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황혼의 듀얼리스트(7)
드디어 대회 날이 밝았다. 근래에 없던 큰 잔치.
우리 마을에서 창고에 있던 천막이 나오는 행사는 어르신들의 장례식이 유일했다. 그래서 마을 공동창고의 문이 열리는 날은 어딘가 모르게 침울한 분위기였다. 그 표현할 수 없이 가라앉은 차분한 공기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이 천막이 나온 날이 작년 할아버지의 장례식이었으니.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할머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타지의 젊은 청년들이 행여나 밥을 굶고 올까 싶어 부지런히 튀겨지는 부침개와 가마솥에 삶아 놓은 수육이 산처럼 쌓였다.
“호야! 복지관 아들이랑 이거 노나 먹어야.”
“준비 다 끝나고 먹을게요!”
“아이고, 배 곯으면 힘도 못 쓰는디!”
노릇하게 튀겨진 부침개에 침이 고였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다.
“구단주님, 의자와 테이블이 모자랍니다.”
“그늘막도요!”
“안 그래도 저희 사무실에서 챙겨왔습니다. 저 트럭에서 꺼내오시면 됩니다.”
시골 동네에서 열린 행사라기엔 몰린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행사 진행 요원은 카페에서 직접 도와주시는 분들이 오셔서 한시름을 덜었지만, 나머지 자잘한 부분은 후원사인 우리 MM 프로팀이 도맡았다.
“저희도 같이 도와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혹시나 진행이 힘들까 걱정했던 부분은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몰려든 사람들은 촌스러운 포스터를 본 순간 시골 마을에서 열린 어설픈 듀얼대회가 이리 흘러가리라는 걸 이미 짐작했을지도 몰랐다.
그저 가만히 서서 대회 준비가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진행 요원들과 직접 비품을 옮기고 각 동호회 별로 참가자 명단까지 빠르게 정리해 대진표를 만들었다.
그런 대회였다. 상품으로 직접 키운 쌀 포대와 오이가 걸린.
조금 진행이 더디고 불편하다 해서 불만을 가지 않았다. 특히 우리 마을에 출근하다시피 왔던 사람들은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직접 진행요원을 자처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조금 늦은 아침. 모두의 도움으로 드디어 대회가 시작되었다.
“에, 먼저 이곳에 이렇게 와주신 듀얼리스트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것습니다. 우리 양덕마을은…….”
길다.
이장님께 종이에 적힌 내용만 읽어달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사이사이에 살이 붙더니 지금은 아예 다른 내용으로 빠져버렸다.
“형, 어쩌지?”
“기다려봐. 할머니들이 해결해 주실 거야.”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다. 한평생 밭일을 해오신 억척스러운 할머님들의 성미는 이장님의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한 번도 그냥 놔두신 적이 없으니까.
“아, 이러다 해 지것네. 이장, 짧게 끝내고 내려와야!”
“와하하!”
윗집 할머니의 구수한 사투리가 이장님의 마이크를 삼키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장내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흠흠, 그러면 양덕마을 우희왕 듀얼대회를 지금부텀 시작하겄습니다!”
짝짝짝.
박수와 함께 드디어 듀얼이 시작되었다.
“대진표에 따라 각자 자리에 앉아 주시믄 되것습니다.”
이제 진짜 우리가 나설 차례다.
연기가 중요했다.
듀얼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행사에 참석했으니 홍보사진을 건지겠다는 표정이 여실히 드러나야 했다.
“철진아, 손에 그거 뭐야?”
“형, 이거 몰라? 듀얼디스크!”
“아니, 그게 뭔진 알겠는데 왜 네가 차고 있냐고…….”
“하! 듀얼할 때는 이게 기본이야!”
철진이 손목에는 만화영화에서 카드를 꽂아 놓는 플라스틱 장난감이 감겨 있었다. 아니, 분명 눈에 띄지 말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건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190㎝가 넘는 거대한 덩치의 남자가 양복을 입고 손에 듀얼디스크를 찬 모습은 너무나 기괴한 모습이었다.
“야, 빨리 빼. 뉴스 기사 나고 싶어?”
철진이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도망치듯 경기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휴, 앓으니 죽지. 이럴 거면 그냥 대회 열지 말고 마을회관으로 가면 됐잖아.”
긁어 부스럼이었다.
차라리 마을회관에서 사진 몇 장이 찍혀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나았다. 마을에는 이미 이 색다른 대회를 촬영하기 위해 온 너튜버들과 기자들이 열이 넘었다.
“나도 모르겠다.”
철진이를 붙잡고 실랑이를 한다면 오히려 더 관심이 끌릴 게 분명했다. 1회전에 탈락해 저놈의 듀얼디스크가 최대한 덜 찍히길 바라는 수밖에.
이제 남은 희망은 내가 키 메이커로 노렸던 사람이다. 카드 위에 앉은 누렁이처럼 철진이와 상진이에게서 시선을 뺏어갈 키 메이커.
최근에 티비를 잘 보지 않는 내 귀에도 자주 들리는 연예인이자 우희왕 대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바로 가수 우주다.
* * *
“형은 안 와도 되는데.”
“택시 타고 여기까지 오려고?”
일정이 없는 날이 곧 두 사람의 휴일이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꿀같이 귀한 휴일에 평소처럼 자신의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한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목소리는 자꾸만 기어들어 갔다.
“182번. 거의 끝 번호네.”
“이제 시작이니까 차에서 주무세요.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할게요.”
“아니야. 나도 옆에서 구경하지 뭐.”
“제가 진짜 미안해서 그래요.”
“그럼 진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알았다니까요.”
대충 A4용지를 잘라 이름표에 넣어준 번호를 확인하고서도 곁을 지킬 기세로 서 있는 걸 보다 못한 우주는 억지로 매니저를 차에 밀어 넣었다.
“야, 저기 우주 아니야?”
“진짜네? 저번에 카드게임 한다는 건 그냥 컨셉 아니었어?”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수군대는 말을 듣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썩 유쾌한 내용이 아닐 때가 많았다.
‘반짝하고 사라질 건데 뭐.’
‘솔로로 나오기엔 가창력이 좀 부족하지 않나?’
‘한국에서 안 먹히니까 복권 긁는 심정으로 미국 준비하는 거겠지.’
헤어샾, 방음이 되지 않은 대기실, 혹은 식당에서도.
자기들 딴에는 들리지 않겠지라는 생각에 품평하듯 내뱉은 말들은 송곳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하지만 각오한 일이다.
과하게 찍히는 사진과 집중되는 시선은 연예인의 숙명이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다. 원하는 때만 무대에 오르고 촬영과 공연이 끝나면 다시 일반인처럼 프라이버시를 지켜달라 할 순 없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자신에게 쏠린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야, 미친. 듀얼디스크야.”
“뭐? 어디?”
“저기!”
“푸핫! 제대로 즐기러 왔네. 내 평생 듀얼디스크 차고 대회 나오는 사람을 또 볼 줄 몰랐네.”
“그런데 저 사람 좀 익숙하지 않냐?”
연신 카메라 사진을 찍어대던 사람이 물었다.
“기시감이 드는데…….”
자신은 더 이상 이곳의 가십거리가 못되었다. 티비에서 봤던 연예인은 듀얼디스크를 차고 대회에 나온 사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기분은 또 오랜만이네.’
우주는 철진 덕에 카메라와 팬들이 따라다니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행여나 자신의 말이 나올까 신경이 곤두서 늘 열어두었던 귀가 닫혔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았다. 우주는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지정된 테이블에 앉아 덱을 꺼내 들었다.
(박 상무야, 잘 들리나?)
톡톡.
박 상무는 이어폰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가방을 가볍게 두 번 두들겼다.
(첫 장 드로우 해봐라. 옳지! 하프 연주하는 정령이고마 잘 나왔다! 뒤집어가 가로로 눕히놔라. 절마가 못 보게! 수비로 돌려놓으모 앵간해서는 이거 못 이긴다 카이!)
팔자에도 없는 듀얼대회에 출전한 박 상무는 조동욱 회장의 아바타 역할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평소 입던 양복 대신 너이키 태크픽 바지와 스냅백 모자, 손목에는 지쇽 시계, 그리고 최신 유행한다는 베이비펌까지 한 박 상무의 모습은 젊음을 추구하는 40대의 몸부림이 담긴 아우라가 풍겼다.
누구도 삼정그룹의 임원이라 생각지 못할 차림새로 인파 속에 섞이니 민호와 두 형제도 그런 박 상무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냥 철없는 아저씨로 보이는데 덱 구성이 괜찮네?’
우주는 게임이 진행될수록 수세에 몰리는 형국에 마른침을 삼켰다. 적당히 즐기다 오라는 매니저 형의 부탁과는 반대로 우승까지 작정한 회심의 세팅이 상대방의 방어에 번번이 막혔기 때문이다.
“파이어 에로우로 직접 공격하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격 덱인가? 도대체 무슨 조합이야?’
대회에는 처음 지정한 한 가지 덱만 사용이 가능했다. 응당 가장 범용성이 높고 드로우가 말려도 안정적인 덱을 꾸리는 것이 우승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파이어에로우라니?
바닥에 몬스터를 소환해 때리는 것이 몇 배는 더 안정적일 텐데 직접 공격마법을 굳이 덱에 넣은 이유는 아무리 고민해봐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 지금 고민해서 뭐 하겠어? 이미 졌는걸.’
우주는 카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덱으로 승부를 겨뤘고 패했다. 운만 따라준다면 우승까지 노려봄 직하다 여겼건만 첫 번째 예선에서 저격덱에 보기 좋게 당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낭만이다.
우희왕은 긴 세월만큼 복잡한 조건과 밸런스를 흔드는 카드가 계속 출시되어 왔다. 발동 조건과 설명이 프레임을 뚫고 나올 정도로 긴 경우가 허다했다. 오죽하면 비문학 게임이라는 멸칭이 생겼겠는가?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1기 팩. 붉은 눈의 백룡의 전설로만 짜는 덱으로 경기를 해봤다. 그것도 방송에서 연출된 경기가 아니라 진짜 자신의 실력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리고 겪어보지 못한 그때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패배는 가지지 못한 추억을 떠올린 값으로 너무나 저렴하다.
패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우주와 같은 마음이었다.
‘졌지만 재미있었다.’
모처럼 틀에 박힌 카드가 아닌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카드로 대결을 펼쳤다. 코묻은 돈으로 어렵게 사 모았던 카드로 만든 덱으로 즐긴 게임에서 승패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남은 인원은 그렇게 점점 줄어갔다.
2차전, 3차전을 거치며 박 상무, 아니, 조동욱 회장은 마침내 최종 본선에 올랐다.
(박 상무, 잘했다! 이 판만 이기모 이제 준결승인기라! 다음은 누구고?)
탁.
테이블에 이름표가 올려졌다.
「김춘옥」
(드디어 만났고마.)
카메라로 테이블을 확인한 조동욱 회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영원의 숙적. 세간에 알려진 조동욱 회장의 숙적은 정진수 회장이었다. 지금이야 대현그룹이 2위로 물러났다지만 어느 분야에서건 근소한 차이로 업치락 뒤치락 하며 치열하게 경쟁을 했던 호적수였다.
그러나 그 싸움은 찝찝한 승리로 끝나버렸다. 정진수 회장의 형제들이 그룹을 갈라낸 뒤에도 소송을 질질 끌어가며 계열사들을 공중분해시켜 버린 까닭이었다.
회사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열정이 사그라들진 않았으나 라이벌을 잃은 조동욱 회장은 좀처럼 격정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고스톱을 치기 전까지는.
대현그룹의 정진수 회장에 버금가는, 아니, 훨씬 압도적인 힘으로 번번이 자신이 모시는 회장님을 쓰러뜨린 장본인이 지금 마주한 인상 좋은 할머니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랴, 빨리 이기고 나도 준결승 가야 하니께.”
(저 할마시 하는 말은 듣지 마라. 괜히 정신만 흐트러진다 카이!)
‘제가 정신이 흐트러져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톡톡.
어차피 지시한 대로 움직이는 아바타라 상관없다 말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말은 가방을 두 번 건드려 알겠다는 표현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윗집 할머니와 조금 수상한 모습을 한 조동욱 회장의 대결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