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황혼의 듀얼리스트(6)
똑똑.
“회장님,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어! 왔나? 빨리 안 들어오고 뭐 하노?”
벌컥.
두꺼운 문을 열려면 제법 힘이 들어갈 듯싶어 힘껏 밀었더니 허무하리만치 빠르게 열렸다.
“어어, 저 카드 다 날아간다. 거 좀 주워라.”
“네? 네.”
갑자기 열린 문에 바람이 일어 카드가 다 날아간 모양이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회장님과 한참 카드를 줍고서야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밥 뭇나? 안 무쓰모 여 식당 가서 먹고 오니라.”
“아닙니다. 오는 길에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혼자 산다고 올케 먹지도 못할 낀데.”
“하하. 그래도 요리는 종종 합니다.”
“그래. 니 음식이이야 뭐 맛이 없을 리가 없지.”
“그런데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아무런 연유도 듣지 못하고 그저 아침 일찍 오라는 말에 이렇게 달려왔다. 윗사람이 인사치레로 하는 빈말을 다 들은 후에 조심스럽게 물어야 함이 예의였지만 나나 회장님이나 그런 형식적인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굳이 전화가 아닌 이렇게 직접 부른 이유가 따로 있으실 것이 분명했다.
“느그 마을에 이 우희왕을 하러 가야 하는데 고마 사람이 너무 많은 기라.”
“네. 못해도 하루 오십 명은 넘게 오는 것 같습니다.”
“할마시랑 한 판 할라카이 내가 면이 팔릴까 봐 가지도 못하고 여짝으로 부르지도 못한다. 우애 해야겠노?”
회장님의 고심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일전에 모처럼 카드를 하러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신 뒤로 마을회관은 듀얼존으로 입소문이 퍼져 젊은 외지인의 방문이 너무 많았다. 만약 회장님의 사진이라도 찍힌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삼정그룹의 총수가 우희왕 카드로 듀얼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적이 많은 자리.
무슨 의도였던 간에 나이에 맞지 않는, 그리고 거대기업 총수의 위신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폄하하고 왜곡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산을 지우고 강을 메울 만큼 많은 돈을 가지셨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한 봉지에 500원밖에 하지 않는 카드 게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신다. 심지어 두 아들조차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뭔 수가 없겠나?”
“있습니다.”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철진이와 상진이, 그리고 지환이를 마을회관에 보내려던 몇 가지 계획 중에 하나가 있었다.
“뭐꼬?”
“마을회관에 안 가시면 됩니다.”
“아니. 이봐라. 내가 거서 듀얼을 해야 된다 카이!”
“마을회관에는 다른 사람을 보내시고 눈과 귀만 가져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우, 우예 그게 가능하노?”
첩보영화의 단골 소재다. 귀에 쏙 들어가는 이어폰과 카메라가 달린 안경으로 요원에게 직접 지시를 하는 그런 장면은 이제 식상하다 못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이 그만큼 무섭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영화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기술이 이젠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흉내 낼 장난이 되어버렸다.
세팅이랄 것도 없이 그저 화상채팅을 켜고 잘 보이지 않는 가방에 넣어두면 된다.
“무선이어폰으로 행동을 지시하고 화면은 카메라로 보면 이 회장실에 앉아서도 마을회관에 들어가 듀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침 마을에서 다음 주에 듀얼대회를 여니 어수선한 분위기라 쉽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허, 참. 그래. 이 방법이 있었네. 뭐 쪼매 아쉽지만 그래도 우야겠노.”
아쉽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세 녀석에게 듀얼을 시켜주려던 작전은 회장님께도 괜찮은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라모 인제 배우가 있어야겠고마.”
“박 상무님이 이번에도 고생하시겠습니다.”
“끌끌. 그래. 박 상무도 나이가 이제 쉰이 다 대가는데 이런 거 시키믄 안 될 낀데.”
“그래도 사복을 입으시면 눈에 띄지 않으실 겁니다.”
까라면 까는 시대가 아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시킬 사람은 박 상무님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인상이 차가운 중년의 남자, 누가 보더라도 듀얼과는 거리가 있는 이미지다. 아마 사람들 속에 녹아들기 위해서 변장을 꽤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라모 박 상무 니가 수고 좀 해주그라. 나이 먹고 주책맞게 자꾸 이런 거 시키서 미안타.”
“아닙니다. 간만에 현장 뛰는 느낌이라 좋습니다.”
공연에 출연할 배우도 정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배우가 올라갈 무대다.
* * *
“이이, 조금 더 위로!”
“여기요?”
“아녀아녀! 이번엔 좀더 아래로!”
“이, 이쯤이요?”
“이이! 딱이구먼! 수평이 딱 맞으니께 보기가 얼매나 좋은 겨!”
과연 저렇게 해서 수평을 확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막대기로 연신 좌우를 기울여 현수막에 대보시던 이장님이 마침내 엄지를 세우셨다.
“하이고, 우리 호야 고만 괴롭히고 싸게 일이나 가랑께!”
“아, 현수막이 우리 마을 간판 아니여! 이게 삐뚤어지믄 쓰나! 겨? 안겨?”
“하하…….”
구슬땀을 흘리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 현수막과 씨름한 나는 대답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찰칵.
마을 입구에 오랫동안 걸려 있던 색 바랜 불조심 현수막이 내려가고 새로 올라간 현수막의 문구는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길 내용이다.
「(경) 남양주 당산마을 우희왕 듀얼 대회 2023.08.02. 후원사: MM 프로팀 (축)」
우희왕 대회, 그것도 우리 마을에서 열리는 대회다.
도무지 이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조합은 그동안 입소문을 탄 우리 마을회관의 듀얼존에 쐐기를 박는 작전이었다.
모처럼 마을에서 열리는 큰 잔치를 마다할 어르신은 없었고 대회 일정은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목적은 세 녀석이 눈치 보지 않고 듀얼을 할 장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시골 마을에 열리는 작은 대회를 후원해서 지역사회와 상생하려는 MM 프로팀. 그리고 그 프로팀의 모기업이자 구단주와 인연이 깊은 두 후계자와 친구.
가십거리도 안 될 이야깃거리다.
누가 보더라도 상금이나 조금 지원하고 매스컴에 뿌릴 사진을 건지려는 의도가 다분한 대회다. 굳이 찾아와 취재를 하고 싶어 하지도, 할 이유도 없는 행사가 된 것이다.
세 녀석은 마지못해 참여한 임원으로 속여 대회에 내보낼 작정이다.
양복을 입고 지루한 축사 끝에 카메라를 대동해 그저 사진이나 찍을 요량으로 참여한 재벌 2세에게 구태여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물론 진짜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도 대거 초대할 예정이다.
나무는 숲에 숨겨야 하니 말이다.
“참, 그 포스터도 벽면에 좀 붙일까?”
“그건 사전에 허락받은 곳에만 붙일 수 있어요.”
“아, 마을의 공익을 위한 포스터인디 좀 붙인다고 대술까! 또 나가 핵교까지 가서 배운 기술로다가 만든 것인디!”
“불법이라 안 된다잔여! 호야 그만 괴롭히고 인자 그만 오라니까! 카드 장사 안 할껴? 저짝에 벌써 손님이 줄을 섰는디!”
“인터넷에 올렸으니까 아마 많이 올 거예요.”
“이이. 그라믄 다행이고.”
이장님이 만든 포스터는 이미 우희왕 갤러리와 카페에 올려두었다. 반응은 예상대로 뜨거웠고 주말로 잡힌 일정에 꽤 많은 사람이 몰릴 것이다.
그리고 이 대회에 반드시 와야만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 사람에게는 따로 SNS를 보내두었다.
* * *
분주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촬영장.
“우주 씨, 10분 뒤에 숏 들어갈게요!”
“네.”
가수 대기실의 문이 열리더니 손에 무언가 서류뭉치를 가득 든 스탭이 다급하게 외치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준비 다 됐지? 10분이라니까 눈 좀 붙이고 있어. 매이크업 조심하고,”
고작 10분에 무슨 잠을 자겠냐만은 매니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바닥에 침낭을 깔았다.
“형, 우리 다음 주 일요일에 일정 어떻게 돼요?”
“어? 신곡 2차 녹음이지.”
“그거 하루만 미뤄주시면 안 돼요?”
“야, 안 돼. 뒤에 일정도 빡빡한데 무슨 소리야.”
“부탁드릴게요.”
“어딜 가려고 그러는데?”
“여기요!”
「남양주 당산마을 우희왕 대회.
안녕하십니까? 산 좋고 물 좋은 당산마을에서 우희왕 듀얼대회를 개최합니다. 저희 당산마을은 예로부터 민족의 얼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그 기운을 받고 자란 쌀과 오이가 아주 맛있습니다. 아무쪼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장소: 남양주시 평곡동 관옥리 당산마을 마을회관
일자: 2023.08.02.
규정: 붉은 눈의 백룡의 전설 팩 한정(욕망의 단지 사용 금지)
상금: 1등(100만 원, 당산마을 건강미 2포대), 2등(50만 원, 당산마을 명품오이 1상자), 3등(30만 원, 당산마을 참기름 2병)
주체: 당산마을 번영회
후원: MM 프로팀」
“이거 진짜야?”
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작은 화면에 뜬 이미지를 바라봤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포스터다.
어느 노인 대학에서 실습 삼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디자인. 배경화면은 촌스러운 무지개색에 글자도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대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왜 넣었는지도 모를 인사말까지.
진위 여부가 도무지 판단되지 않을 대회에 가겠다는 우주의 말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저쪽에서도 행사비가 책정되어 있을 거고…….”
“형, 노래 부르러 가는 게 아니라 진짜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요.”
“병식아, 쫌!”
답답한 마음에 본명까지 불렀지만 정작 당사자는 입을 앙 다물고 확고한 의지를 내보였다.
“우리가 우희왕을 하라고 했던 건 오타쿠 컨셉으로 내가 혼자 산다에 출연하자는 취지였지 진짜 우희왕을 그렇게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었잖아.”
늦바람이 무섭다 했던가?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기획사에서 데뷔 준비를 했던 어린 가수는 빠듯한 생활비와 살인적인 스케쥴에 치여 힘든 시기를 보냈었다.
매니저는 그런 우주의 과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연출에 쓸 소품처럼 던져준 카드는 이제 막 날개를 펼치는 가수가 유일하게 눈을 빛내는 취미가 되었다.
하지만 일주일을 열흘처럼 쓰는 사람들이 바로 연예인이었다.
잠도 줄여가며 진행되는 마라톤 촬영과 음반 활동 중에 한가하게 듀얼존에 기웃거릴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매니저의 마음도 무거웠다.
가수.
모두가 동경하는 존재다. 화려하게 빛나고 어딜 가도 팬들이 구름처럼 따라오는 별, 말 그대로 스타다.
그리고 그 빛에는 당연히 그림자가 있었다.
이미 연예기획사에서 잔뼈가 굵은 터였다. 연습생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데뷔하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지내던가?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즐겁게 웃고 떠들어야 하는 시기에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축축한 연습실에서 뼈만 남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성공적으로 데뷔해 인기를 얻어도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좋은 차에 좋은 옷을 입을 뿐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스케쥴은 그대로니 말이다.
하지만 우주는 그런 와중에도 투정이나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또래 다른 연예인들이 알량한 인기과 몸값을 믿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 채 시건방을 떨어대는 경우도 부지기수건만 우주는 늘 겸손하고 최선을 다했다. 그런 우주의 부탁은 매니저로서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일요일이라 했지?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다녀와.”
“정말요?”
“그래. 대신 이번만이야.”
자신도 일개 직장인이다. 가수의 일정을 조율할 권한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야 한다.
매니저와 가수 사이가 아닌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어렵게 꺼낸 부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