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서 오세요 민호문방구-130화 (130/151)

#130. 허락

뒤가 구린 일이다.

늦은 새벽에 받은 전화는 아무리 앞뒤를 맞춰봐도 아귀가 맞지 않았다. 일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일일 수밖에 없다.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라면 실무담당자가 이미 배정되어 있었고 보고라인을 통해 정상적인 미팅을 잡으면 된다.

그런데 대뜸 한다는 말이 논의할 것이 있으니 찾아오라니? 예의도, 명분도 없는 그 일방적인 요구는 대현그룹 부회장이라는 이름표 아니면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다.

심지어 거절은 선택지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현그룹은 우리 MM 프로팀의 최대 주주였으니까.

그렇게 나는 강남에 있는 한 고급스러운 술집에 도착했다. 아니, 정확히는 주차장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막혔다는 말이 맞았다.

“차 빼쇼.”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내 차 앞을 막고 차를 빼라 손짓했다.

“이곳에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들어오려는 사람이 어디 당신뿐인 줄 아쇼? 여기 술값이 얼만 줄이나 알고? 하! 좋은 말로 할 때 가쇼. 괜히 험한 꼴 보지 말고. 객기도 봐가면서 부려야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주차장 입구를 막아선 직원을 앞에 두고 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MM의 구단주 김민홉니다.”

(네,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여기 문제가 좀 생겨서요. 제가 조금 옷을 편하게 입고 와서 그런지 직원분이 도통 들여보내 주시질 않습니다. 전화 좀 받아보시겠습니까?”

“네. 이 팀장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내 전화를 받아든 직원은 갑자기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고쳐 받고는 나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별 볼 일 없는 연극에 휘말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네? 그걸 어찌… 아, 아니, 아닙니다.”

짜고 치는 연극이었다.

이렇게 비싼 술집에 팀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발렛파킹을 하기 위해 나와 있는 상황부터가 말이 되질 않는다.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는 곳에 초대했다는 첫인상을 남기기 위한 싸구려 연극에 놀아난 것은 나였으나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사람은 이 일면식도 없는 팀장이다.

“원해서 하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자존심을 접고 고개를 숙인 것에 너무 마음 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나는 졸음을 쫓으려 넣어두었던 빅카스 한 병을 내밀었다. 마음 같아선 돈을 드리고 싶었으나 그건 또 다른 무례나 다름없다.

“감사합니다…….”

“주차는 제가 하겠습니다. 최대한 구석진 곳에 해둘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실랑이 끝에 나는 차에서 억지로 끌어내려졌다.

원래 발렛은 기본 서비스라 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막무가내를 이길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내 경차가 탈탈거리며 주차장 안으로 사라지는 동안 직원들이 달려나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급스러운 외관에 걸맞은 복도를 따라 한참 들어간 곳은 족히 30명도 넘게 앉을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방이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의 가장 끝자리, 상석에는 오늘 나를 부른 사람이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저자다. 나를 여기까지 부른 사람이.

“대현그룹의 부회장, 정인성입니다. 불편함을 드려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현그룹의 부회장.

나와는 일면식도 없던 사람이다. 물론 풍문을 듣지 못한 건 아니다. 그래도 최대 주주의 회사인데 비위를 맞춰줄 사람의 성향 정도는 파악해 두어야 했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경영 수업 겸 굵은 꼭지로 맡은 사업은 전부 처참한 꼴을 면치 못했다. 형제들과의 불화, 그리고 탈세, 공금 횡령 같은 자잘한 논란까지.

물론 인터넷 검색만으로 그 사람을 모두 파악하는 건 경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나 최소한의 정보를 종합해 봤을 때 정인성 부회장은 지장도 덕장도 아니었다.

그저 타고난 핏줄로 그 자리에 앉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나를 찾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목적을 알 수 없다면 답은 하나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구린 일.

“긴히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아, 내가 실례했습니다. 잘 모신다는 게 그만. 하하. 자, 우선 들지요.”

자연스러운 하대와 함께 고급스러운 양주병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술은 받기만 하겠습니다. 제가 약을 먹고 있어서요.”

“아쉽군요. 일부러 좋은 술을 준비했는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보다 저를 찾으신 용건을 듣고 싶어 왔습니다.”

지금은 비위를 맞춰 줄 때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잔을 받고 무릎을 좁혀 허리를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상을 믿지는 않으나 대현그룹의 부회장은 내 예상 범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전화통화와 방금의 짧은 대화, 그리고 싸구려 연극까지.

이런 사람들에겐 빈틈을 보여야 한다. 납작 엎드려 떨어지는 콩고물을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만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다른 게 아니라 그 문방구에서 뭔가 밀회가 있는 모양이던데…….”

“밀회요?”

“삼정의 두 형제와 우리 아버지까지 말입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됐고.”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인 정인성 부회장의 말이 짧아졌다.

“내 질문에 제대로 답만 해주면 사례 명목으로 그쪽 회사에 우리 구단주 연봉 빵빵하게 밀어드릴게. 우선 큰 걸로 한 장. 어떤가?”

1억.

내 대답이 1억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듣겠습니다.”

나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뭐 여기까지 와서 스무고개를 할 것도 아니고 내 솔직하게 말하리다. 폐교와 마을을 허물고 지을 호텔이 진짜 우리 노인네 손에 들어가는 게 맞는지 알고 싶은 거요.”

호텔? 무슨 호텔? 우리 마을을 허물고 호텔을 지어?

하마터면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일단은 속여야 한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요.”

“하, 우리 대현그룹 정보력이야 삼정만은 못해도 수준급이지.”

그 정보력을 대현그룹 회장님이 장악하지 못했다는 건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셨든지.

머리가 복잡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두 녀석과 정진수 회장님은 그런 큰일을 몰래 꾸미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감히 아버지의 일에 뒤에서 수작질을 하는 이 못난 아들은 분명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답은?”

아차, 생각이 길었다.

“맞습니다.”

“역시!”

정인성 부회장은 무릎을 ‘탁.’ 치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기뻐했다.

“그걸 돕는 조건으로 꽤 받았을 텐데?”

“돈이야 항상 부족하죠.”

“이야기가 통하는군. 자, 이렇게 하지. 약속한 한 장은 당장 다음 달에 우리 방식대로 들어갈 거고 그 문방구에서 나오는 쓸 만한 정보를 주면 한 장 더.”

거짓말이다. 아무리 돈이 우습다지만 말 한마디에 1억을 또 내놓을 재벌은 없다. 적당한 정보를 받았으면 도리어 내부에서 스파이 짓을 한 나를 겁박해 돈을 도로 토해내라 할지언정 깔끔하게 거래를 할 인물이 아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대하지.”

나는 정인성 부회장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끈적하고 기분 나쁜 체온이 전해진다.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느낌이다. 일전에 문방구를 찾아왔던 그 수상한 사람도 아마 정인성 부회장의 사람일 것이다.

우선 그리하게 둘 작정이다. 제멋대로 오해하고 그렇게 늪에 빠지도록.

깊게 파내려 갈수록 그 속에 든 보물상자가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상실감이 클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상실감은 그저 마음의 상처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이미 지불했겠지.

용서는 없다.

우리 마을을 걸고 장난질을 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하니까.

* * *

나는 술자리가 끝나고 가장 먼저 정진수 회장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 아들놈이 자네를 찾았다고?”

“네.”

“불러서 뭐라 했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뜬소문을 들고 와 저에게 진위 여부를 확인해 달라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삼정그룹에게 당산마을 부지를 매입해 호텔을 짓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이… 썩어빠진 놈이…….”

분에 겨워 꽉 쥔 정진수 회장님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정인성 부회장이 이 정보를 가지고 무얼 할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글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진수 회장님의 입이 열렸다.

“건설 쪽은 하청 한 바퀴만 돌려도 자금 추적이 어려우니까. 뭐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겠지. 자네에겐 미안하게 되었네. 내가 자식놈을 잘못 키워서.”

공기가 무겁다.

아들의 치부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하는 아버지의 심경이 오죽할까?

“내가 어찌하면 좋겠나?”

“네?”

물음의 대상이 틀렸다. 아들인 대현그룹 부회장의 거취를 두고 그 의견을 나에게 물음은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 해도 해선 안 되는 질문이다.

“자네가 아는진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딱 두 가지 방법이 있네. 삼정그룹 회장처럼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든가, 아니면 나처럼 의심하든가.”

“…….”

“돈은 힘이네. 1억이 있으면 1억만큼의 힘이. 천억이 있으면 천억만큼의 힘이 있지. 그 힘을 확실한 곳에 휘둘러 더 큰 돈을 버는 건 조동욱 회장이고 난 다르네. 난 돈의 힘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정진수 회장은 마시던 빈 찻잔을 슥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네. 돈도,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같이 회사를 일으켰던 직원들도. 그 무엇도 믿지 않아. 그렇게 끊임없이 의심하고 저울질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네. 사람 좋은 웃음 뒤에 숨어서 말이야. 내 말뜻을 알겠나?”

“방도를 한번 말해보라는 뜻입니다. 대현그룹의 가정사에, 그것도 경쟁사의 후계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제가 고자질하듯 들고 온 정보와 그에 대한 조언 역시 믿지 않겠으니.”

“허허. 대들보가 맞구먼.”

“그리고 저는 아드님 일을 고자질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허락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허락을 구하기 위해 왔다. 내가 하는 행동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그대의 아들과 내가 지저분한 싸움을 하겠다는 허락을.

* * *

딸칵.

형광등 조명이 켜졌다.

“어휴.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 서재에 계셔요. 불도 안 켜고.”

늦은 밤까지 홀로 서재에서 상념에 잠겨 있던 정진수 회장을 아내가 다그쳤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빨리 들어오셔요. 내일 또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그래. 그래야지.”

“뭐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같이 산 세월을 헤아리기도 힘든 부부. 아내는 하나뿐인 남편의 근심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물었다.

“아니야. 내 금방 들어가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정진수 회장은 오랫동안 앉아 있어 저릿한 허벅지를 주무르며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갔다.

“여보.”

“왜요?”

서재 문을 대신 닫아주는 아내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여보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좀처럼 하지 못했던 정진수 회장이기에 아내는 짐짓 놀란 눈이 되어 그런 남편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사람 안 믿는다는 이야기했던가?”

“그걸 말이라고 하셔요? 매번 술 드실 때마다 처자식도 안 믿으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아주 대못을 박으셔 놓고선 새삼스레 왜 그러신대요.”

“믿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

“그게 누구길래 이 새벽까지 잠도 못 주무시고 계셔요, 그래.”

“있어. 남의 집 귀한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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