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클라이막스
쾅.
대현그룹 회장실 문이 거칠게 열리다 못해 벽에 부딪히며 쾅 소리를 냈다.
“아버지!”
“무슨 짓이냐?”
“아버지가 회계팀에 감사를 보내셨어요?”
“뭐?”
“아니죠? 하! 이놈들, 그럼 그렇지.”
아버지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본 정인성 부회장은 그대로 돌아 나가려던 순간.
“맞다.”
“네?”
“내가 보낸 게 맞다.”
“아버지께서... 왜요?”
‘설마 알고 계신 건가? ’
“왜냐니? 감사를 회계팀에 보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더냐?”
“그건 아니지만....”
정진수 회장의 눈이 차가워졌다. 나지막이 물어보는 상냥한 말투와 다르게 도저히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이라 할 수 없었다.
“허허. 외통수겠구나. 회계장부를 입맛에 맞게 다 조정해 놓으면 뒤탈이 없었을 것을 한창 작업 중에 감사가 들이닥쳤으니 말이야. 이름도 모르는 비싼 기계를 들인다고 적힌 구매명세서며 그마저도 제출예정으로 잡힌 굵직한 사업들에. 쯧. 안 봐도 훤하다 훤해. 호텔을 짓는다는 그런 헛소문을 믿고 이딴 일을 벌이다니.”
자신 역시 정도경영, 윤리경영 따위를 슬로건으로 내걸 만큼 정직하게 회사를 꾸려오지 않았다. 형제들과 지저분한 싸움을 하며 온갖 불법적인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으니까.
아버지의 회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그리했다곤 하나, 결코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끄러운 치부.
형제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수군거림을 들으면서까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마땅히 자신이 가장 출중한 능력을 갖춰서였다.
진흙탕 싸움을 시작한 것도 장자승계의 원칙을 깨고 자신에게 승계작업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먼저 칼을 빼든 쪽은 당연히 형제들이었고 그 처절하고 지저분한 싸움 끝에 누더기 같은 대현그룹의 회장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달라. 탐욕이야. 실력을 입증할 자리가 아니라 그저 뒷돈을 챙길 자리에 스스로 기어들어 갔고 결국 내 등에 칼을 꽂으려 했어. ’
노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회장직을 차지할 시도조차 하지 않은 장남이 이토록 괘씸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을까? 눈치만 보며 기회를 노리는 다른 두 아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아들을 향한 노기는 좀처럼 갈무리되지 못하고 주변 공기를 냉랭하게 만들었다.
“감사팀에서 걸리는 것마다 다 원상복구 시켜놓으려면 네 주머니에서 나온 돈만으로는 어림도 없을 게다.”
“아, 아버지! 그러면....”
“그래. 쇠고랑 차지 않으려면 받아 간 지분을 매각해야겠지.”
“그럼 현석이한테 회사를 물려주겠단 말입니까! 저를 놔두고요!”
“현석이도, 승훈이도 아니다.”
“네?”
“현석이, 네 둘째 동생이 해 먹으려던 돈을 채우려면 결국 자기 주머니에서 나와야 할 텐데 번 돈보다 많은 돈이 나오면 세무조사를 받아야 하니까 말이야.”
세상 이치가 그러했다.
컵에 물 한 잔이 담겼으면 도로 쏟았을 때 한 잔만큼의 물이 나와야 한다. 그 이상의 물이 나온다면 비정상적인 컵이다.
‘현석이도, 승훈이도 아니면 도대체 누구야? 아니 그보다 현석이도 같이 꾸민 짓인 걸 알고 있으셨나? ’
어설픈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혀, 현석이가 꾸민 짓입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미련한 놈!”
짝.
참지 못한 정진수 회장의 손이 아들의 뺨을 갈겼다.
“누굽니까? 누가 아버지께 보고한 겁니까! 현석이죠? 이 자식을 그냥!”
“접니다.”
“너, 너는!”
* * *
정진수 회장님의 부름을 받고 타이밍 좋게 들어온 회장실에는 무릎을 꿇은 정인성 부회장이 썩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 감사팀에 제보한 것도 접니다.”
“너, 너... 아니,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지금이냐니요? 회계자료가 조작되기 전에 잡아야 하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지금이 적기였다.
회계팀 사무실에는 은밀하게 받은 가짜 문서들과 그 문서에 맞게 수정된 원본들이 고스란히 쌓여있을 테니까 말이다.
구실 좋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회계팀에 출근하다시피 한 차재훈 부장 덕분에 너무도 손쉽게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결국, 네가 받은 돈이 가장 먼저 튀어나올걸?”
“아. 그 돈은 저에게 준 게 아닙니다. 아진건설은 이번에 새로 만든 농어촌 학교에 노후 한 시설을 정비하는 대현그룹의 사회복지법인입니다. 모르셨나 봅니다?”
“뭐라고?”
알 리가 없다. 사회환원사업으로 회장님이 사비를 털어 운영하는 작은 계열사에 별다른 홍보도 하지 않는 회사였으니.
나는 쪼그려 앉아 정인성 부회장과 눈높이를 맞췄다.
“푼돈이지 않습니까? 제가 그 돈을 받고 폭탄처리반이 되긴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뒤에 다른 사람이 있으니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거든요. 딸려 나오는 사람이 혼자는 아닐 겁니다.”
“너 이 새끼! 우리 회사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 주워 먹는 주제에 감히!”
팍.
난 정인성 부회장이 멱살 잡으려 내민 손을 그대로 뿌리쳤다.
“콩고물을 주워 먹어도 당신처럼 훔쳐먹진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저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겁니다. 제가 이 자료를 빼돌려 외부로 흘렸으면 곤두박질치는 주식을 피눈물로 처분해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순전히 회장님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똑똑.
“회장님 감사팀에서 나왔습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바로 들어오기 민망했던 직원이 문틀을 조심스럽게 두들기는 소리가 긴박한 회장실 분위기를 깨트렸다.
“때맞춰 왔군. 가서 다 실토해. 이 애비가 자식에게 주는 마지막 배려다. 그래도 대현그룹의 재벌가로는 살 수 있게 해주마. 대신 앞으로 회사에 양복 입고 출근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거라.”
다 끝났다.
감사팀을 따라 나간 정인성 부회장의 망연자실한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헛다리를 짚은 죗값으로는 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칼이 우리 마을과 회장님을 향했다.
그 대가로 저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손에 쥐었다 여긴 대현그룹의 회장직은 처음부터 정인성 부회장의 손에 들려있지 않았으니까.
“몬난 놈....”
“오늘은 말씀을 나눌 상황이 아닌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원 사람 급하긴. 이리 잠깐 앉지.”
폭풍이 쓸고 지나간 자리. 회장님은 소파에 앉은 나에게 커피조차 권하지 않으셨다. 평소라면 인자한 웃음으로 식사까지 하자 하셨을 회장님은 나를 앉혀두고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우선, 고맙네.”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 말대로 이 사실이 외부로 흘러 나갔다간 천하의 대현그룹도 크게 휘청거렸을 테지. 이리 조용하게 해결해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늙은이 눈을 깨워줘서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저 모질이 놈들을 그래도 핏줄이라고 여기 앉혀놨을 테니까 말이야.”
“저는 회장님의 아들들을 제 손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고마울 리가 있겠습니까?”
노여울 것이다.
금이야 옥이야 키우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친아들이다. 그 어느 부모가 아들을 주저앉히고 패륜 딱지까지 붙인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까? 분명 거짓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그렇지.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밉네. 허나, 내가 눈을 감을 때, 분명 자네에게 고마워했을 게야. 자식과도 같은 우리 대현그룹을 지켜줬으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들을 죄인처럼 끌어내린 장본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는 부모의 마음을 감히 예단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또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회장님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놓여있던 수첩과 펜을 드셨다.
“자, 우리 셈은 똑바로 하지. 그래, 내가 회사를 지켜준 값으로 뭘 주면 되겠나?”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자네다워. 하지만 장사꾼은 그런 사사로운 정을 싫어한다네. 물건을 받았다면 당연히 대금을 줘야 직성이 풀리거든. 언제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채권 추심만큼 불안한 것도 없으니까. 왜 웃나?”
“죄송합니다. 그런 부분은 조동욱 회장님과 너무 닮으셔서요.”
만류귀종.
모든 것은 극으로 가면 통한다 했던가?
출신도, 고향도, 성격도, 모두 반대인 두 회장님이 빚을 남기는 걸 끔찍이 싫어하시는 모습은 유독 닮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람 민망하게.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손님을 불러놓고 차도 한잔 안 내놨으니. 잠깐 기다리게.”
어색한 웃음이 한차례 지나고 회장님은 원래의 인자한 모습으로 돌아와 손수 차를 내리기 위해 다기를 꺼내셨다.
“아닙니다. 저도 이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자마자 달려왔다. 아직 회사에 오늘 할 일이 남은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 불편한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그래. 이거 내가 한창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했구먼. 미안하네.”
“아, 그리고 주제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저희 마을에도 늘 풍년이 드는 건 아닙니다.”
“응?”
“가뭄이 들고 과한 비가 내리면 애써 키운 쌀에 고구마며 파, 고추가 모두 물러터지지요. 하지만 한 해 농사가 망했다고 눈물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러터진 그 작물들이 거름이 되어 내년에는 풍년이 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죽하면 자식 농사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자식을 키우는 일은 씨를 뿌리고 정성껏 길러내는 농사와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끝에 맺는 결실이 노력과 정성에 못 미친다 하여 농사를 포기하는 농부는 없다.
회장님의 농사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 * *
정진수 회장은 착잡한 마음을 둘 곳이 없어 넓은 회장실을 서성였다.
아내의 뱃속에서부터 나온 자식들이 자라는 기쁨은 충분히 맛봤다. 다만 그 끝이 좋지 않았을 뿐.
그런 자신에게 삼정그룹의 대들보는 아직 끝이 아니라 했다.
100세 시대.
손자의 재롱잔치만 보고 가도 여운이 없다는 늙은이의 바람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손자의 결혼에 증손자까지 안아봐야 천수를 누렸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허허. 그래. 한 해 농사가 망하면 좀 어떤가. 아직 여물지 않은 종자가 셋인데. ’
장성한 손자는 분명 아들들과 다를 것이다.
아직은 구슬 로봇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자라 어른이 됨은 이미 한번 겪어보아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절망과 슬픔 뒤에는 희망이 남았다.
‘야속한 친구로세.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원. 참, 이럴 때가 아니지. ’
정진수 회장은 또 까먹을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기를 들었다.
“어, 비서실인가? 우리 MM 프로팀에 들어간 주식 말이야. 그거 양도를 조금 해야겠는데 관련 절차 좀 진행해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지분은 얼마나 양도하실 계획인지요? )
“25%만 남기고 다 넘기는 걸로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