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63화
보통 사람마다 예민한 부분이 하나씩 있다.
후각이 예민해서 미세한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청각이 발달해서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식으로 누구나 하나씩 예민한 영역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바로 우리 할머니의 기분이었다.
“우리 김덕순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바로 이거야.”
“고작 이 얘기 하자고 그 거창한 서두를 꺼낸 거였어요, 이 화상아?”
“흠흠, 아무튼 요즘 들어서 반응이 이상하단 말이지. 가요대상 이후로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한 것이…….”
신인상을 탄 날부터 그러던데.
뭔가 삐진 게 있는지 톡이나 전화를 할 때 특유의 심술이 평소보다 한 1.3배 정도 붙어 있었다.
‘요즘 왜 그래?’라고 묻기에는 미미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에는 애매한 변화량이라고 할까.
차 안에서 내 이야기를 경청하던 비주가 물었다.
“형, 근데 어느 부분이 평소 할머님이랑 다르다는 거예요?”
“맞아여, 저도 그게 궁금해여.”
“잠깐만. 내가 보여 줄게.”
핸드폰을 꺼내서 요즘 김덕순 여사와 나눈 대화창을 보여주었다.
“봐. 여기 내가 사랑해요 하니까 ‘그려.’ 하는데 점이 하나 찍혀 있지? 근데 평소에는 점 두 개 쓰거든.”
“…….”
“점을 하나 찍었다는 건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거든. ‘그려..’ 이거랑 ‘그려.’ 이거는 확 다르잖아.”
“아하…….”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왠지 나만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 애들한테 물어봐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뭣 때문에 기분이 팍 상해 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따 밤에 전화해서 잔뜩 애교나 부려서 기분을 낭낭하게 해 드려야겠다.
기왕이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좋은 것도 하나 사 주고.
손 편지도 쓰면 완전 감동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히죽 웃고 있는 동안 귓가에 경쾌한 멜로디가 날아 들어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캐롤송 ‘Let it Snow’였다.
Oh, the weather outside is frightful
지호가 두 팔을 흔들면서 캐롤을 흥얼거리자 우리도 다 같이 따라서 노래를 흥얼거렸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차창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싸락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는데 주변에 정차된 자동차의 본네트에 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로는 질척이는 검은색 웅덩이로 변했지만, 거리에는 사방에 쌓인 눈이 한가득이었다.
차창 틈으로 한 톨 한 톨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캐롤을 즐겁게 따라서 불렀다.
우리 메인보컬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캐롤 가사를 부르면 막내와 중현이가 손을 튕겨 가며 리듬을 넣어 주었다.
비주는 눈 내려주는 선녀님을 형상화한 춤이라면서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는데 뭔가 귀여워서 웃었다.
우리끼리 하는 간단한 놀이였지만, 직업이 직업인 터라 차량에서 펼치는 작은 무대 같은 느낌이었다.
제법 그럴싸했는지 백미러로 우리를 바라보는 원석 씨의 눈이 휘어져 있었다.
이어서 나온 노래에 따라 동생들이 합창하는 동안 내가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매니저님, 저희 언제쯤 도착한데요?”
“거의 다 왔어요. 아, 저기 있네요.”
그가 멀찍이 눈발 사이로 보이는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회색빛으로 우중충한 5층짜리 건물은 바로 DNS 미디어의 사옥이었다.
눈 덮인 크리스마스 이브.
오늘의 일정은 스트릿 보이즈와의 합동 연습이었다.
* * *
DNS 미디어 사옥에 도착하자 스트릿 보이즈 측 로드매니저가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오오, 신기하다.”
“1층에 식당 같은 데도 있어요. 싱크대도 있고, 막 요리해서 먹고 그런 데인가 봐요.”
“전반적으로 우리 회사랑 좀 비슷한데요?”
모델 하우스를 방문하듯 요리조리 둘러보는 우리 모습을 매니저가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내가 브이를 하며 말했다.
“저희는 오늘 합동 연습을 위해 DNS 미디어로~”
“왔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스트릿 친구들을 만나러 한 번 떠나~”
“볼까요~?”
합이 척척 잘 맞았다.
내가 ‘고고!’ 하면서 손가락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어 보이자 동생들도 싱글벙글 웃으며 ‘고고고!’ 했다.
저쪽 로드 매니저가 흘깃거리며 물었다.
“이게 그건가요? 실장님들이 말씀하셨던 리얼리티?”
“네, 그겁니다.”
우리 매니저가 대답했다.
지금 핸디캠으로 찍고 있는 장면은 미튜브에 올라가게 될 우리와 스트릿 보이즈의 연습 영상이었다.
아마 제목은 ‘민트 초코단 연습 비하인드?!’ 그런 게 아닐까.
미리 회사끼리 얘기가 된 터라 스트릿 보이즈도 연습실에서 꽃단장을 한 채 우리를 기다릴 터였다.
매니저를 따라 2층으로 간 우리는 널찍한 연습실로 안내를 받았다.
달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제자리에 앉아 있던 스트릿 보이즈가 어색하게 머리를 삐걱삐걱 돌렸다.
곧바로 발연기들이 시작됐다.
“어어! 뭐지?”
“어디서 신인상의 기운이 파스 향처럼 솔솔 나는 걸?”
“와! 뉴. 블. 랙. 이. 다.”
“나무는 연기하지 마, 불타기 싫으면.”
“……짜증나. 뭐만 하면 불탄대.”
LB가 투덜거리는 모습에 우리끼리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우리가 들어가면 모르는 척 반겨 달라고 합의를 했는데 다들 몹쓸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곧바로 열렬한 환영이 이어졌다.
“우와아아아!”
“노잼 패밀리가 뭉쳤다아!”
“잠깐, 잠깐. 우리 그거 해요. 지난번에 우리끼리 연습한 거.”
스트릿 보이즈의 멤버가 우리 동생들을 향해 손가락을 슥 가리켰다. 그러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Are you 노잼?”
“Yes! We’re 노잼!”
“우와아아! 동지다! 동지!”
잘들 한다. 잘들 해.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동생들이 개코 원숭이들처럼 춤을 추는 동안 두목 원숭이들끼리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말은 필요 없었다.
벌써부터 난리 부르스인 동생들 사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는 전우애가 넘치고 있었다.
한조와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면서 ‘고생이 많네요’ 하고 있을 때, 스트릿 보이즈의 멤버가 내 손에 들린 걸 가리켰다.
“어? 단장님! 그건 뭐예요?”
“아. 아무래도 손님인데 빈손으로 오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저희가 먹을거리 좀 가져 왔어요.”
“에이~ 안 그래도 되는데에에….”
탐욕스러운 눈동자들이 내 손에 들려 있는 간식 봉지를 두고 희번득거렸다.
거기엔 우리 곰도 끼어 있었다.
저저 봐. 침 고인 거.
저럴 것 같아서 이 무거운 봉지를 쟤한테 안 맡겼다.
“간식! 간식!”
“조용히 하고 다들 앉아 보세요. 떠들면 간식 안 줄 거예요.”
“네!”
……말 잘 듣는데?
한 무리의 유치원생처럼 내 앞에 쪼르르 앉는 이들을 보면서 먹을거리를 이용한 트레이닝 방법을 써먹으면 어떨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옆에서 그건 아니라는 듯 비주가 고개를 저어서 포기했지만.
우리 애들과 남의 애들이 섞여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내가 간식을 하나씩 펼쳤다.
“일단 31가지 맛이 담긴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요. 맛은 랜덤으로 했고, 2인 1팟으로 먹으면….”
“에헴.”
“될 거고요. 그리고 이건 과자인데.”
“에헴.”
“지호야, 하고 싶은 말 있니?”
“아니요. 에헴.”
“…….”
막내가 거만한 얼굴로 계속 어필을 하는 통에 결국 내가 한숨을 쉬었다.
“이 간식은 전부 다 우리 지호가 쏜 거니까요. 물주를 향해 모두 감사의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와아아아-!”
우리 막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엎드려 절 받기를 음미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꺼낸 간식거리를 사이좋게 먹으라고 나눠 주었다.
여기저기서 모임이 형성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친구들끼리 만나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들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과자를 나눠 먹기도 하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깔깔 웃기도 했다.
그런 훈훈한 친목의 현장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는 살포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잘 먹어라. 얘들아.
이따가 연습하려면 잘 먹어 둬야지. 아무렴.
그렇게 훈훈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내 맞은편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중현이가 ‘어.’ 했다.
“왜 그래, 중현아?”
“형. 방금 표정 되게 그거 같았어요. 그거.”
“어떤 거?”
“그.”
중현이가 적당한 단어가 안 떠오른다는 듯 숟가락을 입에 물고 ‘흐으으음’ 했다.
그러더니 ‘아! 찾았다.’ 하며 입술을 뗐다.
너무나 명쾌하다는 듯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악당이요.”
“야.”
옆에서 듣고 있던 비주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간식을 든든하게 먹여서 그런 것일까.
그날의 연습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주 화목하고 훈훈한 분위기였다.
-이 악마……!
-그, 아저씨. 누구나 비주 형이랑 당신만큼 춤을 잘 출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발 우리 사람답게…. 뭐라고요? 유연성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요? 다리 찢기 시키지 마요! 야! 이 선우주! 나 누르지 마요! 느아아아!
-이제 꿈에서 비주 형이랑 우주 형이 나오면 악몽이라고 생각할 거예여.
스트릿 보이즈도 훈훈하게 반응했다.
-뉴블랙 분들은 항상 연습을 이런 식으로 하세요…?
-와. 우리도 연습할 때 한 독기 한다고 생각했는데, 두 독기 정도 하시네.
-나무야. 감나무 이 새끼 어디 갔어? …아, 아이스크림 토하러 갔어? 그럼 인정이지.
-……느아아아!
크리스마스 이브답게 분위기가 아주 후끈후끈했다.
힘들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는데, 평소보다 훨씬 더 연습 강도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우리가 스트릿 보이즈와 함께 할 수 있는 첫 연습이자 마지막 연습이었다.
다른 날은 스케줄이 맞지 않았던 탓에 기왕 할 때 본전을 제대로 뽑아야 했다.
그리고 사실 그 정도로 힘들었는지도 의문이다.
뭐. 쪼끔 힘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조금?”
리혁이가 눈을 부라렸다.
“조금 같은 소리하네. 소금 맞고 싶어요?”
“그렇게 힘들었나? 비주야, 힘들었어?”
“아니요.”
비주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라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할 만했어요.”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비주가 할 만했다는데?”
“아니, 그러니까 그걸 두 사람 기준으로… 아오! 내가 진짜 이걸 어디서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날 진짜 둘이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맞아여. 스트릿 보이즈분들이 다트 판에 우주 형 사진 붙여 놔도 인정할 정도예여.”
“이미 붙여 놨을 지도 몰라.”
셋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누는 대화를 무시하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그렇게 오늘만 산다 하는 각오로 임한 연습 덕분에 우리 모두 퍼포먼스가 완벽해진 거잖아.”
“맞아요. 저랑 형이 열심히 나선 덕분에 우리 민트 초코단의 합동 퍼포먼스가 완성된 거예요.”
“그렇지?”
“네. 고생 많았어요. 형.”
“아니야. 우리 비주가 제일 고생이었지.”
“아니에요. 형이 가장 고생했어요.”
우리가 사이 좋게 ‘너님 덕분이에요’하면서 꺄르르 웃자, 나머지 셋이 엮이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졌다.
리혁이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평소보다 기분이 업 됐네. 업 됐어.”
“교복 입어서 그래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으니까.
청색 재킷에 스트라이프 넥타이.
우리가 현재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교복 브랜드 에버드림에서 협찬해 준 의상이었다.
무대 의상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교복을 입고 있자니 행복했다.
막 설레고, 막 들뜨고.
이대로 우리 애들이랑 같이 와아아 하면서 영화관도 가서 청소년 할인도 받고 재미있는 것도 해 보고 싶은 기분이다.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실실 새어나왔다.
거울 앞에 서서 셀카를 찍기 시작하자 막내가 같이 찍겠다면서 도도도 달려와서 붙었다.
그런 우리 모습에 대기실에 있던 다른 스탭들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형, 우리 사진 셀렉해여.”
“그러자.”
막내와 같이 핸드폰 사진첩에 저장된 사진을 보면서 하나하나 품평하는 동안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12월 30일.
어느덧 TBC 연말 가요제를 하루 앞둔 오늘은 바로 우리와 스트릿 보이즈의 합동 무대를 사전 녹화 하는 날이었다.
생방송 무대에서 가수가 교체되는 텀을 비롯해서 이런저런 시간이 필요한 만큼, 일부는 사전녹화를 해야 했는데 우리와 스트릿 보이즈의 무대가 그중 하나였다.
그런고로 이따 수플레들과 콘크리트가 함께 야광봉을 흔드는 공개홀에서 사전 녹화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물론 녹화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지만, 미리 의상을 차려 입어야 했다.
바로 VCR 촬영.
우리의 안무 영상을 받아 본 TBC 측에서 무대를 하기 전에 앞서 짧은 VCR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그러곤 작가님이 들어와 우리를 불렀다.
“VCR 촬영할게요.”
“네!”
매니저들과 함께 복도로 나가 보니 이미 스트릿 보이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눈인사를 나누고는 수첩을 들고 있는 작가님 앞에 모였다.
그녀가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대 컨셉이 학교 내에서 노래 동아리랑 힙합 동아리가 충돌하다가 화합하는 형식으로 가는 거잖아요?”
“네.”
“VCR에서 그 내용을 살려 볼 거예요. 짧게 10초에서 15초 정도. 양쪽 복도 끝에서 두 그룹이 워킹하면서 다가오는 장면을 찍을 거고요.”
우리의 시선이 양쪽 복도 끝을 짧게 훑었다.
“그 다음에는 이 복도 가운데서 마주치는 장면을 찍을 거예요. 거기서 짧게 대사를 쳐 볼게요. 조금 불량스럽거나 거친 느낌으로 하면 되는데 아무 말이나 해도 괜찮아요. 어차피 배경음악 깔 거라서.”
곧이어 카메라가 세팅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각 그룹이 중앙으로 워킹하는 장면을 몇 번 정도 반복해서 촬영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그룹이 대면하는 씬.
각 동아리의 두목들이 복도에서 얼굴을 마주대고 한 마디씩 주고받는 장면이었다.
지호가 내게 속삭였다.
“형, 잘할 수 있어여?”
“왜?”
“아니, 좀 걱정이 돼서 그래여. 이거, 되게 불량 청소년처럼 얼굴 맞대고 얘기해야 하는 건데. 형 같은 온실 속 파채가 할 수 있을지…….”
“걱정 마. 형은 강한 파채야.”
우리 연기자 님이 걱정 되는 모양이었다.
스트릿 보이즈야 험상궂게 인상을 쓰고 무대를 하는 게 익숙하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저렇게 센 컨셉으로 뭘 해 본 적이 없어서.
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막내 입장에서는 잘 안 맞는 대사를 소화하려는 내가 잘할지 의문이 드는 듯했다.
내가 속삭였다.
“잘할 자신 있어.”
지금 이 상황에 필요한 완벽한 표정들을 이미 익혀두고 있었으니까.
* * *
두 그룹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머물렀다.
“들어갈게요!”
촬영 신호가 떨어지자 곧장 서로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목을 뚜둑 꺾으면서 다가오는 9인조 스트릿 보이즈.
인원은 적을지언정 기세로는 지지 않겠다는 듯 낯빛을 사납게 굳힌 뉴블랙 멤버들.
양쪽 그룹이 서로를 향해 다가오는 가운데 스트릿 보이즈는 뉴블랙의 중앙에 위치한 멤버를 보고 놀랐다.
‘우와…….’
나름 인상을 썼는데도 화가 난 래서팬더처럼 보이는 뉴블랙 멤버들과 달리 리더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싸늘하게 변한 눈매와 입가의 여유로운 미소가 돋보인다고 할까.
표정 하나 바꿨을 뿐인데 다른 사람 같았다.
‘작곡만 잘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영화 속 마피아가 툭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한 표정 연기를 해내는 이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무섭다.’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의 간담이 서늘했다.
상대의 표정이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바로 그 표정을 보자 누군가 연상됐기 때문이었다.
늘 호랑이처럼 그들을 혼내는 사람.
‘헤이션 선생님 같아…….’
그들에게 랩을 가르쳐 주는 인상파 래퍼와 느낌이 비슷했다.
한편 뉴블랙 멤버들은 리더의 표정을 보면서 다른 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틴스피릿 같아…….’
실제로는 그 둘의 표정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두 그룹의 멤버들은 왠지 모르게 움찔하면서 심약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잠시 동안 한조와 우주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진지한 분위기.
마치 두 그룹의 명운을 건 듯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동안 복도에 침묵이 내리 앉았다.
‘이제 조금 불량한 느낌의 대사 쳐주세요.’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작가가 보내는 신호에 우주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차가운 미소와 함께.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은연중에 긴장하고 있던 모두의 귓가에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혹시 돈 많니.”
두 리더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움찔하면서 입술을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뺨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웃음을 참을 때.
이어서 한조의 대답도 가관이었다.
“어디까지 알아보고 왔는데?”
“오천 원 정도.”
“만 원 있어.”
“잘됐다. 내 수학의 정석 살래?”
“미안. 문과야.”
두 그룹의 멤버들이 뺨을 파르르 떨었다.
곧바로 제작진 측에서 촬영 종료를 알렸을 때, 양쪽 멤버들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박장대소했다.
숨넘어갈 듯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복도에 가득했다.
“……?”
하지만 두 리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동생들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