 덱은 아무리 내가 열심히 구상해서 만들었다 해도 그 의미가 퇴색된다.
강한 조합, 그렇다고 남들과 똑같지 않은, 그리고 그런 카드를 모으기 위한 집념까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너무나 가혹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지불한 뒤에 만든 나만의 카드들이 듀얼에서 승리를 가져다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PC방과 온라인 게임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지금도 그 시대에 유년기를 관통한 사람들의 취미가 된 저력은 그저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문방구에서 팩깡 15개 했는데 이거 좋은 건가요?
(사진)
제가 우희왕을 잘 몰라서 그런데 이거 잘 나온 건가요?
└ㅇㅇ: 완장 얘 밴 좀.
└ㅇㅇ: 개 부럽다.
└ㅇㅇ: 저거 심지어 시크릿레어네 ㄷㄷ」
“형, 재밌어?”
“어, 또 어디 올리지? 우희왕 카페 있나?”
“민호 형도 가만 보면 어딘가 꼬여 있스므니다.”
“한 판도 못 이긴 잡덱들이 말이 많구나.”
흥미가 없는데 동생들 때문에 억지로 샀다는 말은 취소다.
붉은 눈의 백룡이 3장이나, 그것도 울트라레어로 있는 이상 지금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듀얼리스트다. 특히나 어린 시절 우희왕 카드를 모았던 지환이가 분에 겨워하는 모습은 내 카드에 대한 애정을 더욱 올려주는 자양분이 되었다.
“잡덱인지 아닌지는 듀얼로 판가름 내보자!”
“하! 여덟 턴이면 끝날 놈들이 가소롭긴.”
붉은 눈의 백룡은 카드의 타이틀을 차지한 카드인 만큼 그 상징성이 엄청났다.
공격력 3100과 방어력 2600.
거기에 바닥에 소환하는 데 특별한 조건이 있지도 않다. 말 그대로 붉은 눈의 백룡만 필드에 내보낸다면 다양한 장착마법과 보조마법으로 강화해 손쓸 방도가 없는 자연재해처럼 상대방을 몰아쳐 손쉽게 승리할 수 있다.
손에 쥔 패가 아무리 좋아도 붉은 눈의 백룡이 소환될 짧은 턴에 나를 잡을 덱은 세 사람 누구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백룡 없으면 우리도 해볼 만하잖아. 마을회관에 가볼까? 혹시 이길 줄 누가 알아?”
“우리끼린 해도 마을회관엔 못 가지. 너희들 얼굴도 팔릴 거고. 미니카는 삼정자동자 홍보차 했다지만 이건 엮일 건덕지도 없어.”
“쩝.”
이 네 사람 중에 혹시나 사진이 찍혀 올라가더라도 문제가 없을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그렇게 하고 싶냐?”
“상진이도 이제 다음 달이면 또 사우디로 가니까. 모처럼 다 같이 모여서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그러게요. 다른 사람들이랑 하긴 조금 힘들겠네요.”
고작 카드 게임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렇지 않다.
만 원도 하지 않을 조잡한 장난감에 세월을 잊은 서른 언저리의 남자들이 울고 웃었으니까.
그리고 저들에게 잃어버린 추억을 찾아주려던 내 노력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동심까지 되돌려 놓았다.
“형이 알아서 해볼게.”
“정말?”
“어떻게요?”
“이 카드 말이야.”
나는 붉은 눈의 백룡 카드를 녀석들에게 잘 보이게 들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엄청나지. 프린트도 뭔가 다르고 화려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하면 말이야.”
툭.
나는 바닥에 덱을 조합하려고 잔뜩 깔아둔 카드들 사이에 붉은 눈의 백룡을 던졌다.
“어때?”
“눈에 별로 안 띄네.”
“그치?”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야 한다.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서다. 비슷비슷한 것들끼리 모아두면 시선이 분산되고 으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렇게 하면 어때?”
“이건…….”
“누렁이밖에 안 보이므니다.”
내가 카드가 펼쳐진 바닥에 누렁이를 놓아두자 카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적당히 통통하게 살이 오른 누렁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귀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카드들은 그런 누렁이의 들러리일 뿐이다.
“저기서 너희를 찍는 카메라는 별로 없을 거야. 전부 누렁이를 찍을 거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렁이를 저기 데려가자고?”
“바가, 철진 상.”
“아니, 이해가 가게 말을 해달라고!”
* * *
삼정그룹의 회장실.
말이 회장실이지 그룹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엄청난 회의가 오가는 장소였다.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총수가 업무를 보는 곳이라기엔 너무나 소박한 사무 가구들이 들어차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긴 소파가 구색 갖추기로 놓여 있긴 했으나 인조 가죽은 세월과 하루에도 몇 번씩 오는 손님들이 내는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쩍쩍 갈라져 누런 솜을 내비치고 있었다.
조동욱 회장은 진작 버려도 모자랄 그 소파에 앉아 역시나 모서리에 이가 다 빠지고 여기저기 흠집이 가득한 테이블에 무언가 펼쳐놓고 놨다 들었다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회장님, 마을로 갔던 직원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어떻드노?”
“아직 사람이 많이 드나듭니다. 마을회관의 불이 꺼지기까지 최소한 20명 이상 남아 있습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니, 그 촌동네에 뭔 게임을 한다꼬 사람이 그리 몰린단 말이고?”
조동욱 회장은 박 상무의 보고를 듣고 기가 찬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무래도 저번 미니카 사건처럼 인터넷 어딘가 소문이 퍼진 모양입니다.”
“이 카드도 다 마차놨는데 가지도 못하는 기 말이 되나!”
윗집 할머니와 승부를 위해 야심차게 마을에 들어갔다 입맛만 다시고 나온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마을회관에 눈에 익은 사람들만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자신이 삼정그룹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조금 좋은 차를 타는 막내뻘 취급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그것도 꽤 젊은 청년들이 갑자기 마을회관에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삼정그룹의 총수가 애들이나 할 법한 카드게임을 하려고 시골 마을에 들린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당장에 체면을 구길 뿐만 아니라 주식이 휘청일 위험성이 있었다.
뉴스야 돈으로 틀어막으면 된다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는 손쓸 도리가 없다.
행여나 사진이라도 찍혔다간 돌이킬 수 없는 참사기에 외지인의 방문이 잦아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조동욱 회장의 마음은 애타다 못해 새까만 재가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폰게임으로 하지지 않습니까?”
“다르다 카이! 그짝 마을에서 하는 카드는 또 따로 있다.”
“그 카드가 그렇게 소중하십니까?”
“크흠.”
박 상무는 빙그레 웃으며 조동욱 회장 곁에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권하지 않아도 옆자리에 앉을 만큼 두 사람은 격 없는 사이임을 반증이라도 하듯 조동욱 회장은 먹으라며 슬며시 찻잔을 내밀었다.
책상도 비좁았는지 테이블에 잔뜩 펼쳐 둔 카드들은 행여나 어디 흠집이 갈까 싶어 비닐에 곱게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한 봉지에 5장 들었으니까니, 한 장에 100원인기라. 이 100원짜리 모아가꼬 이래 키았다. 이건 지난번 요 앞 완구점에서, 이건 문방구한테서.”
“회사 키우실 때 기분이 드셨나 봅니다.”
“끌끌. 그랬는갑다. 이기 뭐라고 이래 애착이 드나 싶었드만.”
카드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굳이 안 해도 될 구매 역사까지 말해주는 조동욱 회장의 사뭇 진지한 모습에 박 상무는 저도 모르게 나오는 작은 미소를 참지 못했다.
평생 흥청망청 써도 남을 돈을 벌었다.
하지만 남들 다하는 그 호사스러운 취미는 조동욱 회장과는 인연이 없었다.
난을 닦고 분재를 하는 놈들은 죄다 죽을 날 머지않은 노인네 취급을 했다. 골프며 미술품 수집, 와인 등등. 행여나 돈이 조금이라도 든다 싶으면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았다.
그래도 되는 사람이다.
재계 서열 1위 기업을 일궈낸 자신에게 고상한 취미가 없다 해서 감히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이 우희왕 카드는 그런 조동욱 회장에게 묘한 관심을 쏟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평소의 자신 같았으면 ‘땅을 파봐라! 100원이 나오나!’라며 호통을 치고 넘길 잡동사니에 과한 애착이 생겼다.
그러나 그 애착이 하루하루 강해질수록 조바심도 커졌다.
정작 실전은 한 번도 해보질 못한 탓이다.
속으로야 수천, 수만 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오죽했으면 박 상무도 조동욱 회장의 성화에 못 이겨 더듬더듬 배운 상태로 몇 판 어울려 드렸으니 말이다.
여러 덱을 만들어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리를 왔다갔다 하며 게임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영혼의 라이벌인 윗집 할머니는 젊은 청년들과 겨루며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기껏 대등한 위치에서 겨룰 기회가 생겼는데 정작 마을회관 입구도 들어가질 못하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속이 답답한 상황이었다.
“뭔 수가 없겠나?”
“하하.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쪽으로 모시고 올 수도 없으니 말이지요.”
아무리 마스크를 쓰고 변장을 한다 해도 들킬 가능성이 0에 수렴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정체가 탄로 난다면 그 파급력이 너무나 거대했다. 그렇다고 할머니를 굳이 삼정그룹, 혹은 다른 장소로 모셔 오는 것은 더 이상한 소문이 날 수 있었다.
“박 상무, 니가 뾰족한 수가 없으면 할 수 없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의 의견.
비상한 머리와 과감한 실행력으로 이미 수차례 회사를 위기에서 극복하게 만든 숨은 조력자인 박 상무에게도 별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꼬?”
빈 찻잔에 차를 따르던 박 상무는 눈짓으로 테이블에 놓인 폰을 가리켰다.
“잊으셨습니까? 저보다 더 똑똑한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이제 퇴물이지요.”
“끌끌. 실없는 소리! 그래. 우리 대들보를 놔두고 있었네.”
가장 확실한 조력자가 그 마을에 있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조동욱 회장은 폰을 집어 들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기에 매달 문방구에 용달차를 타고 가긴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자신은 민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정도 부탁은 미안한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 문방구. 내다. 니 내일 시간 되면 내 좀 보자. 어, 어. 그래. 아침 일찍 오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