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29화 (129/151)

#129. 충만한 용기(3)

잔치는 끝났다.

중의적인 표현이 아니라 밤까지 이어진 막걸리와 수육, 파전 냄새가 진동하던 잔치가 드디어 끝났다.

뒷정리랄 것도 없었다. 비틀비틀하면서도 다 같이 모여 쓰레기를 치우고 천막과 의자를 걷어 트럭에 실어주었으니.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공이라도 일단 머릿수가 많으니 서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휴. 이제 진짜 술 좀 그만 먹어야지.”

“형은 뭐 딱히 많이 먹지도 않잖아요.”

“그래도 요샌 한번 먹으면 진짜 많이 먹네.”

저번 딱지 반란처럼 머리가 팽팽 돌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냉수를 찾을 것이 분명했다.

목에 걸린 달큰한 막걸리 향과 드물게 보는 맑은 밤하늘. 그리고 어수선한 소란이 지나고 비로소 목청껏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까지.

우리 넷은 평상에 나란히 누워 그 여운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대리 부른 거 맞아? 다들 왜 이렇게 늦게 와?”

“여기 대리 부를 사람이 몇인데. 우리 차례 오려면 한참 걸릴걸?”

“맞네.”

지하철은커녕 마을버스도 하루에 몇 대 오지 않는 시골 마을에서 연 대회다. 대부분 차를 타고 왔고 예정에 없던 푸짐한 술상을 마다하지 못했다.

그 결과가 삼삼오오 모여 카메라 불빛에 의지해 대리운전이 오기까지 열리는 뒤풀이 듀얼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날에 뒷산에서 봤던 반딧불이처럼 은은하게 반짝였다.

“그래도 자고 가진 마. 날 좋으니까 잘 거면 여기 평상에서 자든가.”

“야박하므니다.”

“야박한 게 아니고 너희들이 끈덕진 거야.”

적당히 배부르고 술 취한 남자의 입이 4개다. 실없는 농담과 때로는 진중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하나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차에 올랐고 어느덧 남은 사람은 철진이와 나뿐이었다.

“네 대리기사분은 왜 이렇게 안 와?”

모두 떠나고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이제 철진이와 나, 둘이 전부였다. 나는 행여나 덤벙대는 철진이가 대리운전을 잘못 신청했나 싶어 의심의 눈초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임 차장이 마침 근처라서 데리러 오기로 했어. 차는 내일 찾아가고.”

“야, 그러면 진작 말하던가! 그리고 이 시간에 왜 부하직원을 불러. 너 인마, 그거 갑질이야.”

“아니, 마침 뭐 사서 오는 길이라잖아. 어차피 난 차 더 있어서 아침에 다른 차 타고 가면 돼.”

“내일 여기까진 뭘로 오고? 어차피 두 번 움직일 거 뭣하러··· 야, 야 듣고 있냐?”

내 잔소리가 어지간히도 듣기 싫었는지 철진이는 슬쩍 돌아누웠다.

“그래, 자식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라.”

퍽퍽.

“아! 아! 그만 때려!”

팔꿈치로 잘 파고들지도 않는 등살을 힘껏 찍으니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너 그리고 말이야.”

끼익.

“차 왔네. 나 갈게.”

“철진아.”

나는 차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철전이를 불러세웠다.

“왜?”

“상진이한테는··· 아니다. 조심해서 가라.”

생각이 깊은 아이다.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상 내가 하는 말은 주제넘은 참견이다.

다만 미련과 후회가 남을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차마 전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남은 또 다른 미련과 후회가 되었다.

* * *

철진은 임 차장의 차에 오르자마자 익숙한 몸놀림으로 의자를 조절했다.

“끝나셨습니까?”

“미안. 그냥 대리 불러도 되는데 그냥 혼자 가기 또 심심해서. 참, 그리고 이거. 덕분에 잘 썼다. 아들한테 빌려줘서 고맙다고 전해줘.”

철진은 손목에 찼던 듀얼디스크를 풀어 임 차장에게 건넸다.

“이제 머리가 굵어서 폰 게임만 합니다. 그런데 용케 그걸 차고 다니셨네요.”

“그럼! 듀얼리스트의 기본인데!”

“눈치챈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민호 형은 진작 알고 있던 것 같고 나머지는 모를걸? 내가 워낙 실없는 짓을 많이 했어야 말이지.”

“아깝진 않으십니까? 이렇게 내려놓기엔.”

“아깝지. 삼정가의 장남. 이 조철진이 적통 아니겠냐?”

그럴 때가 있었다. 동생보다 좋은 실적을 내기 위해 팀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전념했던 시절이. 그런데도 임 차장은 마치 수십 년이 지난 것처럼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1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선의의 경쟁이었다면 거짓이다.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실적뿐만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두 형제가 가진 갈등의 골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핏줄이어서일까?

지금 두 사람은 조동욱 회장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누구보다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서로에게 하고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서로 이빨을 드러내며 싸웠던 사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걸로 된 거야. 누가 뭐래도 내 동생이 더 잘 어울려. 똑똑하고 사람 잘 주무르고. 이거 내일 잘 뿌려. 정나미 딱 떨어지게.”

철진은 케톡으로 임 차장에게 받은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폰 화면을 가득 채운 사진에는 철진이 듀얼디스크를 차고 듀얼을 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대기업을 경영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사진이다.

“염병, 진짜 모자라 보이네.”

“따로 보정을 하진 않았습니다.”

“뭐 인마? 평소에도 이렇게 보인단 말이야?”

다소 억울한 표정으로 윽박질렀으나 임 차장은 평소처럼 맞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1차 기사는 오늘 속보로 들어갔으니 아침에 이 사진이 회장님과 경영진들에게 들어가면 내일 바로 반응이 올 겁니다. 한동안 시끌시끌하겠습니다.”

“나한테 줄 댄 사람들이 어디 있었다고. 그냥 지들끼리 한동안 씹어대다 말겠지. 임 차장은 나 물러나는 대로 애들 잘 추려서 상진이한테 붙어. 무슨 말인지 알지?”

“이제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몰라, 시발. 뭐 한 몇 년 하와이라도 다녀오던가 그래야지.”

“그래도 그··· 공동 경영이 없던 사례도 아니고······.”

“힘이 나뉘면 50:50이 아니라 30:70, 20:80이 되는 거야. 전문 경영인 앉히고 손 떼라는 사람도 나오는 마당에 팔자 좋은 소린 거 알잖아.”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회사의 존망을 결정짓는 중대사를 다루는데 머리가 둘이라면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아무도 납득하지 못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소송과 기관을 매수하는 더러운 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에게 마땅히 권력이 주어져야 했다.

그 사람이 능력이 출중하고 회사의 명운을 맡겨도 될 만한 그릇이어서가 아니다.

형제를 짓밟고 올라온 탐욕과 이기심이 최소한 자기 것이라 여긴 회사를 필사적으로 지킬 것임을 염두한 차악이다.

“걸린 사람만 10만에 하청, 그리고 거기 처, 자식, 부모까지 더하면 몇 명이겠어? 경영권 분쟁 같은 걸로 피 흘렸다간 졸지에 책상 빼고 집에 가는 사람이 족히 수천은 나올 거다. 나 하나 포기하면 깔끔하게 끝나.”

“저희도 짐 싸서 갈 겁니다. 같이 하와이에서 여행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본사 자금이나 좀 빨아먹으면서 휴양도 할 겸해서요. 또 해외 파견에 가족 다 같이 가면 지원금이 빵빵하지 않습니까?”

“아서라. 상진이 쪽 사업 지금 와꾸가 자꾸 커져서 인력 모자라다고 난린데 들어가서 훈장 받고 이력서 세탁 깔끔하게 해. 나 귀찮게 하지 말고. 사우디 왕세자가 매일 갈아엎고 보낸 설계도가 벌써 처음 사업 규모에 다섯 배라니까.”

“저희도 이 바닥에서 꽤 심하게 구른 편인데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와이는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철진이 하와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영화 친구에서 나왔던 ‘니가 가라. 하와이.’라는 대사가 유독 뇌리에 깊게 박힌 탓이었다.

그 때문에 휴가 시즌이 되면 딱히 바다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하와이로 떠났다. 휴가 내내 하와이에서 하는 일이라곤 테라스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팀원에게 줄 기념품을 사러 조잡한 물건을 파는 가게에 들리는 게 전부였지만.

“거기 별거 없어! 덥고 그냥 바다 있고! 영어 써야 하고!”

“뭐 어린이 그림일기 읽으십니까? 세계적인 휴양지를 그렇게 말하면 욕먹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하와이 가시면 제발 그놈의 서핑보드가 박힌 티 좀 그만 사오십쇼. 동네 슈퍼 갈 때도 못 입습니다.”

“어? 그게 왜! 제일 잘나가는 옷인데!”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매장 밖에 걸려 있다고 잘나가는 옷이 아닙니다.”

“야! 논리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손님들 시선을 확 끌어야 하니까 제일 잘나가는 걸 밖에 걸어두지! 임 차장은 홍보팀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하나 몰라?”

이심전심.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라 했다.

철진과 임 차장의 주제를 한참 벗어난 대화는 뜻대로 되지 않은 아쉬움과 제멋대로인 재벌 2세를 보좌하며 울고 웃었던 팀원들의 걱정이 담겼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와중에도 진심이 담긴 말은 에둘러 서로를 향했다.

“난 요 앞 편의점에 세워줘. 술 좀 사 가게.”

“알겠습니다.”

임 차장은 그날따라 따르는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넓은 어깨가 유독 작고 초라해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 * *

“으아! 드디어 다 갔구나!”

나는 찬물로 개운하게 씻은 몸을 그대로 이불 위에 눕혔다. 에어컨으로 습기가 날아간 이불은 딱 자기 좋은 감촉을 선사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왔으면 하는 마음에 대회를 일요일로 잡은 것이 화근이었다. 반나절만 일하는 주제라도 술을 잔뜩 마신 다음에 남은 일이 월요일 출근이라는 사실이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술기운이 어느 정도 날아가자 뒤늦게 몰려온 피로는 금방이라도 눈꺼풀을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굳이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폰을 꺼내 들었다.

잠을 자는 일에도 엄연히 그 절차가 있는 법. 몸이 조금 힘들다 해서 눕자마자 잠드는 짓은 군대에서나 했던 취침 방법이다.

교양 있는 사회인이라면 당연히 누워서 1시간 정도는 너튜브를 봐줘야 한다. 그것도 평소 아무런 관심도 없던 동영상들로.

(오늘 먹어볼 음식은~ 매운 소꼬리찜~)

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요리가 마침 메인 화면에 먹방으로 나오다니!

나는 볼륨을 키우고 휴대폰을 가로로 세워 최적의 각도를 만들었다. 베개에 누워서도 목이 아프지 않을 그 황금 각도는 매번 미세하게 틀어지기에 벽에 비스듬하게 기댄 폰은 한참이 지나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삐리리리.

“아, 이. 이 밤에 누구야?”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 시간은 벌써 12시가 넘었다. 아무리 봐도 잘못 걸린 전화겠거니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받지 않기엔 꺼림직한 기분이 들어 어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MM 프로팀 구단주 김민호입니다.”

(늦은 밤에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대현그룹 부회장, 정인성입니다.)

대현그룹의 부회장? 그런 사람이 왜 이 시간에 나에게 연락을 했지?

종잡을 수 없는 전화 한 통에 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숙취가 말끔하게 날아갔다.

“네, 무슨 일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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