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뜻밖의 휴가(3)
두 부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호텔 라운지에 있는 고급 철판 요리 전문점이었다.
일본 관광객이 많아 웬만큼 이름 있는 유명한 식당들은 일본식 요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가이드가 흘러가듯 이야기해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입구부터 화려한 포렴이 걸려 있는 모습이 영락없는 일식집이다.
“이랏샤이마세!”
문을 열자 과하게 활기찬 인사가 들렸다.
“들어가죠.”
“하하. 네.”
이 철판 요리점은 두 가지가 문제였다. 과하게 비싸다는 게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는 식사 시간이 길다는 점이다.
계란 하나도 그냥 까지 않고 못살게 굴다가 프라이를 만드는 퍼포먼스에 장인의 혼이 담겨 있을지는 모르나 이런 곳에 자주 오지 않는 나에겐 눈앞에 주방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자리다. 심지어 같이 있기 싫은 사람들과 함께다.
“여기가 예약제로 운영해서 쉽게 오기 힘들어요.”
“오빠가 여기 로얄멤버쉽이라 추가 인원도 특별히 가능하다더라고요. 호호호.”
“감사합니다.”
“자자, 좋은 인연으로 만났는데 술도 한 잔씩 해야죠.”
호방한 웃음과 함께 술병을 내미는 손엔 권유가 아닌 자연스러운 하대가 담겼다.
“그래, 일 때문에 오셨다고?”
“네. 뭐 확인차 온 거라 업무는 끝났습니다.”
“고생이 많네요. 참 나이가……?”
“88 용띠입니다.”
“어이쿠, 저런. 한창 회사에 중역으로 있어야 할 시기네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말하는 어조와 뉘앙스가 잘못되었다. 적어도 그 속뜻을 사람들에겐 말이다.
직역하자면 이 나이 먹고 별 볼 일 없는 단발성 해외 출장이나 다니니 네 처지가 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싱거운 술을 털어 넘기고 뭐라 주절거리는 말에 고개나 두어 번 끄덕이는 식사가 계속되었다.
내가 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는 고급 음식점들과 술집, 그리고 명품브랜드에 살 만한 가방까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신랑은 술이 들어갈수록 그 자랑이 심해졌다.
“민호 씨도 말이야. 크게 성공하려면 나처럼 과감하게 도전할 줄도 알아야 해.”
짐짓 어른스럽게 가르치려 드는 술주정 또한 진국이다. 제법 친분을 쌓았다 생각했는지 어느새 말투도 반존대로 바뀌었다.
과감한 도전은 개뿔.
IT기업을 운영한다 했지만, 실상은 어느 기관에 뒷돈을 대고 R&D사업이나 받아먹는 곳이었다. 이른바 세금도둑이다. 그럴싸한 성과를 내는 기업으로 포장해 사업비를 타내고 근무하는 인력 또한 그때그때 파견업체를 통해 사업 기간에만 채워두는.
SI업체에서 잔뼈가 굵은 나에겐 아무리 그럴싸한 말로 포장한다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아, 그리고 혹시 내일 시간 되나? 그래도 하와이까지 왔는데 차는 한번 몰아봐야지? 내일 우리 쇼핑센터 가는데 겸사겸사 같이 가지. 운전대는 내가 양보할 테니.”
“아닙니다. 내일 돌아갈 예정이라서요.”
인내심이 다한 까닭이다.
적당한 취기에 옆자리에 있는 아내에게 허세도 부릴 겸 나를 이용하는 것까지는 참고 넘겼으나 작정하고 운전기사로 부릴 작정이라면 굳이 참고 들어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철진이도 나와 같이 돌아갈 작정이니 혼자 여유로운 휴가를 즐길 계획도 모두 틀어졌다.
“응? 투어가 내일모레인데? 그리고 지금 비행기 표를 그렇게 바꿀 수가 있나?”
“저는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언제라도 그냥 떠날 수 있습니다.”
“이 사람 농담도. 전용기는 삼정그룹 회장님이나 돼야 타는 건데 그걸 무슨 수로.”
“제가 그 삼정그룹 회장님 비행기를 타고 왔거든요.”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부부에게 나는 손짓으로 철진이를 가리켰다.
“어? 어!”
“말도 안 돼…….”
대외적으로 아직까지는 삼정그룹의 장남이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서 스치듯 보면 어떨지 몰라도 직접 삼정그룹을 직접 언급한다면 철진이의 덩치와 얼굴을 못 알아볼 사람이 없다. 커다란 덩치와 굵은 눈매는 다른 재벌 2세들의 이미지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니 말이다.
“그리고 여기 식사는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작은 회사를 운영하시느라 빠듯하실 텐데 얻어먹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럼 즐거운 여행 되세요.”
“저, 저! 잠깐! 혹시 연락처라도 알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하하.”
“죄송합니다.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연락처를 드리기 힘들어서요. 그럼 이만.”
나는 배경을 밝히니 세상 다시없을 공손한 모습으로 변한 모습에 쓴웃음을 삼키고 자리를 떠났다.
장담컨대 저 부부는 결혼생활이 그리 순탄친 않을 것이다.
정상적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다른 사업을 굴릴 머리도 못 된다. 배경을 보고 결혼한 사이에 벌었던 돈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면 사랑이나 부부의 정 따위로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 때문에 연락처도 주질 않았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다며 찾아와 억지를 부린다면 거절당했을 때 자신의 무능함보다 손을 잡아주지 않은 나에 대한 원망이 더 클 사람이니까.
자신의 문제를 외부에서 찾고 종국에는 그 대상에게 원망을 가질 사람을 오늘 처음 만난 게 아니다.
“그런데 더 안 있고 내일 바로 가게?”
한마디도 없이 부지런하게 음식을 먹던 철진이 아쉬운 듯 물었다.
“너 때문이야, 인마!”
원래 목표는 철진이는 전용기에 태워 보내고 혼자 여유롭게 휴가를 즐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철진이는 내가 가라 한다 해서 혼자 떠날 모양새가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전용기가 하루 격납고에 들어가 있는 금액은 족히 수백일 것이다. 이놈의 고집 때문에 그 돈을 허공에 날릴 순 없다. 이런저런 상황이 겹치니 결론은 내일 떠나는 것이 가장 상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기념품이나 좀 사러 가자. 그래도 하와이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면 안 되니까.”
“내가 또 하와이 기념품 전문가지! 열 번도 넘게 왔다고.”
“쓰읍. 못 미더운데…….”
벌써 저녁이다. 아무리 관광지라지만 한국처럼 늦게까지 여는 가게가 없다면 낭패다.
그렇게 철진이의 당차면서도 얄미운 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우쿨렐레 연주가 은은하게 들리는 한 기념품샵이었다.
“여기에 없는 게 없어!”
“오! 웬일이냐? 이렇게 도움이 다 되고!”
사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철진이가 안내하는 것만으로도 신뢰도는 급격하게 떨어졌으니까. 그래서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따로 기념품 가게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몸을 옆으로 세워서 들어가야 할 정도로 빼곡하게 쌓여 있는 조각상과 열쇠고리, 냉장고 자석에 꽃무늬가 가득 들어간 티셔츠도 모두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마디로 노다지다.
“이건 상진이 거, 이건 지환이 거…….”
오밀조밀하게 진열되어 있는 형형색색의 기념품들은 종류별로 하나씩 사지 않고선 배기지 못할 정도로 구매욕을 심하게 자극했다.
“아! 설란이는 뭘 사주지?”
“그냥 아무거나 사주면 안 돼?”
“나 없는 동안 누렁이 봐주기로 했어. 그래도 신경 써서 챙겨줘야지.”
“저거 어때?”
“오!”
철진이가 가리킨 곳에는 커다란 서핑보드가 세워져 있었다.
하와이는 서핑의 천국이다. 가격이 조금 나가 보이지만 이보다 더 하와이에 어울리는 기념품은 없다.
“그런데 설란이가 서핑을 할까?”
“형, 저런 건 서핑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인테리어로 쓰려고 사는 거야. 센스 없긴.”
“그렇지?”
분명 그랬다. 저 정도 크기면 세워놓기만 해도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이다. 인테리어 소품 하나로 집안이 하와이로 변하는 마법이 펼쳐진다.
“그래도 여자니까 핑크색으로 사자.”
“당연하지. 이 형이 이런 쪽에 또 감각이 남달라. 기억해라. 여자는 무조건 핑크색이랑 꽃무늬야.”
만고의 진리다. 남자는 파랑, 여자는 핑크. 거기에 센스를 더하면 꽃무늬다.
그렇게 나는 한참 동안 물건을 골라 담기 바빴다. 바구니에는 알고 지낸 고마운 인연들만큼 기념품들이 채워졌다.
“형, 그런데 이거 다 들고 갈 수 있어?”
“왜 그걸 나한테 물어봐? 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지.”
“어?”
오늘은 든든한 짐꾼도 있으니 숙소까지 무겁게 들고 갈 걱정도 없다.
* * *
“알아봤나?”
“네. 여기 있습니다.”
대외비라 붉은색으로 적힌 봉투가 봉인지에 몇 겹이나 싸여 조동욱 회장의 손에 들어왔다. 조동욱 회장은 그 봉투를 열지 않고 그대로 책상 서랍 가장 깊은 곳에 넣었다.
“이봐라.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리모 이래 구질구질해지는 기라.”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감청은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대현그룹 비서실을 통해 흘러나온 정보입니다. 정진수 회장에게 알리지 않아도 될까요?”
“끌끌. 아들 단도리도 못 해가 엄한 동네 쑤시놨으모 지가 책임을 지야 안 되겠나? 그래, 자기 발로 와서 이걸 넘깄다고?”
“그렇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이 살 방도라 일러준 사람이 그리하라 했답니다. 뇌물까지 받고 거짓 정보를 흘린 꼴이 되었다면서요.”
“글마 대현그룹 비서실 사람이라 캤제?”
“장설우 과장입니다. 비서실 내에 정인성 전 부회장의 직속 라인으로 지금은 대기발령 상태입니다.”
“그런 아가 멍청하게 돈을 받고 주인을 물진 않았을 끼고.”
“받았을 겁니다. 저도 받았으니까요.”
조동욱 회장은 눈을 크게 뜨고 박 상무를 바라봤다. 그리고 돈을 준 사람이 누군지 그제야 떠올랐다.
안기부 출신으로 은밀한 일 처리와 더해서 국내외를 통틀어 빼오지 못할 정보가 없는 인물이었다. 철저히 검증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조동욱 회장도 박 상무의 말만은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런 박 상무가 유일하게 적수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절마를 보낸 기 문방구라꼬?”
“정황상 그렇습니다. 민호 군이 관련해서 별다른 말을 남기진 않았습니까?”
“어데. 아쉬운 소리는 내가 다 했지. 그래가 하와이까지 안 보냈나.”
“어떻게 할까요?”
“끌끌. 우야기는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잘 가리키봐라. 딴살림 차리는 아라고 가려서 알려주지 말고. 우리 쓰는 장비도 다 챙기줘라.”
“지시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한시름 놨고마. 아 착해빠지가 큰 사업하는데 또 인정이니 뭐니 하믄서 밥그릇 간수도 못 하는 기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데 민호 군이 그런 일을 시킬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지. 이놈 저놈 다 챙기가미 지 쌈짓돈까지 풀어재끼는 마당에 남의 등에 꽂을 칼을 키우는 기 말이 안 되지.”
“그럼…….”
“진수 글마 아들들 지금 뭐 하고 있다드노?”
“세 명 모두 지분은 다 정진수 회장에게 넘기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합니다.”
“니도 그런 아들 숱하게 봤을 거 아이가. 하루아침에 지 회사를 홀라당 뺏기뿟는데 그 원망이 어디로 향하겠노? 뭔 수를 써서라도 문방구한테 해꼬지를 하고 싶을 끼라. 문방구도 그걸 아는 기고. 그라이 뭐 캐낼 생각 말고 고마 알려줄 거나 잘 알리줘라.”
“저는 민호 군이 절 생각해서 괜찮은 후임 하나 보낸 줄 알았지 뭡니까?”
“애끼! 아직 은퇴할라모 20년은 남았구마!”
“어휴. 요샌 바짝 벌고 일찍 퇴직하는 게 트렌드입니다.”
“끌끌. 실없는 소리.”
아무래도 좋았다. 정년을 앞두고 20년이란 세월을 들먹일 만큼 두 사람의 열정은 아직 청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