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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75)화 (175/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75화

“에이, 까칠하기는.”

할머니와 통화를 종료하고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전 8시.

차량은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영종대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 형들! 저기 봐여. 비행기 날아간다!”

지호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멀찍이 하늘로 사라지는 작은 점이 보였다.

“그러게, 공항이랑 가까워지나 봐.”

우와아 하는 우리 애에게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마음속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비행기를 타야 한다니…….

부모님의 사고에 대한 아픔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오래 전에 벌어진 사고였고, 눈물은 흘릴 만큼 흘렸다.

가끔 동생들이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 가슴 한구석이 허할 때를 빼면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깊숙하게 새겨진 공포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비행기가 무섭다.

물론 사고확률이 높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항공기 사고로 죽을 확률은 천백만 분의 일.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

허나 천백만 분의 일을 직접 경험해 본 입장에서 그 희박함은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했다.

뭐. 그래도 별 일 없을 거다.

별 일 없…….

“형, 괜찮아요?”

비주가 나를 걱정스럽게 살폈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 같은데요. 식은땀도 나고.”

“아아, 별 일 아냐.”

목 뒤에 맺힌 식은땀을 슥 문질렀다.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핸드폰 보다가 멀미 했나 봐.”

“멀미약 붙여줄까요? 혹시 몰라서 캐리어에 넣어 왔는데.”

“아니야, 곧 있으면 도착하잖아.”

이번에는 리혁이가 스페인어 교본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안 좋은 거 있으면 말을 해요. 지금 얼굴이 오래 된 밀가루 같으니까.”

“속이 조금 메슥거려서 그래.”

“내가 뭐 해줘요? 필요한 거 있음 말해요.”

“그럼…….”

내가 창백한 낯으로 입술을 떼자 리혁이가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살짝 긴장한 기색이 상대에게 감돌 때, 내가 씩 웃었다.

“노래라도 한 곡 불러줄래?”

“아씨, 뭐야. 멀쩡하네.”

괜히 걱정했다면서 스페인어 교본으로 시선을 돌리는 녀석이었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서.

자기들끼리 이어폰 한 쪽 나눠끼고 쎄쎄쎄 하는 바보들과 달리 두 녀석은 어제부터 부쩍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 하나 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석환 형의 눈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손하트를 보내며 눈을 찡긋하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이따가 공항에서 예능 촬영도 있고, 첫 해외 스케줄이라 다들 긴장하면서도 설레는 분위기였다.

그랬기에 굳이 쓸데없는 이야기로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우와아, 공항이다!”

멀찍이 인천공항이 눈에 보였다.

차량이 고가 도로를 올라가 3층의 출국장으로 향한 후, 순식간에 10번 게이트 앞으로 도착했다.

“사람들 되게 많네요.”

중현이가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곳곳에 대포 카메라 천지였다.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온 기자들과 우리를 보러 온 팬분들이었다.

동생들이 저마다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동안 나도 스마트폰 화면에 얼굴을 비쳐 보았다.

동작을 따라하는 능력은 오늘도 효과가 좋았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화사한 미소가 그려졌으니까.

*   *   *

횡단보도에 서서 카메라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석이 형이 앞에서 길을 트고 우리는 따라갔다.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자 TBC 로고가 붙은 카메라들과 함께 출연진들이 우리를 반겼다.

“어, 왔다!”

수더분한 인상의 남자가 손짓했다.

“얼른 와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세 명의 남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그들의 왼편에 섰다.

“이야, 사람 진짜 많네. 역시 괜히 2014년 최고의 신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가 보네요.”

유창하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남자는 유창현.

개그맨 출신으로 여기저기 예능 프로에서 얼굴을 비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오늘 ‘파티시에 코리아’ 특집에서 분위기를 살릴 목적으로 초빙된 인물이었다.

파티시에 코리아는 작년 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서바이벌 프로였다.

빵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파티시에들을 모아 저마다 디저트를 뽐내는 요리 경연 형식으로 시청률이 잘 나왔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방송이 끝난 후에도 TBC 측에서 남은 인기를 뽑아먹기 위해 특집 편성을 준비했다.

이른바 글로벌 투어.

준수한 성적을 거둔 top 5가 자신들의 멘토와 함께 해외에 일일 카페를 차리고, 자신들이 만든 메뉴로 영업을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호평을 받았던 메뉴가 해외 사람들에게는 과연 어떤 반응을 얻을까 하는 내용이 포인트였다.

우리는 그런 카페의 일일 알바생이었고.

“허어, 이게 다 팬이에요?”

스크린 도어가 열리고 밖에 있던 이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오자 유창현이 혀를 내둘렀다.

거기에 지나가던 여행객들도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가세했다.

물론 우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등산복 군단 중 핑크 잠바를 입은 어머님이 따봉을 들어 보이며 외쳤다.

“박 셰프님, 테레비보다 더 젊어 보여!”

“어유,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젊으세요.”

덩치가 좋고 선이 굵은 외모의 40대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박재우 셰프.

파티시에 코리아에서 출연자들의 멘토를 맡았던 인물로, 각종 요리 프로에서 훈훈한 외모와 해박한 요리지식을 뽐내는 사람이었다.

“어, 나 저 사람 봤어. 그, 맞지? 파티시에 코리아 우승자?”

“안경 벗으니까 못 알아보겠다.”

그리고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20대 여자가 서 있었다.

아직 방송이 낯선 듯 어색하게 눈을 둘 곳을 모르고 있는 명세진은 이번 파티시에 코리아의 우승자였다.

거기에 팬들이 있는 우리까지 합쳐지니 자연스럽게 인파가 불어났다.

“이쯤에서 소개 한 번씩 해볼까요?”

“네, 둘 셋.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우리끼리 돌아가면서 인사를 했다.

유창현이 능숙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동안 셰프와 우승자가 맞장구를 치거나 호응했다.

박재우 셰프가 미소를 지었다.

“다들 엄청 잘생기셨네. 누가 비주얼 멤버인지 모르겠어요.”

“누군지 모르시겠어여?”

지호가 발랄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유창현이 물었다.

“여긴 지호 씨가 비주얼이야?”

“네, 제가 뉴블랙의 비주얼을 맡고 있어여. 보시다시피 제가 제일 잘생겼거든여.”

“거기 형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은데?”

지호가 나서서 말하는 동안 우리가 뒤에서 손으로 X자로 그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막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자상하게 웃어주고.

“비주얼은 우주 씨 아니야?”

“맞습니다, 선배님. 정말 정확하시네요. 이 친구가 막 설쳐대서 그렇지, 아직 저와 대적할 단계가 아니거든요.”

“저 맞아여. 성격 포함하면 제가 1위거든여.”

“아, 종합랭킹?”

“넹. 우주 형이 외모만 따지면 1위인데 성격이 포악해서 종합 랭킹은 제가 더 높아여.”

막내의 디스에 황당해 하는 동안 박 셰프와 명세진이 웃었다.

삽시간에 편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조용히 있던 명세진이 중현이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저 장수풍뎅이 짤 봤어요!”

“장수풍뎅이요?”

두 출연진에게 우승자가 설명을 해주었다.

유창현이 호기심을 보였다.

“장수풍뎅이 그 포즈! 다시 한 번 봐도 될까요?”

“아, 저희 실장님이 이거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중현이가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그냥 하고 혼날게요.”

“매니저님 어디 계시나요? 아, 거기 계시네요. 뒷목이 많이 땡기시나 봐요?”

인파 사이에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석환 형에게 잠시 카메라가 갔다.

이윽고 중현이가 장수풍뎅이 포즈를 취하면서 곳곳이 웃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그냥 봐도 웃긴 느낌이었다.

덕분에 그때부터 ‘아, 흑염소!’, ‘대길이?’ 하는 구경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흐름을 타고 수십 명의 구경꾼들과 카메라 앞에서 열심히 재롱을 피우고 드립을 주고 받았다.

우리 친화력 넘치는 성장기 소년도 좋은 분위기에 한몫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아이돌 관심 있으세여? 저희 알아여?”

“아뇨. 연예계는 잘…….”

“저도, 아이돌은 잘 몰라서.”

우물쭈물 대답하는 멘토와 제자에게 지호가 환하게 웃었다.

“잘 됐다! 그럼 지금부터 저희 아시면 되겠네여. 형들, 우리 노래 불러드려여.”

“오, 노래 한 곡 뽑아볼까요?”

즉석으로 얻어낸 홍보 기회에 내가 말했다.

“저희 그러면 기왕 하는 거, 빡세게 안무까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열정 좋네요! 자, 그러면 자리 조금 넓게 비켜주세요.”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난 가운데 불꽃놀이와 마스커레이드의 메들리 공연을 짧게 선보였다.

유창현이 물었다.

“뉴블랙은 어떻게, 이 두 분 다 알고 계시나요?”

“그럼요.”

내가 대답했다.

“파티코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특집에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조 이사님 댁에서 틈날 때마다 열심히 본 터였다.

비주가 요리에 대한 관심을 불태우며 멘트를 하고, 우리가 뭐가 재미있었는지를 말해주었다.

방송을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내용들을 이야기 하니 상대도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슬슬 오프닝을 끝내야 할 타이밍이 되었을 때, 유창현이 멘트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대만에서 일일 알바생으로 저희가 모시게 되었는데요. 포부 한 마디 들어볼까요?”

“저희 정말 일 잘합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해 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주세한 멤버들이랑 밥을 먹었거든요. 뉴블랙 얘기가 나오니까 희연 씨가 그렇게 신나 하대요. 검은 소나 누렁소보다 일을 더 잘하는 아이돌이 있다고.”

“네, 그거 우주 형이에요.”

우리 애들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가리켰고 나는 체념한 얼굴로 웃었다.

박재우 셰프가 물었다.

“제작진한테 들어보니까 중국어도 잘한다면서요? 이번에 통역 필요 없어도 될 거라고 하던데 맞나요?”

“是.”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카메라를 향해 자신 있게 포부를 밝혔다.

“지켜봐주세요. 정말 이번에 소처럼 일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   *   *

오프닝 촬영이 끝나고 잠시 TBC 일행과 헤어지기로 했다.

서로 타는 비행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비즈니스 석이라서 그런가, 엄청 넓어여.”

내 옆에 앉아서 자리를 살피던 지호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다른 동생들도 자리를 둘러보다 만족했다.

우리가 광고 모델로 있는 중견항공사인 클라우드 항공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준 자리였다.

우리 애들이 길쭉한 다리를 마음 놓고 뻗을 만큼, 자리 자체는 넓고 만족스러웠다.

문제는 나였다.

“…….”

창가 옆에 앉아 복잡하게 돌아가는 화물 차량이나 멀리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당장이라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침에 먹은 토스트를 토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등받이에 댄 등과 손바닥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커피를 먹은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연신 내 귓전을 파도처럼 때려댔다.

속된 말로 대환장이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저희 클라우드 항공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있을 이륙을 알리는 기장의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형, 멀미는 괜찮아요?”

복도를 사이에 두고 중앙 좌석에 앉은 비주가 나를 불렀다.

“어, 괜찮아.”

내가 웃으면서 손을 들어보였다. 아까와 달리 이제는 표정관리도 어색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웃어 보이자 다들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아니에요.”

리혁이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았다.

중현이도 평온한 얼굴로 책자를 꺼내 뒤적이고 있고.

그냥 모른 척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다들 알아채고 배려하는 듯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면서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자꾸만 주변 공기가 목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이라 셔츠 단추를 두어 개 정도 풀었다.

내 생각보다 심한데…….

이 정도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면 미리 매니저한테 말이라도 해야 했었나 하는 후회가 들 때였다.

하지만 이미 늦을대로 늦었다.

여기서 잠깐 내렸다가 타고 싶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게 안절부절 못할 때, 비행기가 서서히 이동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눈을 감으면 자꾸만 어릴 때 보았던 그 뉴스 화면이나 각종 비행기 사건사고가 눈에 맴돌고.

눈을 뜨고 있으면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평소에는 그리 좋기만 하던 능력이 오늘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제발.

부탁이니까, 뭐라도 보여줘.

쇼케이스 때 극한의 긴장감을 느꼈을 때처럼 능력이든 뭐든 좋으니 어떤 도움이라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번과 달리 이번에는 내 능력이 묵묵부답이었다.

이러다 자리에 정말 토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릴 때.

쏙-

왼쪽 귀에 이어폰이 쏙 들어왔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감촉이라 순간 멍한 느낌이었다. 생각이 일시정지했다고 해야 하나.

지호가 스마트폰을 보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노래 들으려구여.”

“지호야…….”

“넹?”

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륙 전에는 꺼야 하는 거 아니야?”

“비행기 모드라서 괜찮아여.”

“진짜로?”

“네, 형. 그나저나 저 이륙하는 거 무서워서 그런 거니까, 노래나 같이 들어줘여.”

뭐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노래를 선곡했다.

‘떠나요~ 둘이서~’ 하는 가사와 함께 지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이가 없었지만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가 손을 잡아준 것처럼 이어폰 한쪽을 끼고 있는 게 심적으로 안정 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동안 비행기가 가속을 시작했다.

팔걸이에 양손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이건 비행기가 아니다. 비행기가 아니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해서 이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올 때마다 옆에서 지호가 툭툭 치며 자기 무섭다면서 막 이야기를 했다.

그 덕분일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비행기는 하늘로 솟구쳐 있었다.

“으잉, 뭐야.”

지호가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다들 이륙 무섭다고 여기저기서 겁 줘서 되게 긴장하고 있었거든여. 생각보다 별 거 없지 않아여?”

“……그러게.”

“노래나 들어여. 우리.”

창밖으로 구름이 보이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어졌다.

끝났구나.

아무 일이 없이 이륙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식은땀을 닦으며 긴장이 풀린 몸을 뉘일 때였다. 문득 구름 가득한 창문으로 얼굴이 하나 박혀 들어왔다.

나를 걱정스럽게 흘깃거리는 막내의 눈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여전히 철 없이 웃고 있었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노래 뭐 들을까여, 형? 신나는 걸루?”

“아무거나.”

상대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말했다.

“아무거나 다 좋아.”

어차피 상관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있었으니까.

어젯밤에 잠을 설치기도 했고.

극한의 긴장감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급격히 피로해진 몸이 잠을 자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나 눈 좀 감고 있을게…….”

“자게여?”

“어, 잠 나오면 밥 깨워줘….”

순식간에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   *   *

어딘지도 기억이 안 나는 바닷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갈매기 비스무리한 새가 날아다니고, 오후인지 오전인지 알 수가 없는 맑은 하늘.

나는 밝고 화사한 모래사장에 서 있다.

그런데 작다.

손도 고사리 손이고, 걸음걸이도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몇 살 때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거인처럼 보였다.

-우주야.

따스한 목소리. 여자의 목소리다.

어린 내 눈이 고개를 돌리자… 안 보인다.

분명 보여야 하는데 노이즈가 낀 것처럼 안 보인다.

그런데 난 이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이명은. 우리 엄마.

늘 사진 속에서만 보던 단아한 하늘색 옷은 우리 엄마가 좋아하던 옷이었다.

-우주야. 아빠가 재미있는 거 사왔는데, 우리 같이 가서 볼까?

-재밌는 거?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를 엄마가 번쩍 안아든다. 바닷바람을 타고 엄마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그 품에서 나는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곧이어 모래사장 한구석에 셔츠 차림의 미남이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마찬가지로 이쪽도 얼굴에 노이즈가 낀 듯 희미하다.

선명주. 우리 아빠.

얼굴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미남미녀인 걸 아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옷맵시만 봐도 느껴진다.

-우주야! 짜잔!

그러면서 해변에 박혀있는 막대기들을 가리킨다.

-아빠가 너 보여주려고 신기한 거 사왔다. 어때, 처음 보지?

어린애처럼 마냥 들뜬 남편을 보며 엄마가 웃는다.

-어째 오빠가 더 신난 거 같아.

-당연하지. 내가 우주한테 이거 보여주려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애기한테 보여줘도 괜찮은 거 맞겠지? 혹시 이러다 고막이라도 상하면 큰일인데…….

-괜찮아. 장모님도 그러셨잖아. 애들은 험하게 커야 한다고.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씩ㅆ… 아아! 미안, 미안! 내가 잘못했어.

어릴 때는 의미를 몰랐던 대화들이 들려온다.

아웅다웅하다가 자기들끼리 깔깔 웃던 연인은 이윽고 나를 가운데 품에 둔 채 서로를 껴안았다.

하지만 어린 내 관심은 막대기에 머물러 있다.

저건 뭘까.

성냥으로 불을 그 막대기의 꽁무니에 불을 붙인 아빠가 신이 나서 내 쪽으로 다가온다.

-우주야. 저거 봐봐. 이제 저게 하늘로 날아갈 거야.

엄마의 따스한 두 손이 내 말랑말랑한 귀를 덮는다.

그러기를 잠시.

폭음과 함께 막대기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뭔가를 발사했다. 한 무더기의 폭죽이 울음을 토한다.

눈을 휘둥그레 뜨며 움찔한 것도 잠시.

하늘에 폭죽이 아름다운 불꽃을 수놓는다. 손가락을 입에 문 어린 내가 그걸 보며 입을 멍하니 벌린다.

엄마가 입에 손을 가리며 말한다.

-오빠, 얘 좀 봐.

-거봐.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지?

내가 인생에서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물론 한강에서 하는 불꽃놀이에 비하면 해변의 폭죽 몇 개는 아무렇지도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때 내 볼에 따스한 입술 감촉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들렸다는 거니까.

-엄마랑 아빠는 세상에서 우리 우주가 제일 좋아.

아주 오랜만에 꾸는 예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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