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신입사원(2)
“오빠?”
“뭐 해. 죽겠다. 빨리 스틱 잡아.”
“으, 응.”
나는 멍하니 바라보는 설란을 다그쳤다.
타닥. 타다닥.
잠시 멈춰서 컴퓨터에게 실컷 두들겨 맞던 설란의 케릭터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체력이 많이 달아 불리한 싸움이었으나 설란은 침착하게 게임을 풀어나갔다.
“역가드를 노려야 해. 짤짤이로 가드 풀려면 한세월이야.”
“으, 응.”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차근차근 컴퓨터를 이겨가던 설란이 마침내 마지막 보스까지 잡아내고 이니셜을 당당히 새겼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일이 금방 끝나서.”
“일?”
“겸사겸사 간 거라 마냥 놀지는 못했어. 참, 없는 동안 누렁이 맡아줘서 고마워.”
구구절절 설명하다간 기약 없는 대화가 될 것 같아 얼른 선물을 내밀며 화제를 돌렸다.
내가 설란이에게 안긴 것은 서핑보드였다.
그건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념품이라기엔 너무나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겁고, 그리고 화려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극상의 선물이다.
“이, 이게 뭐야? 아니, 이걸 왜?”
“얼마 안 하는 거야. 부담 안 가져도 돼.”
사실 꽤 비싼 물건이다. 기껏해야 10만 원쯤 하지 않을까 하는 내 안일한 판단으로 덥석 집었으나 실제 가격은 30만 원을 웃돌았다. 덕분에 세관에서 자진신고서를 작성하느라 왜 그렇게 많이 샀냐는 철진이의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운 선물이다. 선물이라 함은 본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기뻐야 하기에 돈이 아깝지 않았다.
“차에 안 들어가니까 내가 묶어줄게.”
공교롭게도 내가 고른 서핑보드는 뒤늦게 검색해보니 롱보드라는 서핑보드 중에서도 가장 큰 종류였다. 어지간한 차 트렁크에는 들어가지도 않는 바람에 택시를 탈 때도 노끈으로 지붕에 묶어서 가져올 수 있었다. 당연히 나도 그렇게 옮겨야 했기에 택시기사님이 묶는 방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봐두었다.
“오빠, 이거 조금 크지 않아?”
“매장 직원이 그러는데 이거 산 사람은 내가 처음이래. 계속 이거 진짜 살 거냐고 물어보더라. 무늬도 이쁘지?”
선물을 주며 구구절절 사족을 붙이는 것만큼 모양새가 빠지는 일도 없다지만 주책맞은 자랑은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왔다.
“자, 됐다.”
“고, 고마워.”
“고맙긴. 내가 고맙지. 그래도 이렇게 근처에 살고 있어서 든든하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란이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늦었는데 밥 먹고 갈래? 배달 오는 곳이 족발집밖에 없는데 그래도 먹을 만해.”
“아냐! 나 가볼게!”
황급히 손사래를 친 설란은 곧장 차에 올라타고 시동을 걸었다.
“그래, 일하고 곧장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빨리 가서 쉬어. 나중에 같이 밥 먹자. 애들도 불러서.”
고개를 작게 끄덕인 설란이 무엇이 그리 바쁜지 창문도 올리지 않고 흙먼지를 휘날리며 떠났다.
그리고 나는 다시 홀로 남았다. 고즈넉한 시골 문방구에.
“야옹!”
“그래. 너라도 있으니까 조금 낫네.”
여독이 쌓인 터라 샤워를 하고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은 노곤함은 불현듯 찾아온 정적에 잠시 무뎌졌다.
“어디~ 보자~ 맥주가……”
샤워를 마치고 조금 쌀쌀한 공기를 맞으면서도 나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찾았다. 그렇게 맥주 두 캔과 변변찮은 문방구표 과자가 안주로 올라간 소박한 술상이 금방 완성되었다.
(안녕하세요. 무릅의 철건입니다. 오늘 게임은…….)
아직 꺼내긴 이르다 싶은 두꺼운 극세사 이불과 소박한 술상이 더해진 너튜브 영상.
휴가는 이런 게 휴가가 아닐까?
맥주가 시원하게 넘어가는 좋은 날이다.
* * *
덜컹덜컹.
“어휴, 정신 나간 년. 또 날 좋다고 퍼마셨지! 뭐, 뭐야?”
“안 마셨어! 보지만 말고 좀 도와줘, 아빠.”
또 비밀번호를 못 누를 정도로 술에 취해 돌아왔겠거니 하고 현관문을 열었던 박씨 아저씨는 눈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상황에 하마터면 다시 문을 닫을 뻔했다.
문 앞에 있는 건 엘리베이터까지 들고 탄 게 용할 정도로 커다란 나무판이었다. 핑크색 꽃무늬가 들어간, 출처와 용도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무판.
어떻게든 열린 문으로 그 나무판을 쑤셔 넣기 위해 애쓰는 딸을 도와 엉겁결에 안으로 들인 박씨 아저씨는 나무판과 딸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 웃지 못할 사태를 설명해 달라 무언의 압박을 딸에게 가했다.
“흐음~ 흐음~”
하지만 딸은 정말 술을 거나하게 마셨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흉물스러운 나무판을 정성스럽게 닦는 중이었다.
“이게 뭔데, 도대체!”
“혼… 수?”
“술 취한 거 맞네.”
“안 마셨다니까!”
* * *
9시 50분. 출근 시간에서 무려 20분이나 지났다. 하지만 나는 회사 건물 밖 주차장에서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빡빡한 직장생활이다. 사람이 어떻게 지각 한번 없이 회사를 다닐 수 있던가?
어쩌다 꺼진 폰알람, 새벽까지 울어대던 아이로 밤잠을 설친 날 등등. 변명거리로 하기엔 민망한 일로 이따금 지각하는 사람이 바로 오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내가 매일 10시 언저리에 출근하는 이유였다.
가뜩이나 남양주의 변두리 건물이라 차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한다. 상사가 정시에 사무실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 직원들은 10분, 20분 전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한다.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을 아무리 해봤자 대한민국의 직장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구단주님.”
“다들 반갑습니다.”
“이번 주는 휴가 아니셨습니까?”
“아, 조금 일이 있어서 금방 돌아왔습니다. 이거 하와이에서 사 온 기념품입니다. 다들 나눠 드세요.”
나는 진짜 하와이산인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맥주 안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던 말린 코코넛을 회의실 테이블에 가득 올려두었다.
“혹시 제가 없는 사이 보고받을 일이 있을까요?”
“여기 보고서에 요약해 두었습니다.”
차재훈 부장이 공손히 건네준 문서들은 불과 이틀 사이에 쌓였다기엔 그 두께가 제법 있었다.
차재훈 부장과 하시모토 부장 투탑 체재로 우리 구단은 운영되고 있다. 대외 활동에 있어서 하시모토 부장이 일본어가 가능한 직원 한 명과 같이 뛰고 있다면 내부 운영은 차재훈 부장이 모두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짧은 내 근무 시간에 맞춰 조리 있게 요약된 문서들은 반나절의 근무 시간 내에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반즈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납기일에 맞춰서 애니메이션 제작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일로 하시모토 부장이 일본 방송국 채널과 방영 일자를 조율하고 있습니다.”
“한국은요?”
“공영방송과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들도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가격 조율만 잘한다면 모두 별다른 문제가 없는 한 계약이 가능합니다.”
“다행이네요. 가장 걱정하던 문제였는데 말이죠.”
한시름 놓았다.
유럽과 미국 시장까지 동시에 노리기엔 우리 역량이 한참 부족했다. 확신이 있으니 따로 업체를 끼고 크게 벌여도 될 만한 사업이지만 정작 그렇게 애니메이션이 성황리에 세계로 방영되는 김칫국을 마셔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였다.
우리가 확보한 생산라인과 유통라인은 그리 탄탄하지 못한 까닭이다.
당장에 한국과 일본 시장을 중점으로 노린다 해도 그 수익이 막대할 테니 천천히 공략해도 늦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두 시장의 홍보 계획이 순조롭다 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그런데 방영 일자는 맞춘다 하더라도 직접 확인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반즈에서도 구단주님이 직접 오셨으면 하던 눈치였습니다.”
“제가 가서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한들 변경이 가능하겠습니까?”
“하하. 그렇진 않지요. 다만 그 마사키 감독이 너무 열정적으로 와달라 청하기에 말씀드렸습니다.”
“감독님이요?”
“구단주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다고 아주 성화입니다. 그래도 한번 가보심이 어떠실지요?”
“시간을 봐서 한번 가보겠습니다. 이번 주는 조금 힘들 듯합니다. 저도 나름 쌓인 일이 있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더 큰 실례입니다. 제가 직접 출발 날짜를 정하고 연락하겠습니다.”
오카다 마사키 감독과 반즈의 회장 마지로 준이치.
우리 회사에 운명을 같이하겠다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사람들이다.
비지니스에 사람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때와 상황이 바뀌었다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세계다. 믿음과 신뢰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오로지 책임자의 사인이 들어간 문서만이 서로를 믿게 해줄 최소한의 장치다.
하지만 내가 수십억에 웃돈까지 더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받은 서류는 계약서 한 장이 전부다. 상주하며 제작 공정을 확인할 인력도, 매주 진척도와 샘플 영상이 첨부된 주간보고서 역시 보내지 말라 했다.
경영인으로 이보다 더 무책임한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을 믿었다.
돈만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가족끼리도 돈 앞에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판국에 그깟 자존심이 대수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은 달랐다.
고개를 숙이는 대상은 소위 쩐주라 칭하는 내가 아니었다.
착실히 쌓아왔던 커리어도 내던지고 작품을 다시 그리겠다 한 마사키 감독은 자신의 열정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반즈의 준이치 회장은 그런 감독에게 회사의 명운을 맡겼다.
결과가 잘못된다 한들 그 과정에 후회는 없을 눈빛을 하고서.
그런 두 사람이 나에게 와달라 청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는데 이리 청함을 외면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아무래도 풀었던 캐리어를 다시 싸야 할 모양이다.
“그리고 시제품 테스트 결과 보고서는…….”
끼익.
차재훈 부장의 보고는 노크도 없이 불쑥 사무실로 들어온 불청객에 의해 잠시 멈췄다.
남들보다 머리 반 개는 더 높은 키, 그리고 그 키에 걸맞은 울퉁불퉁한 근육들은 정장을 금방이라도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과한 볼륨감을 자랑했다.
불청객의 정체는 바로 철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입사한 조철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가 왜? 아니, 입사를 했다고? 언제?”
전혀 만나선 안 될 자리와 시간에 온 것도 모자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인사로 내뱉는 철진이에게 나는 어떤 부분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몰라 겹겹이 쌓인 질문을 속사포처럼 쏘아냈다.
“형, 아니, 구단주님께서 그러셨지 않습니까. 우리 회사 직원이라고.”
“야! 내가 언제…….”
‘안녕하세요. 아, 이쪽은 먼저 파견 온 저희 회사 직원입니다.’
했었다.
허세 덩어리였던 두 부부에게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면서 말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부른다. 그리고 종국에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파국을 만든다.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스치듯 던졌던 작은 거짓말은 그렇게 태풍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