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신입사원(1)
“젠장. 진짜 1박 2일로 다녀올 줄이야.”
“그러게 좀 더 있자니까.”
“시끄러워. 너 때문이잖아!”
여긴 공항이다. 김포공항.
출발한 지 정말 이틀 만에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이다. 두 장정이 양손 가득 들어도 모자랄 선물을 들고서.
하와이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기에도 뭣한 게 와이키키해변을 걸으며 휴가 기분을 만끽한 시간은 충분했다. 하와이에 가면 으레 봐야 할 파인애플 농장이나 새우 트럭, 원주민 공연도 놓쳤지만, 난생처음 가보는 휴양지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눈에 원 없이 담았다.
또 언제 올까 싶은 지상낙원을 직접 보고 걸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비행기 푯값, 호텔까지 모두 회장님의 내주셨고 내가 쓴 돈이라곤 기껏해야 밥과 맥주, 그리고 양손 가득 들린 기념품이 전부다.
“문방구로 갈 거지? 나도 같이 가.”
“넌 안 돼. 따로 갈 곳이 있잖아. 자.”
나는 철진이에게 면세점에서 산 양주 한 병을 들이밀었다.
“이건 내가 타고 갈 거니까 넌 뒤에 택시 타.”
내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은근슬쩍 택시에 같이 타려는 철진의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상진이도 문방구로 오라고 하면 되는데…….”
탁.
시차 적응도 하기 전에 여독만 쌓아온 마당에 녀석들과 뒤풀이를 할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구시렁 대는 철진이를 세워두고 나는 미련 없이 택시 문을 닫았다.
“철진아.”
“왜?”
행여나 다시 내가 말을 바꿀까 싶어 얼른 돌아본 철진이에게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다 풀고 와.”
철진이가 후계자 구도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한들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상진이었다면 그런 승부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을 테니까.
철진이에게도 시간이 약이라는 두루뭉술한 핑곗거리로 맺음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결코 좋을 리 없다.
* * *
철진은 그길로 곧장 상진이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32,000원입니다.”
말 몇 마디와 술 한 잔으로 풀릴 응어리라면 이렇게 피하지도 않았을 갈등이다. 택시에 올라서도 마땅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끙끙 앓다 보니 어느덧 삼정건설 본사에 차가 멈췄다.
“여기 거스름돈 18,000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철진은 주섬주섬 거스름돈을 챙겨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평소 같았다면 오만 원짜리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기 귀찮아 나머지는 팁이니 그냥 가시라는 말을 했을 테지만 민호의 문방구에 출근 도장을 찍던 날부터 철진의 씀씀이는 극단적으로 인색해졌다.
하루에 허락된 돈은 고작 천 원.
그 천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기에 철진뿐만 아니라 상진과 지환도 더 이상 비싼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수십, 수백만 원씩 쓰질 못하는 비슷한 처지였다.
그렇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철진의 차림새 또한 가관이었다. 허벅지 두께 때문에 터질 듯한 반바지와 발가락 슬리퍼,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하와이에 다녀왔다는 티가 팍팍 나는 요란한 무늬의 티셔츠까지 걸친 철진은 단정한 검은 양복을 입은 직원들 사이를 지나치며 시선을 한몸에 끌었다.
벌컥.
상진의 사무실 문이 노크도 없이 활짝 열렸다.
퍽.
상진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뜸 걸어와 그 불청객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무슨 짓이야?”
맞은 사람이 해야 할 질문이 반대로 때린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그러게.”
터진 입술을 손으로 슥 문질러 피를 닦아낸 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에 앉았다.
“자, 선물.”
“이러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어? 쇼핑센터처럼 그냥 다 남기고 떠나면 내가 얼씨구나 하고 받아먹을 줄 알았냐고!”
쨍그랑.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사람이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선물이랍시고 올려둔 양주병을 상진이 내던졌다. 병이 깨지며 독한 술이 마르는 냄새가 냉랭한 공기에 더해졌다.
“기억나? 아버지가 우리 요만할 때부터 이번엔 네가 이기고 그다음엔 내가 이기고 줄 세우기 하셨던 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 딴에는 다른 재벌 2, 3세들처럼 술과 여자에 찌들어 허송세월을 보낼까 싶으셨는지 무던히도 자신들을 몰아세우셨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삼정그룹의 총수이자 아버지의 명령으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회사에 들어와 굵직한 계열사에 과한 업무를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두 아들을 저울대 위에 올려놓은 꼴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형과 동생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했고 무의미한 적개심을 마치 쓰지 못할 적립금을 쌓는 포인트 카드처럼 차곡차곡 쌓아왔던 것이다.
“난 감이 좋았어. 내가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그래도 해야만 했어. 식구들이 있었으니까. 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그 사람들한테 차마 내가 질 것 같은 싸움이니 끝이 좋지 않을 거다, 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
같은 피를 물려받았으나 그 능력마저 똑같이 물려받지는 못했다.
아무리 비싼 과외 선생을 써도 성적은 바닥을 찍었고 대학조차 수십억짜리 건물을 지어준 대가로 졸업장을 겨우 받았다.
동생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명문대학 수석 졸업도 모자라 MBA 과정까지 수료한 동생 쪽으로 저울은 확실히 기울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회는 동등하게 내려왔다.
동생에게 곧 후계자 수업이 시작되리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같은 직책에 비슷한 사업들을 과한 직책을 받아 맡게 된 것이다. 남들은 평생을 가도 명함에 박지 못하고 퇴직하는 직책을 명패에 세기고서.
‘원치 않는 기회였지만 말이야.’
팀원들이 생겼고 그 팀원들조차 원치 않는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렇게 결말이 정해진 싸움을 희망이 있다 다독이며 지금껏 불편한 진실을 감춰왔다.
“이제 다 내려놓기로 했어.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그래서 다 버리고 가겠다고? 비겁하게!”
“나도!”
잠자코 듣고 있던 철진이 소리쳤다.
“나도 야망이 있어! 너 못지않게 이기고 싶고 이 회사도 가지고 싶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이냐고!”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야망도 꿈도 접고 인생에 한 번,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말이야.”
‘가족의 소중함도.’
철진은 차마 낯간지러워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나 취업했어.”
“뭐? 어디로?”
“민호 형 회사로.”
“그게 하고 싶은 일이야? 삼정그룹 후계자 자리까지 버리면서?”
“뭐 일단은. 무슨 일을 할진 모르겠지만. 난 할 말은 다 했으니까 간다.”
맥이 풀려 대꾸할 기력도 없이 앉아 있는 상진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선 철진은 그제야 민호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다 털어내고 나니 진짜 미련이 없어졌네.’
상진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아쉬운 마음도,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앞으로의 삶도 그렇게 털어내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마치 꾸지람을 들을 일을 감춰두다 생각지도 못하게 들킨 어린 시절처럼.
* * *
주인이 집을 비운 문방구는 놀랍도록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문은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듯 활짝 열려 있었고 평상 위에 미니카 트랙과 짤막한 화면을 반복해서 틀어주는 오락기도 그대로다.
“야옹!”
“그걸 그새 다 먹었어? 다른 애들은 배부르면 그만 먹는데 넌 왜 그래, 정말?”
설란은 볼살이 통통하게 올라 심통이 가득한 표정이 된 누렁이가 곁에 오자 자연스럽게 품에 안았다.
민호가 없어도 문방구가 예전 모습을 유지하는 비밀은 다름 아닌 설란의 출근이었다.
자율 급식이 안 되는 누렁이를 위해 민호가 특별히 설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윗집 할머니와 이장님도 계셨지만, 화장실까지 치워야 하는데 차마 그런 일을 어르신께 맡길 순 없었던 민호의 궁여지책이었다. 가장 가까이 살기도 했고 수의사니 누렁이에 대해서도 오히려 민호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민호에게 빚을 만들어 둘 뿐만 아니라 민호의 은밀한(?) 방에 공식적인 방문을 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단번에 그러겠다 확답을 한 설란은 오늘도 최선을 다해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슥슥.
민호가 매일 아침 그랬던 것처럼 빗자루가 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기껏해야 노래 한 곡이 끝날 때쯤이 되면 마당 쓸기가 마무리되는 민호와는 달리 한참이나 빗질이 계속되었고 마치 땅을 파낼 듯이 같은 곳을 과하게 쓸며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또 우렁각시처럼 와서 청소하는 겨?”
“하이고매, 정성이여, 정성!”
“어머, 아니에요.”
어르신들의 넘겨짚는 추측에 설란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적극적인 해명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앞치마와 머리에 두건을 쓰고 광고라도 하듯이 밖으로 나와 청소를 하는 모양새는 어르신들의 눈에 보기에 영락없는 조강지처 새색시나 다름없었다.
“호야도 참 복 받은 겨. 색시가 얼굴도 이쁘장혀, 어른한테 잘혀, 아 어디 우리 마을에서 전파상집 딸내미보다 잘난 처자가 있냐 이 말이여!”
없다.
정확히는 마을에 혼기가 찬 유일한 여자는 설란뿐이었다. 애초에 비교할 대상조차 없었다.
“그럼 우리 국수는 언제 먹나?”
“하이고, 젊은 아들이 알아서 어련히 잘할까? 때가 대믄 하것지.”
“그럼 여짝 마을 회관에서 하는 겨?”
“이이. 주례는 이장이 맡고 그럼 되겠고먼.”
“아, 결혼식 하다 돌잔치까지 할 일 있남? 이장 놈이 맡으면 언제 끝날 줄 알고?”
“그건 그려. 깔깔깔. 그럼 우린 가볼 텡께 수고하드라고.”
“안녕히 가세요!”
아무리 수다를 좋아하는 어르신들이라지만 추수로 한창 바빠지는 초가을 귀가길이다. 온종일 수구려 앉아 밭일을 했던 고단한 몸은 잠깐의 수다보다 휴식이 더 간절했다.
“좋았어.”
대관절 무엇이 좋았고 왜 시키지도 않은 청소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는 모를 일이나 할머니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설란은 얼른 빗자루를 집어넣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자, 오늘도 조금만 해볼까?’
짤그락. 드르르륵.
오락기에 동전을 넣은 설란은 익숙한 동작으로 떨어지는 괴돌이를 받아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제 이것만 오빠한테 이기면 돼.’
계획은 그러했다.
요즘 들어 방문이 뜸해진 세 사람이 없는 틈을 타, 민호에게 퀸오브파이터 대결로 밥이나 술을 조건으로 걸 작정이었다. 지금껏 계속 패배하긴 했으나 한 끗 차이였고 어째서인지 민호는 승부만큼은 절대 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승패에 상관없이 내기가 걸린 대결만 하면 돈을 자신이 내더라도 쉽게 원하는 데이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승부에 이긴 민호의 대인배스러운 면모였다. 사력을 다해 이기고서도 괜한 돈을 쓰지 말라며 말리거나 혹은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곧잘 하곤 했으니 기껏 좋은 기회를 잡고도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승부에서 이겨 정당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해가 질 때까지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던 설란의 뒤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