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26화 (126/151)

#126. 황혼의 듀얼리스트(8)

덱.

TCG에서 사용하는 카드 뭉치를 뜻한다. 우희왕도 이 덱을 구성해서 경기를 펼치게 된다.

카드의 종류는 실로 방대해서 적게는 수백, 많게는 수천, 수만 가지가 있다. 이중에 1장, 혹은 3장의 동일한 카드로 40~50장의 카드뭉치인 덱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 경우의 수는 무한에 가까웠다.

좋은 카드들로만 구성한 이른바 티어덱부터 그런 티어덱만 노려서 카운터를 치기 위한 저격덱까지. 서로 물고 물리는 싸움은 한 가지 고민을 만들어 낸다.

내가 좋아하는 덱과 승리를 위한 덱,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태생이 승부를 좋아하고 한번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대한민국의 정서상 당연히 티어덱이 주류를 이뤘다.

저격덱을 만날 확률보다 같은 티어덱이나 잡덱을 만나 이길 확률이 월등히 높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카드게임에는 승리의 쾌감이 있을지언정 진정한 자신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막강한 성능을 지닌 카드들로 만든 조합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카드들로 만든 덱은 승패가 아닌 게임의 즐거움을 안겨주니 말이다.

하지만 팔자 좋은 소리다.

최소한 조동욱 회장에게 그런 낭만 넘치는 소리를 꺼냈다가는 ‘네가 50판 넘게 져봐라! 그런 말이 어데 나오나!’라는 호통을 들을지 몰랐다.

이겨야 했다.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

이기고 지는 데 필요한 운과 기술, 그리고 전략은 압도적인 무위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되지 않을 승부라 치부하고 그냥 넘겼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까?

(저 할마시는 승냥인기라. 사냥감을 잡으모 그냥 안 묵는다. 이리저리 발로 차고 던지다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린다카이.)

조동욱 회장이 당한 화투판이 그러했다.

패가 말리지 않아 금방 점수가 나는 판도 그냥 이기는 법이 없었다. 마치 먹을 패가 없는 것처럼 속이고 이미 승부가 난 게임에 조동욱 회장이 최선을 다해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지갑에 돈과 멘탈 모두 걸레짝을 만들어 놓는 그 트레쉬토크와 심리전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 우희왕은 다르데이. 저 할마시도 어차피 저번 달에 시작한 초짜인기라. 그카고 저 할마시가 가진 덱은 내 안 봐도 비디오다.)

“자, 나는 카드를 뒤집어 놓고 턴을 마치겠구먼.”

(저 봐라. 필드에 잔뜩 깔린 함정카드들. 내 저칼 줄 알았다. 요사시런 할망구, 몬스터 소환도 껄끄럽게 만들어 놔뿐네. 개안타. 박 상무, 잘 들으라. 지금 패에 암석거구 있제? 그거 뒤집어서 가로로 놔뿌라.)

“하이고, 그카믄 내 함정 카드가 발동되는디? 자, 어짝 암석거구는 내 함정 안으로 카드에 목숨을 다하는구먼. 공격력이 1,000 이상이니께.”

꿈틀.

박 상무는 눈치가 빨랐다. 우희왕을 몰라도 3판 정도 같은 덱으로 게임을 해보니 무슨 카드가 좋은 카드인지 정도는 얼추 파악한 상태였다.

암석거구.

지금 조동욱 회장의 덱에서 방어력이 가장 높은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런 몬스터를 허무하게 함정으로 잃었으니 필드는 어느새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개안타. 다 계산된기라. 인자 가만히 패만 뽑아라. 저 할마시가 못 견디고 덫 밖으로 나올 때까지.)

그렇게 카드만 뽑고 턴을 넘기는 지루한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슬슬 애가 탈끼라. 함정카드는 내가 필드에 몬스터를 내야 발동하니 말이다. 자, 이제 재료가 다 모 있스모 슬슬 들어가자. 무장이 뛰어난 불가사리를 수비로 내라.)

“자꾸 그렇게 수비카드만 내믄 나중에 내 공격을 막기만 할 건가배.”

(아이다. 이 방어형 몬스터들은 추진력을 내기 위해 모아둔 기라. 자, 인자 처음 받아놨던 검은 매지션을 공격으로 내뿌라! 그카고 마법서 카드로 공격력과 방어력을 강화!)

“필드에 나온 두 몬스터를 묘지로 보내고 검은 매지션을 소환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법서를 장착합니다.”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함정카드들은 소환된 방어형 몬스터에게 모두 써버렸고 필드에 세트 된 나머지 함정카드들도 이미 발동되지 않은 순간부터 그 정체가 탄로 나버렸다.

(이제 우짤끼고? 내 검은 매지션은 드로우 된 장착마법으로 점점 강해질끼고 할마시 니는 인자 체력 대신 맞아줄 몬스터도 없꾸마!)

넉넉한 웃음을 짓던 할머니의 눈이 박 상무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폐부를 관통하는 질문이 난데없이 날아들었다.

“뒤에 누가 있는 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건 자네 카드가 아니여. 자네처럼 신중하고 무거운 성격이 이런 무모한 모험을 할 리가 없제. 나가 초반에 함정카드를 안 냈으믄 우짤라 했당가?”

“…….”

“이건 독기가 바짝 오른 놈의 카드여. 나를 잡기 위해 진짜 함정을 파고 기다린 사냥꾼의 카드인 겨.”

* * *

“할마시 역시 눈치가 빠르네. 알아차려도 개안타. 인자 우얄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말이다.”

조동욱 회장은 작은 폰 화면 속에 진행되는 경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승기가 코앞까지 다가온 탓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 뻑뻑한 눈을 잔뜩 찡그려 미간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때였다.

‘이, 이게 뭐꼬?’

손바닥만 한 화면이 한 번의 눈 깜빡임 사이에 사라졌다.

‘여기가 어디고?’

적막함이 감돌던 회장실이 깜깜한 어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떨어지는 한 줄기의 빛은 점점 그 굵기를 더하다가 이내 주변을 가득 채웠다.

‘버, 버츄얼 시뮬레이션 시스템!’

본 적이 있었다. 혹시 듀얼에 참고가 될까 싶어 찾아본 애니메이션에서.

카드를 내면 그 카드가 영상으로 살아 움직이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요즘 얼라들은 유치한 걸 좋아하는고마.’라며 웃어 넘겼던 그 경기장에 지금 자신이 들어와 있었다.

‘노망이 났나? 아이다! 내는 지금 진짜 듀얼을 하고 있는기라!’

물아일체의 경지.

자신의 노쇠한 몸은 그 요상한 머리를 한 만화 속 주인공처럼 이 커다란 듀얼 경기장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윗집 할머니가 마치 진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어두움 카드 발동! 이로써 내 검은 매지션은 총 500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가진데이. 그대로 공격!”

검은 매지션은 한 손에 마법서를, 그리고 다른 손에 검은 오러를 두르고 윗집 할머니를 향해 날아들었다.

“자, 가라! 검은 매직!”

콰아아아.

검은 매지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이 윗집 할머니의 주위를 굴절시키며 이내 모든 체력을 깎았다.

(내가 졌네.)

(수고하셨습니다.)

깔끔한 승부였다. 직접 듣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이어폰으로 윗집 할머니의 축 처진 패배 선언이 똑똑히 들렸다.

“됐다! 드디어 저 할마시를 꺾은기라!”

억겁의 세월. 저 승냥이 같은 할마시에게 뜯긴 돈이 얼마며, 지고 능욕당한 날은 또 얼마던가?

비록 박 상무의 눈과 귀를 빌려 이뤄낸 승리지만 자신이 직접 이긴 것과 진배없었다.

마침내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산을 정복한 것이다.

‘그란데 와 이리 마음이 허하노?’

꿈에 그리던 값진 승리였다. 철저하게 공략했던 덱으로 불리함을 뒤엎고 필드를 장악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가슴속에 요동치는 격정적인 파도는 조금도 잔잔해지지 않은 것이다.

퉁퉁 불어터진 잔치국수를 한 사발 먹은 기분이다.

배는 찼지만, 어딘가 허한. 먹고 돌아서면 뜨끈하고 꽉 찬 국밥이 생각나는 그런 김빠진 점심을 먹었을 때와 같았다.

그리고 진행요원의 안내멘트에 조동욱 회장은 마침내 그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음은 경기는 마지막 결승입니다. 34번 선수와 2번 선수 테이블로 모여주세요.)

(오셨습니까?)

여유로운 민호의 인사에 박 상무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니, 니는… 문방구!”

태풍을 이겨냈다 해서 어디 바다를 취했다 할 수 있겠는가?

자신은 그저 작은 돛단배를 타고 힘겹게 태풍을 지나왔다. 사활을 걸었다 하지만 저 하늘에서 본다면 작은 풍랑을 넘긴 것이리라.

조동욱 회장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회장님, 드디어 우리 삼정전자가 백색가전에서 국내 1위를 차지했습니다!”

“뭐라꼬!? 그기 정말이가!”

“네! 이번 분기 판매량을 취합한 자료가 방금 올라왔습니다!”

조동욱 회장은 떨리는 손으로 결재판을 받아들었다.

어딘가 글자가 어색하게 타이핑된 보고서에는 근소하지만 분명 삼정전자의 판매 실적이 가장 높은 숫자를 나타내고 있었다.

“된기라! 우리가 저 쟁쟁한 일본 놈들캉 가격 후려치는 은성전자를 드디어 재끼뿟다!”

최첨단 분야이자 계열사의 모든 자금을 끌어와 시작한 사업이었다.

모 아니면 도.

안전하게 운송업으로 먼저 회사 내부를 다지자는 임원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단독으로 벌이다시피 했기에 실패한다면 회사가 넘어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남들은 무모한 도전이라 할지 몰라도 조동욱 회장은 확신이 있었다.

다른 업체들보다 훨씬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다소 높은 불량률을 커버하는 전국 수리 지점까지.

새로운 가전제품 브랜드인 삼정의 확실한 특징을 살린 판매 전략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신혼 가정을 순풍 삼아 기적적인 매출을 올렸다.

“이기 아닌기라…….”

“네? 전국 1위입니다! 이제 삼정그룹의 가전이 전국1위를 했다는 광고가 전면에 모두 실리게 되었습니다!”

삼정전자의 직원들은 이날만을 위해 철야까지 불사하며 일에 몰두했다. 오죽했으면 삼정전자는 저녁마다 터져나간 백열등을 전문으로 갈아끼우는 직원까지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조동욱 회장의 기쁨은 백반 한 끼를 먹을 시간보다 더 빠르게 식었다.

“이거 봐라.”

조동욱 회장은 결재판이 떨어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테이블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테이블과 유리 사이에는 이제 막 해외지부를 설립해 판매 루트를 뚫고 있는 지점들이 적힌 세계지도가 들어가 있었다.

“1위라꼬? 이 코딱지만 한 나라에서 1위한 게 뭐 그리 자랑이란 말이드노? 여 큼지막한 땅덩어리 봐라. 미국, 호주, 중국에 유럽까지! 이거 다 노다지 아이가? 와 우리가 여서 없는 살림 쪼개가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단 말이고?”

“회장님, 아직 글로벌 시장은 무리입니다. 제품의 인지도도 떨어지고…….”

“카모! 여 우물 안 개구리 매키로 그냥 앉아 있자 이 말이가? 몬난 자슥들!”

탁.

조동욱 회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라이터가 올라간 곳은 부산 앞바다였다.

“이기 밴기라, 배. 우리 삼정전자 물건이 이 배에 실리가 바다로 나가야 한데이! 느그들 앞으로 세계 1위 이야기 나오기 전에는 이런 종이쪼가리 들고 신나게 들어올 생각 말그라! 알긋나?”

* * *

“그래. 바다로 나가야 하는 기라.”

조동욱 회장은 왜 그토록 기쁘지 않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영원의 라이벌을 꺾은 것은 분명 통쾌한 일이나 아직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배는 거대한 바다를 향해 떠날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운명의 바닷길을 막고 있는 또 다른 고난을 넘어야 했다.

그 고난은 지금 잔잔한 호수 같은 표정으로 가방에 숨긴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시골 문방구의 주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