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21화
29장. 흐르는 물살을 타고
명곡 발굴단이 끝나고 수플레들은 풍악을 울렸다.
-엉엉어어어어어ㅠㅠㅠㅠㅠ엉엉ㅠㅠ
-나 운다 증말ㅠㅠㅠ
-우리 애들 너무 자랑스러워..
-also 사랑스럽구요
-이게 뭐라고 눈물까지 찡하냐.. 음방 1위도 아닌데 우주가 소감 말할 때 너무 뭉클했어요
-할머님 우주가 덕순아를 쟁취했어요!!!
팬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실시간 반응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인터넷 뉴스 댓글 캡처예요!
-와 실검에 우리 애들 있어ㅋㅋㅋㅋㅋㅋㅋ
-오늘 중현이 로마인 망토 흐뭇짤.gif
-덕순아를 쟁취한 우주 표정 분석 돌려봤는데 행복 100이래여ㅋㅋㅋ
-나도 지금 찍으면 100나올듯
얼마나 기쁜지 스마트폰 화면이 꺼질 때마다 자신의 잇몸웃음을 마주하는 수플레들이었다.
그럴 만했다.
-사.. 사방이 뉴블랙 천지야! 세상에. 난 여기 누워야겠어
기사가 뜰 때마다 제목에 ‘뉴블랙’이 꼭 들어가 있는가 하면.
퍼포먼스 클립 영상 조회수는 가파르게 상승하는 중이었고.
실검 1위인 ‘뉴블랙’을 비롯해 ‘노재현’, ‘인생’이란 키워드가 화제성을 증명하고 있었다.
방송을 못 본 사람들도 ‘뭐 때문에 저래?’ 하는 반응으로 꾸준히 유입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반응은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쟤 빨강머리는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귀티나게 생겼네.”
“리혁이? 쟤는 꾀꼬리처럼 노래를 부르네. 노래 좋다. 얘, 이거 인터넷에 올라온다고 했지?”
“아이돌이 원래 다 저렇게 노래를 잘하냐?”
가족들과 TV를 보던 수플레들은 어질어질한 기분을 느꼈다.
‘뭐야. 적응 안 돼.’
예전에는 TV에 나와도 ‘아이구, 귀엽네’ 하면서 스치듯 말하던 가족들이 멤버 이름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조용히 덕질하면서 사는 중인데 엄마가 내 최애 이름을 입에 올리는 기묘한 상황.
‘대박이다.’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뉴블랙’이라는 이름이 이제 어른들의 머릿속에 완전히 착 달라붙었다는 것이다.
그간 주세한과 다른 예능에서의 활약으로 포스트잇처럼 달랑달랑했던 인지도가 이제는 접착제처럼 끈끈하게 붙은 느낌.
-엄마가 뉴블랙 얘기하면서 너 좋아하는 가수 누구였지 해서 당황해서 젠민이라고 해버렸어여.. 어떡하지
-부모님이 이거 실시간 투표인줄 오해했어요ㅋㅋㅋ 몇 번 누르는 거냐고 물어서 웃음
-아빠. 노블랙 아니야. 왜 자꾸 노블랙이라고 해?
쭉쭉 올라오는 후기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하지만 수플레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대박이다.. 얘네
-명곡단 PD가 뉴블랙 왜 섭외했는지 완전 이해함ㅋㅋㅋㅋ
-봣는데 괜찮은데? 뉴블랙이 지난번에 베글에서 까이던 애들 맞지?
-오히려 기대치 낮은 상태에서 봐서 그런가? 난 좋았음
-반응 핫하네 워우
-진짜 눈 크게 뜨고봤어
-숯불 애들 좋겠다. 울 엄빠가 뉴블랙 얘기하는 거 보고 개부러웠어
-솔직히 그때 논란 읭스럽긴 했음ㅋㅋ
언제 뉴블랙을 깠느냐는 듯 분위기가 180도로 바뀐 커뮤니티들.
지난번에 나온 가창력 논란 때문에 평소보다 더 호의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승복하지 않는 이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수플레들이 손 쓸 필요 없이 다른 팬덤에게 욕을 먹고 있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 이럴까.
탄산음료를 통째로 들이켜서 탄산이 온몸의 혈관 속에서 팡팡 튀는 상쾌한 느낌.
그런 기분으로 웹서핑을 할 때였다.
수플레들의 귀에 믿기지 않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망고 실시간 차트 봐요!
링크를 타고 간 이들은 음원 사이트 메인을 보고 생각을 멈췄다.
그러곤 눈을 멀뚱멀뚱 떴다.
‘뭐야…….’
실시간 차트 순위권에 박혀 있는 뉴블랙의 이름.
그걸 본 모두 입을 떡하니 벌렸다.
‘미쳤다.’
[2위] 뉴블랙 - 인생 (PBS 도전, 명곡 발굴단)
그야말로 대박이 터져 있었다.
* * *
“사인 다 한 거 같은데, 더 있으세요?”
“잠깐만. 잠깐만.”
“네?”
“줄 사람이 더 있어 갖고. 잠시만 기달려라!”
손바닥을 들어보이던 꽃가게 사장님이 허겁지겁 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천천히 다녀오세요! 저 지금 어디 못 가요.”
자기 가게로 뛰어가는 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월요일 아침.
나는 백반집에서 때 아닌 팬미팅을 하고 있었다.
“To. 누구라고 하셨죠? 아드님이요?”
“울 아들 승민이.”
“아, 승민이. 잘 지내요? 이제 중학교 들어가죠?”
“기억하는구나?”
기뻐하는 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내 곁에 늘어선 가게 사장님들을 바라보았다.
어제 방송 반응이 뜨겁다.
백반집에서 아침 좀 먹고 출발하려는데, 나를 발견한 분식집 사장님이 요란법석을 떤 게 시작이었다.
한 명이 사인을 받으러 오니 다른 한 사람이 오고. 그러더니 또 누군가를 데리고 오고.
마치 개미굴에 떨어진 각설탕이 된 것 같았다.
“혜연아! 얼른 이리 와서 인사해. 우주 오빠 기억하지?”
“안녕.”
“엇… 안녕하세요…….”
감자탕집 사장님 모녀와 같이 사진도 한 번 찍고.
자기 가족한테 목소리 한 번 들려줘도 되냐는 통화 요청에도 한 번 응해 주고.
무엇보다…….
“우주야, 나도 좀 같이 찍자.”
“군산에 대스타가 났어. 너 이제부턴 얼굴 보기도 힘들고 그런 거 아니냐?”
“어제 노래 엄청 좋더라. 노재현 선생 실물로 보면 어떻디?”
어른들이 제일 좋아하고 있다.
석환 형에게 듣기로 ‘인생’의 음원이 40대 이상에게 큰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하던데 진짜였던 모양이다.
아이돌 이름도 잘 모를 것 같은 나이 든 손님들도 나를 보고 ‘오’ 하며 사진 요청을 했으니까.
“어제 명곡단 맞죠?”
“네, 맞아요.”
“이야, 여기 손주 분이셨구나. 방송에서도 보던 거랑 똑같네. 피부도 엄청 고우셔.”
사인, 사진, 사인, 사인.
손님, 꽃가게, 손님, 분식집.
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낄 때, 밥그릇을 들고 오던 할머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애 밥 좀 먹자, 이것들아!”
김덕순 여사가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나가면서도 가게 사장님들은 내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 동네에 연예인이 났다며 관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우주가 테레비에 나왔네!’ 하고 신기해하는 것에 그쳤던 주세한 때와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연예인 취급을 받는 거 같다.
하기사 어른들 입장에선 가수라고 해도 ‘뭘 불렀나?’ 싶을 텐데, 어제 지상파 TV에 노래하는 모습이 제대로 나왔으니까.
“휴우…….”
구석진 자리에서 밥을 먹었다.
“다들 뭔 옘병이래냐. 할 일도 없지. 테레비만 끼고 사나?”
“어때, 손자 유명해지니까 좋지?”
“그려. 좋다, 이것아.”
씩 웃으며 간장 콩자반을 집었다. 달콤했다.
“근데 난 잘 모르겄다.”
할머니는 좋으면서도 살짝 질린다는 눈치였다.
“안 그래도 니 팬들이 찾아오고 그러는데. 이제는 저것들까지… 야! 안 가냐!”
창밖에서 망원경 포즈를 하고 있던 가게 사장님들이 할머니의 일갈에 도망쳤다.
그 동안 나는 숟가락을 멈추고 물었다.
“팬들?”
“어, 니 팬들이 찾아와서 가게 일 도와주겠다고 그러더라. 어떻게 알고 온지는 모르겄는데.”
“어떻게 했어?”
“당연히 됐다고 가라고 혔지. 장사 한두 번 하냐.”
내가 쓰게 웃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할머니.”
“뭐 그게 미안한 일이냐. 니 일인데 니가 잘될수록 좋은 것이지.”
“오, 감동이야.”
윙크를 하며 손하트를 날렸다.
“다음에 올 때 모피 하나 더 콜?”
“콜.”
수줍게 손가락으로 ‘OK’를 그리는 우리 할머니의 모습에 내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짐을 챙겼다.
할머니가 챙겨준 음식, 이불, 베개, 그리고 정체불명의 부적까지.
“할머니, 그럼 나 가 볼게요.”
“그려.”
찬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꽁꽁 얼어붙는 아침 날씨 속에서 머뭇머뭇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품에 꼭 안았다.
“할머니, 나 금방 올게.”
“……그려.”
꼭 껴안은 내 귓가에 할머니의 잔소리가 들어왔다.
“밥은 꼭 끼니마다 챙겨 먹구. 노래 만든다고 옘병하기 전에 니 몸부터 건사해야 근사한 노래가 나오는 겨. 또 다시 비주가 나한테 ‘할머니, 우주 형이 밥을 안 먹어요오…’ 이러면 내 손에 죽는 겨. 알어?”
비주 이 녀석.
입을 비죽거리다가 포옹을 풀고 말했다.
“알았어. 할머니, 내가 사랑…….”
“어이구, 춥다. 난 들어간다!”
“하는데…….”
뭐야. 허리 아프다더니 엄청 빠르네.
이미 가게 안으로 줄행랑을 쳐 버린 할머니의 모습에 그만 웃었다.
창 너머에서 부끄럽게 손을 흔드는 할머니에게 큰 하트를 그려 보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 * *
“안녕하세요. 형.”
터미널에 픽업하러 온 원석이 형의 차에 올라탔다.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푹 쉬고 왔나보다. 좋아 보여.”
“그래요? 역시 우리 할머니랑 있다가 와서 그런가. 이게 바로 덕순효과인가 봐요.”
내 말에 상대가 웃음을 머금었다.
“부모님이 지방에 계시는데 간만에 연락을 하시더라. 네가 담당하는 가수 잘 봤다고.”
“그래요? 저희 어떠셨대요?”
“다음에 내려올 때 꼭 사인 받아오래. 팬 됐다고.”
원래부터 아버지가 노재현 선생님의 팬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었다.
좋은 인상을 남겼다니 다행이네.
음악도 들을 겸 라디오 채널을 돌릴 때였다.
『 …이렇게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란 시에서 인생을 길에 비유했습니다. 인생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의미하는 것이죠. 청취자 여러분은 오늘 하루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
DJ가 클로징 멘트를 날렸다.
『 마지막 곡으로, 어제 큰 화제였죠? 뉴블랙의 ‘인생’을 들으며 오늘 방송 마무리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지금까지 채지은이었습니다. 』
채널이 어딘지 확인하니 PBS였다.
같은 방송사라고 해도 어제 나온 경연곡이 바로 선곡표에 올라갈 줄은 몰랐는데.
내가 편곡한 전주가 지상파 라디오에 나온다는 게 얼떨떨하다.
“이게 여기서 나오네요.”
“그러게.”
둘 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어제 시청률이 정확히 몇 퍼센트라고 했죠?”
“평균시청률 17.1퍼센트.”
와우.
“예능국에서 오늘 회식 한다더라. 피디님이 너희도 오고 싶으면 오라고 농담하셨다던데. 반쯤 진담이었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오라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 가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는 제작진이라니.
군산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현실감이 훅 밀려들어 온다.
출근시간대 기준 실시간 음원차트 3위.
어제 경연 무대 중에서 클립 조회수 1위.
실시간 검색어 1위.
연예면 메인에 들어있는 뉴블랙 분석 기사부터 라디오에 나오는 경연곡까지.
아침부터 하나씩 확인하던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로 조합하고 나니 순간적으로 아득했다.
……이거 실화냐.
“…….”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머’ 하는 내 표정에 상대가 웃으며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혼잡한 강남 거리.
배기관으로 하얀 김을 뿜어내는 버스, 자동차의 물결. 횡단보도를 지나는 이어폰 낀 사람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인생의 마지막 후렴구가 귓가에 들려온다.
물론 여기 있는 차들과 행인들이 죄다 PBS의 라디오를 듣는 건 아니겠지만 전국적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면 적지 않은 수가 이 노래를 듣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꽤 많은 수는 ‘아, 어제 나온 그 노래구나’ 하겠지.
생각을 확장하고 또 확장하다 보니 어느 순간 머리가 일시정지할 만큼 범위가 커져서 멈췄다.
“와…….”
“왜 그래?”
“어제 진짜 대박 난 거였네요.”
“…어째 한 템포 느린 반응이다만. 그렇지. 대박이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걸로 놀라기는 이를걸.”
“네?”
내 물음에 원석이 형이 슬쩍 웃으며 말했다.
“회사 가면 실장님이 알려주실 거야. 어젯밤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
* * *
레몬 엔터 앞에 도착해 내렸을 때 마침 근처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던 막내와 마주쳤다.
패딩에 둘러싸인 뽀얀 얼굴이 반가움으로 빛났다.
“우주 혀어어엉~!”
“지호야아아!”
둘이 부둥켜안고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멀찍이 보이는 사생을 피해 회사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마스크를 내리고 다시 한 번 환호했다.
“지호야아아~!”
“우주 혀엉!”
둘이 손을 맞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야. 우리 떴다, 떴어.”
“형형, 저 대박이에여. 어제 초딩 때 친구들한테까지 연락 온 거 알아여? 글고 울 아빠 거래처 사람들도 다 봤다고 아빠한테 안부 문자 보냈는데, 완전 대박신기 개신기 짱신기…….”
“그니까 나도 할머니 지인들한테 한참 사인해 줬다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꺄르륵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키카드 찍는 소리와 함께 비니를 쓴 두루미가 입장했다.
“뭐야.”
불퉁한 얼굴이 우리에게 향했다.
“……둘이 회사 현관에서 뭐해요?”
우리가 곧바로 달려갔다.
“리혁아아~!”
“리혁이 혀어엉!”
“떴다 떴다~ 우리 삼인 떴다 춤 추자!”
“……창피하게 진짜. 난 이런 거 안 해요.”
지호랑 나랑 시무룩하게 ‘그래…’ 하면서 몸을 축 늘어뜨리자 녀석이 스텝을 두어 번 밟아 주었다.
“예이!”
다시 신이 난 우리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던 리혁이가 말했다.
“올라가요. 회사에서 우리한테 알려 줄 거 있다면서요.”
“가야지. 물론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보자.”
내가 손가락으로 물었다.
“무엇을 타고 올라간다?”
“엘리베이터!”
“……진짜 안 엮이고 싶다.”
연습생 때는 눈치 보인다는 이유로 계단만 고집하던 우리였는데, 다시 한 번 성공의 맛을 즐겼다.
리혁이도 ‘흥’ 하지만 내심 설레는 표정이었다.
띵.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우리는 흐뭇한 얼굴로 3층까지 올라갔다.
“아, 맞다.”
사방이 꽉 막혀서 도망갈 곳이 없는 철제상자에 들어오자 할 일이 막 떠올랐다.
가방을 주섬주섬 열어서 짐을 뒤적였다.
“뭐예요. 그 꽃무늬 가방은?”
“할머니랑 쇼핑할 때 새로 사 왔어. 이쁘지?”
“……창고에 넣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네여.”
“우리 할머니가 골라 준 건데.”
“그만큼 소중하니 잘 보관해야 한다는 뜻인 거져.”
위기를 모면한 우리 막내가 조만간 자기랑 쇼핑 한 번 가자며 내게 말을 해 왔다.
그 동안 문이 열리고, 나는 문제의 물건을 꺼내서 리혁이에게 건넸다.
꽃이 그려진 봉투 두 장이었다.
“이건 뭐예요, 갑자기…?”
“네가 편지 써줬잖아.”
상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구구절절 자기 속마음이 담긴 편지를 준 기억을 자체 소거했는지 눈에 띄게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내밀었다.
“자, 받아. 나와 할머니가 쓴 답장이야.”
“……무, 무슨 소리에요. 난 편지를 쓴 기억이 없어요.”
“맞다. 저두 써왔는데.”
그러면서 패딩 안주머니에서 ‘해피 설날!’ 하는 엽서를 내미는 지호였다. 막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열면 노래도 나와여.”
“느아아아……!”
바람처럼 사라지는 우리 하루살이를 보며 둘이 깔깔거렸다.
하여간 달리기는 빨라서.
그렇게 먼저 회의실 안으로 달려가는데.
“느아아아—!”
이번에는 다시 밖으로 도망쳐 나온다. 뒤이어 문이 발칵 열리고 두 인영이 튀어나왔다.
비주가 애타게 손을 뻗었다.
“리혁아아! 형이 편지 써온 거 왜 안 받아! 그러면 형 서운해!”
“저리 가요!”
곧바로 중현이가 터미네이터처럼 따라붙었다.
“문자 왔숑. 문자 왔숑.”
“으아아아!”
신이 나서 리혁이를 추노하는 두 동갑내기의 모습에 지호랑 같이 바닥에 엎어져서 흐느꼈다.
미치겠다. 김중현 진짜.
이내 현장에서 검거된, 잔뜩 얼굴이 벌게진 우리 두루미에게 편지를 안겨주는 걸로 결말을 맺었다.
“……괜히 썼어.”
혼자 회의실 구석에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수치심을 달래는 녀석을 흘깃 바라보며 두 녀석과도 인사를 나눴다.
“휴가 잘 보냈어?”
“네, 저 너무 행복했어요. 형. 엄마가 흥이 나서 노래방 가야 한다고 해서 다 같이 노래방 가서 탬버린도 치고……. 맞다. 형. 저 탬버린 안무 만들었는데 볼래요?”
“고기 조금 먹었는데, 형이 저 보고 작작 좀 먹으라고 했어요. 엄청 억울했는데…….”
저마다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내뱉는 동생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 주었다.
어제 방송 이야기부터 우리가 거둔 성과까지.
회의실을 점거하고 폭풍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문이 달칵 열리고 두 명이 들어왔다.
석환 형과 홍서영 대리님이었다.
“안녕하세요!”
풀 충전해서 넘쳐흐르는 우리의 텐션에 둘이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석환 형이 깍지를 끼며 말했다.
“몇 가지 전달해 줄 사항들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어. 어제 방송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모를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꺼낼 이야기를 기다리며 우리가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을 때였다.
“아, 맞다.”
석환 형이 까먹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리혁아, 편지 잘 받았다. 모르는 척 해달라고 했는데 내가 그럴 성격이 안 돼서. 여기 답장.”
“아, 나도.”
그러면서 홍 대리님이 서류철에서 예쁘게 접힌 편지 하나를 꺼냈다. 둘이서 편지를 건네주었다.
“…….”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귀를 전구처럼 빛내는 누군가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