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02)화 (102/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02화

16장. 예능은 처음이에요

아이돌 커뮤니티 그린 룸.

새벽 무렵, 베스트 게시판에는 어느 신인 아이돌 멤버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오늘 PBS 다큐에서 의인으로 나온 아이돌 멤버

-뭔가 이력이 희한한 신인 남돌

-뉴블랙 우주 관련 정리글.txt

사건의 발단은 포털 메인에 걸린 기사.

한 아이돌 멤버의 기묘한 행적이 주말 새벽을 불태우는 이들의 관심거리였다.

-아니.. 그니까 작년 수능 의인으로 유명했던 애가 아이돌하는 건 알겠는데.. 타임라인이 어케 되는거야?? 수능 끝나고 바로 회사 들어갓는데 3개월 후에 썸씽이 나온 거라고?

-ㅇㅇ 그거 맞음

-장소원피셜로 썸씽 공동작곡이라며

-그리고 데뷔는 6월달에 한 거고? 7개월 만에..??

-뭐지.. 이거 나만 정리가 안 되나

현재 아이돌 팬들 중에 뉴블랙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올해 데뷔한 아이돌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해 봄 최고의 히트곡인 썸씽 활동.

첫 데뷔 타이틀 ‘불꽃놀이’ 7월 월간차트 순위 54위.

뮤직비디오 누적 조회수 백오십만.

최근 국민예능 출연과 교복광고 CF까지.

대중적 인지도와 별개로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는 주목할 만한 결과였다.

벌써부터 올해 보이그룹 신인상은 뉴블랙이 아니겠냐는 예측이 나올 정도.

하지만 그룹의 유명세와는 별개로 개별 멤버에 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사실 관심이 없었다.

그냥 ‘잘생긴 애들이네’의 감상뿐.

하지만 오늘은 평소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뭔가 이상한데..

-진짜 이상함

-저게 이 짧은시간동안 다 일어난거야?ㅋㅋㅋ

작년까지는 수험생이었다더니, 올해 2월에는 썸씽이라는 노래를 들고 나왔다.

그러곤 뮤직카페에 출연해서 아버지가 세계적인 유명 피아니스트임을 알리고.

거기다 썸씽과 불꽃놀이, 뒤이어 밤바다로 이어지는 자작곡 라인업까지.

하나씩 들었을 때는 ‘오. 신기하네’ 정도였지만 그걸 모아 놓으니 이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었다.

퍼즐 조립과 같았다.

한 조각씩 모아서 전체를 완성했는데, 그 완성 그림의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랬기에 한 수플레가 정리한 글은 순식간에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뉴블랙 우주 관련 정리글.txt]

궁금해하는 룸메들 많아서 뉴블랙 덕이 정리해 왔어!

1. TJ에서 6년 정도 연생이었대. 본인 피셜 방출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사정은 몰라ㅇㅇ 본인이 언급을 꺼려서

2. 방출 후 군대 갔다가 제대했는데 수능날 저 할아버지 구하면서 못 봄.

3. 수능 당일 아는 매니저한테 레몬 엔터로 영입 제안을 받음

4. 이후 월말평가 때 심사위원으로 만난 장소원이 우주 편곡능력을 눈여겨본 다음 픽업했다고 함 (뮤직카페 오피셜)

5. 그 계기로 장소원이랑 뚝딱 만들어서 나온 게 Something.

6. 썸씽 잘 되고 나서 회사에서 작업실도 주고 수록곡 만들어보라고 했는데.. 노래가 너무 잘 뽑혀서 타이틀 됨. (불꽃놀이)

7. 라디오 출연 기회가 잡혀서 노래를 한 번 급조하기로 해서 데모곡 들고 나가서 라이브 했는데 반응이 좋았음. 이게 바로 지금 음원차트에 있는 밤바다.

8. 그 뒤로 주세한, 광고, 다큐 등은 다들 알 거라고 생각해서 생략했어..!

우리 애들 떡밥도 진짜 많아서 다 말해주고 싶은데 별루 안 조아할 거 같아서.. 라방 몰카도 있구, 자체 리얼리티두 있구, 행사 땜빵 에피소드도 있구.. 펭귄 공약도 있구..

암튼 되게 많아

두서없이 글 쓴 거 같은데 마무리는 애들 짤로 마무리할게!! 우리 뉴블랙 애들 다 좋게 봐줬으면.. ^_^

뉴블랙 멤버들의 짤이 주르륵 이어진 후, 댓글란은 펄떡이는 이들로 만선이었다.

-ㅋㅋㅋㅋㅋㅋ뭐야

-그러니까 이게 다 6개월 안에 일어난 일이라는거지?

-이거 진짜야?? ㄹㅇ?

-ㅇㅇ 진짜임..

-보면서 존나 의심했다 진짜..

-무슨 독재자 연대기인줄ㅇㅇ 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나

-아니.. 건조하게 사실만 쓴 거 같긴 한데 왜 안 믿기냐

-얘넨 뭘 이렇게 많이 했대?

-올해 데뷔한 남돌 중에 젤 바쁜 듯. 얼마 전에 동네 행사에서 봤닼ㅋㅋㅋ 쟤 실물 대박임 카메라로 보이는 거랑 확 달라

-일단 다들 데뷔초 굴욕샷이 없다는 것부터가 신기함

-TJ 출신이었구나.. 그건 납득이 가네. 어쩐지 퍼포할 때 쟤랑 다른 멤버 존나 시강이더라

-ㅇㅇ 6개월 연습해서 되는 실력이 아닌데 깜놀

-그런데 저런 애를 왜 방출했지..?

-이야 규호는 진짜 양심이 있으면 쟤가 있는 방향으로 하루에 절 세번씩 해라

-규호의 양심은 머리털과 함께 사라졌다는게 학계의 정설

순식간에 200개가 넘게 돌파한 댓글.

뉴블랙에 관한 영업글 중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   *   *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세상은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라면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내 인지도가 확 올라간 것 정도?

회사 홍보팀에서 보내준 링크를 보고 놀랐다.

아이돌 커뮤니티에 나에 관한 글이 주르륵 올라와 있었으니까.

그런 류의 집중적인 관심은 처음이었다.

악플에 별로 면역이 없는 터라 손을 달달 떨어가며 댓글을 확인했는데 대부분 호기심 어린 반응이거나 좋은 내용이었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있고.

하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선우주가 아니라 뉴블랙이 유명해지는 결과였으니까.

아이돌은 그룹 활동이다.

가뜩이나 밤바다를 리혁이랑 둘이 부른다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이번 광고와 다큐, 주세한을 거치면서 나에 대한 관심만 늘어나니 조금 아쉬웠다.

이번 주세한 특집에서는 골고루 관심을 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겼다.

새벽 4시 반.

검푸른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거실에 앉아 캐리어를 펼쳐뒀다.

세면 용품도 담고, 속옷도 담고, 갈아입을 옷도 담고.

“이거도 넣어 주세여, 형.”

양말을 턱 끝까지 쌓아올린 막내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뭘 넣어 달라고?”

“제 양말이여.”

“넌 무슨 양말 장사하러 다니냐.”

“그래서 넣어줄 거예여, 말 거예여?”

“우리 막내, 여기 ‘SWJ’라는 이니셜은 보이니?”

“‘선우주 왕 찌사해’의 약자인가여?”

“절대 안 넣어 줄 거야, 네 거.”

넣어줬다.

어찌나 짐이 많은지 제 가방에 안 들어가는 걸 죄다 형들한테 떠넘기고 있었다.

“아, 떨린다.”

중현이가 더플백에 옷을 넣으며 내뱉은 말에 내가 물었다.

“너도 떨려?”

“네. 간만에 농촌에 간다니까 설레네요. 나무 냄새도 그렇고, 향긋한 흙냄새 맡을 생각하면…. 너무 좋아요.”

“…….”

외면했다.

짐을 챙기고는 종이를 확인했다.

어제 리혁이가 작성한 리스트였다.

칫솔, 휴지, 비닐봉투, 그리고 뭐야. 고추장…? 얘는 무슨 해외여행 가는 줄 아나.

사실, 여행이긴 하지.

우리는 추석특집 녹화를 앞두고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상암 TBC 앞에 집합해서 경기도 모 마을로 이동해서는 1박 2일로 촬영하는 일정이었다.

아무래도 자고 오다 보니 짐이 좀 많았다.

캐리어를 잠그고는 아침식사를 만들고 있는 비주에게 다가갔다.

다크서클이 눈가에 내려앉은 이를 보며 웃었다.

“잠을 못 잤어?”

“너무 떨려서요. 첫 예능이어서 걱정도 되고.”

“하긴. 처음 하는 것치고는 좀 세지. 모르는 사람들이랑 1박 2일로 찍는 거니까.”

“네, 그래서 결심한 건데요.”

비주가 날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오늘 형이랑 꼭 붙어 다닐까 봐요.”

“어째 결론이 이상하게 튀는 것 같은데.”

나는 거실에서 EDM을 틀고 중현이와 모닝 어깨춤을 추는 막내를 가리켰다.

“근데 지호가 어젯밤에 먼저 예약했어.”

“저 그럼 대기번호 받을 수 있어요?”

“1번이 리혁이야.”

“…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장난스럽게 울상을 짓는 녀석과 미소를 주고받았다.

비주가 능숙하게 계란 후라이를 접시에 올렸다. 그러곤 계란 하나를 새로 꺼내며 물었다.

“계란 다 익혀 줄까요?”

“아니, 반숙으로 부탁할게.”

“네. …오!”

“오호.”

마지막으로 깬 계란은 쌍란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쌍란이라니, 이거 행운의 징조네.”

“그러니까요. 우리 오늘 예능 나가서 대박 나려나 봐요.”

“그거 아닌데.”

뒤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던 리혁이가 찬물을 끼얹었다.

“쌍란은 닭이 스트레스를 받거나 호르몬 이상일 때 나오는 거예요. 행운의 상징이라는 건 혈액형이나 별자리 성격설처럼 낭설… 왜들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요? 알려 준 건데.”

*   *   *

상암동 TBC 사옥.

집결장소는 미러맨이라는 동상 앞이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싶었는데 거기였다.

빨간 사각 프레임을 두고 파란 거인 둘이 손가락을 마주대는 동상.

오전 6시.

우리가 도착했을 때, 동상 부근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탭들로 가득했다.

지미집 카메라와 각종 장비가 세팅됐고, 대본을 들고 돌아다니는 작가진, 조명, 음향 스탭과 게스트, 매니저들까지 가세하니 그야말로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보이는 사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쁘기도 하고, 다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초췌한 얼굴들이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와 있던 게스트들과도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분홍 티셔츠를 입은 여자와 초록 폴로 셔츠을 입은 남자.

최근 주말 드라마에 재벌집 딸로 나온 신인배우 한여름 씨와 프로게이머에서 은퇴하고 최근 방송인으로 전직한 배영훈 씨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각 팀에서 가장 무명인 분들.

처음에는 뻘쭘하게 멀뚱멀뚱 서 있다가 이내 서로 인사하는 매니저들의 모습에 연예인들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벼운 신변잡기도 잠시, 일곱 명은 금세 친해졌다.

묘한 동질감 때문이었다.

한여름 씨가 세팅한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새로 들어가는 드라마 좀 홍보 제대로 하고 오라고 난리예요. 저기 매니저 오빠 보이죠? 오늘 아침부터 차에서 잘하라고 잔소리를 징글징글…….”

“이하동문이예요.”

배영훈 씨가 안경을 고쳐 썼다.

“어렵게 잡은 예능이라고 어찌나 달달 볶는지… 어젯밤에 볶음밥이 되는 꿈을 꿨어요.”

그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본인은 웃기려는 게 아니고 담담하게 얘기하는데 말투가 웃기셨다.

“거기다 소개 영상 2분으로 컷 당한 다음부터 사장 형이 꽁트 학원까지 보내줬어요.”

“그런 학원도 있어요?”

“송파 쪽에 있어요. 은퇴한 개그맨 원장님이 운영하는 데인데 회당 삼십만 원짜리예요.”

“가격만 되면 다녀보고 싶네요.”

“조만간 폐업한다더라고요.”

5개월 할부로 해서 다행이라며 덤덤하게 말하는 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한여름 씨가 목캔디를 하나씩 나눠주며 말했다.

“그래도 신인끼리 있으니까 마음이 안정이 좀 되는 것 같네요. 이따가 장난 아니게 민망할 텐데….”

“이따가요?”

“조금 이따 본격적으로 사람들 모이기 시작하면요.”

“…상상만 해도 싫네요.”

몸서리를 치는 두 게스트를 보며 우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배영훈 씨가 물었다.

“뉴블랙 분들은 예능이 처음이에요?”

“네.”

“아, 어쩐지.”

둘이 수긍했다.

프로게이머 출신 방송인이 음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안 웃기는 말투였다.

“조금 뒤에 알게 될 거예요.”

*   *   *

오프닝을 앞두고 게스트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새로 올 때마다 떠들썩한 환영인사와 잡담이 오갔다.

따스한 분위기였다.

TBC 사옥으로 출근하던 직원들이 간혹 멈춰서서 슬쩍 구경을 하다 갔는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아마 연예인들이 환하게 웃거나, 서로의 팔뚝을 팡팡 치며 깔깔 웃는 그런 훈훈한 장면 따위일 것이다.

물론 그건 실상과는 전혀 달랐다.

치열한 눈치 싸움의 현장.

누군가를 스캔하고, 잘나간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얼른 다가가서 눈도장 찍어두고.

어느 업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인맥이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업계라서 그런가.

그 정도가 심했다.

실시간으로 보면서 ‘와, 저런 식으로 해야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거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고 할까.

어찌나 술 약속을 자연스럽게 잡던지.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우린 공허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다들 고개를 까딱이거나 대충 받아줘서 허공에다 인사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78%의 질소와 21%의 산소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는 리혁이를 보며, 비주와 함께 이과 망했으면 좋겠다고 속삭였다.

그러는 동안 때 아닌 사교의 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번에 윤 감독님이랑 술자리에서 뵙지 않았어요? 여기서 또 보네요.”

“백만 개의 촛불, 그 드라마에 저도 카메오로 나갔거든요. 그 고양이 귀신 목소리요. ‘츄르를 달라…’ 오, 아시네요?”

“저도 샵 거기 다니는데, 어느 쌤한테 헤어 관리 받으세요?”

우리나라 연예계가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알 만큼 좁은 건지, 아니면 저런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선배님들의 두뇌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호가 속삭였다.

“아빠랑 기업인 가족 오찬 그런 거 나간 적 있는데, 거기서 보던 거랑 완전 똑같아여.”

“원래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은 거야.”

“우리도 다른 분들한테 말을 걸어볼까여?”

“아껴두자. 녹화 들어가서 말 걸어도 늦지 않으니까.”

지금 분위기는 신인 아이돌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자칫했다간 저 쪽에 있는 개그맨 서지형 씨처럼 ‘너 눈치 없니?’ 하는 시선만 받고 배회하게 될 걸.

한편 그와는 달리 미니 팬미팅을 하고 있는 연예인도 있었다.

“와, 이견우 선배님 있는 쪽 봐요. 팬싸 같아요.”

우리와 TJ 엔터에서 만난 적 있는 한류스타 이견우는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별처럼 서 있었다.

현실감 없는 외모도 그렇고, 말을 거는 이라면 누구든 매너 있게 받아주는 것도 그렇고.

와인 글래스만 쥐어주면 딱 무도회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런 배경에서는 얄미운 악역들이 하나씩 등장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악역들이 오셨다.

“안녕하세요, 걸스온탑입니다!”

공항 패션처럼 사복을 근사하게 걸친 6인조 걸그룹.

주세한의 아재 포지션을 담당하는 오형석이 ‘역시 걸그룹이 오니까 분위기가 사네’라고 말하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걸스온탑이 우리 앞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뉴블….”

쌩하고 가네.

특히 마지막으로 지나가던 걸스온탑의 막내 길채경은 지호를 보면서 비죽 웃음을 흘렸다.

“제가 이따 복수할 거예여.”

“어떻게?”

“그건 형들이 생각해 주세여. 전 복수만 할 거예여.”

전의를 불태우는 막내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나도 은근히 마음속으로는 활활 타올랐다.

…저게 뭔데 우리 애를 무시해?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 리혁이가 눈을 날카롭게 떴다.

걸스온탑은 곧바로 주세한 멤버들에게 웃으며 친근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도 어서 저렇게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우리 팀 대장님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프로그램에서 지각 남매라고 불리는 게 진짜였던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국 우리끼리 차분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삼육구 삼육구. 일.”

“이.”

“짝.”

“넷.”

“다섯. 아, 중현이 형. 넷이 아니고 사라고 해야죠. 말 꼬이잖아요.”

“육.”

“…….”

“…….”

“우주 형. 팬분들은 몰라도 저희는 그런 미소로 넘어가지 않을 거예요.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웃는 것도 안 돼요.”

너무 할 게 없어서 입으로 하는 삼육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영업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잘 안 받아줬거든.

말을 걸어도 한 귀로 흘리고 으흐응… 하며 주변을 스캔하시는데 별로 달갑지 않아하는 느낌이었다.

그럴 만했다.

인맥이란 ‘얘랑 친해져 두면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 하는 게 있어야 되는 건데, 우리는 그들에게 줄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몇 주간 종종 실검에 올랐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실검에 안 올라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솔직히 여기 끼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와 더불어 기분도 좀 묘했다.

일부러 깔보거나 무시를 당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자연스럽게 둥둥 떠다닌다고 해야 하나.

멀찍이 떨어진 한여름, 배영훈과 미소를 주고받았다.

다 같이 붙어 있다가, 풍선이 부풀어 오르면서 떨어진 세 점끼리 서로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 제대로 해서 분량을 건져야겠다고 결심을 할 때였다.

메인 피디 구재영이 확성기를 들었다.

-자, 이제 슬슬 오프닝 대형으로 모이겠습니다! 모두 자리 정돈해 주세요!

가운데 주세한 멤버 5인을 중심으로 사람들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스탭들 목소리가 들렸다.

“희연이랑 희찬이는?”

“오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택시 잡았대요. 5분 내로 도착한답니다.”

“거짓말도 참… 빨리 오라 그래!”

“희찬이가 방금 문자 보냈어요. ‘태준이 형이 구라라고 할 거’라고 인증샷 보내준다고.”

“…얘는 펑크 난 타이어 앞에서 왜 브이를 하고 있는 거야?”

“곧바로 희연이한테 얻어맞았대요.”

그 대화를 들으며, 미리 제작진이 알려 준 우리 자리를 찾았다.

학익진처럼 쭉 늘어선 대형에서 오른쪽 라인 중간.

나름 괜찮은 위치였다.

그런데 우리 자리에는 누군가 있었다.

다부진 체격에 머리를 새빨간색으로 물들인 개그맨.

서지형.

호감 가는 동글동글한 인상을 지닌 이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거기 서 있었다.

잘못 아셨나?

그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선배님. 자리….”

서지형이 고개를 스윽 돌리더니 날 바라봤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한테 안 보이는 각도로 인상을 팍 쓰며 저리 가라고 눈짓을 했다.

…알고 있었구나.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자, 그가 입모양으로 ‘가’라고 했다.

뭐지.

오프닝 하나 잘 나오겠다고 우리를 밀어내려는 건가.

사실 자리만 따지면 우리 옆이 더 좋았는데 거기는 무섭게 생긴 레게머리 래퍼가 있으니, 만만한 우리를 고른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이의 모습에 동생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도 잠시 얼이 빠져 있다가, 이내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그러곤 결론을 내렸다.

주변에도 들릴 만큼 낮고 또렷한 목소리를 내면서 공손하게.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희가 자리를 잘못 알았나 봐요. 작가님들한테 다시 한 번 여쭤보고 올게요.”

그 말에 옆자리에 있던 이들이 우리와 서지형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향한 것을 눈치 챘는지 서지형이 분위기를 살폈다.

그러곤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여기 너희 자리였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진즉에 말하지. 내 자리를 깜빡해서….”

“얘네 계속 서 있지 않았어요?”

헤이션 왼쪽에 서 있는 게스트, 유명 셀럽인 맥시의 물음에 서지형이 못 들은 척 웃었다.

그러곤 호다닥 자리를 옮겼다.

나를 은근 째려보면서 가는데, 나는 공손한 미소로 답을 해 줄 뿐이었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네.

뭐.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 경험을 통해 예능판이 어떤 곳인지 간접적으로 배운 것 같다.

내 밥그릇은 내가 챙겨야 하는 곳.

그것이 내가 경험한 예능의 첫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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