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64화
“흐하핫!”
K팝 콘서트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다 같이 아침을 먹을 때, 막내가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여. 지호 마커 표정 슉슉 바뀔 때 개쩔었음, 유유래요. 유유!”
“우유 더 줄까?”
“네! 엇… 아니, 형. 제가 이렇게 쩔었대잖아여. 무대를 들었다 놨다고 얘기 나오는 중이라니까여.”
“와, 우리 막내 대단하네.”
“……제발 영혼을 좀 담아서 말해여. 형.”
지호가 신이 나서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시선은 온통 태블릿 PC에 가 있었다.
코코아의 달콤한 맛을 즐기며 베이글을 한입 베어 물었다.
요즘 팬카페를 제외하면 인터넷 반응을 안 보고 있었는데, 간만에 검색하니 너무 재미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동생들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화면에 코를 묻는 중이었다.
“호오…….”
“오호. 이건 저장.”
“호오오오.”
‘오호’와 ‘호오’하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고, 지호가 ‘형들! 형드을!’ 하면서 우리를 부르짖었다.
내가 눈짓을 했다.
‘쓰담.’
‘라저.’
막내의 양옆에 앉아 있던 비주와 중현이가 스마트 기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만 뻗어 양쪽에서 지호를 쓰다듬어 주었다.
급격히 온순해지는 걸 보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우아하게 커피 잔을 홀짝이던 리혁이가 물었다.
“여전히 그거 찾고 있는 중이에요?”
“응.”
“그거 말해도 알아차리기 힘들다니까요. 그렇게 숨겨놨는데.”
“그런가…?”
내가 검색하는 건 어제 콘서트 도중에 밝혔던 Flower Dance와 바람꽃의 상관관계였다. 두 곡을 역재생하면 다른 곡의 멜로디가 나온다는 것.
지호가 키득거렸다.
“어제 그거 말할 때 형 표정 진짜 웃겼는데. 이 곡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후후후.”
우리 형조롱이의 성대모사에 주변에서 같이 밥을 먹던 매니저 형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녀석들도 가세했다.
“전 그래도 그 표정 진짜 귀여웠어요.”
“우주 형 그거 말할 때 코 되게 벌렁거렸는데. 눈도 엄청 커지고.”
“이거 봐요. 중현이 형이 눈치를 챘을 정도면 말 다했죠.”
“맞아요. 저 눈새에요. 형.”
“푸흡-!”
자부심 가득한 우리 풍뎅이의 모습에 이제는 아예 껄껄 웃는 매니저 형들이었다.
“내가 어제 그렇게 신이 나 보였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제 Flower Dance의 비밀을 말할 때 엄청 설레긴 했다.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재단사가 왜 그리 입이 근질거렸는지 이해된다고 할까. 어찌나 말하고 싶었던지 공연 전부터 인중이 간질거렸다.
왜냐하면…….
“아니, 아무도 안 알아주잖아.”
Flower Dance를 발매하고 일주일.
이주일, 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귀썰미 좋은 팬이 인터넷에다 ‘헉! 우리 애 개천재! 이런 노림수라니!’ 하면서 감탄하기를 바랐는데. 어제 공연 전까지 그런 수플레가 한 명도 나와 주지 않았다.
심지어 후속곡으로 음방을 뛸 때도!
아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인정이나 관심 받는 걸 즐기는 관종으로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서, 결국 이번 K팝 콘서트를 계기로 오픈한 거였다.
“어디 보자.”
수플레들의 반응이 어떤지 검색을…….
[어제 우주가 밝힌 플댄과 바람꽃의 비밀]
오. 있다.
어제 콘서트에서 말했던 일본어 멘트의 전문이 번역되어 수플레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정독했다.
-헐 대박;;
-지금까지 들으면서 한 번도 몰랏는데
-진짜로 역재생하면 플댄 나와????
-나 이런 떡밥 너무 좋아
-이거 어제 덕들이 다 실험해봤는데 실제로 플댄 역재생 =/= 바람꽃임. 약간 차이가 있어
-??? 무슨 차이?
-그러니까 이게.. 아.. 뭐라고 해야되지 우주가 엄청 복잡하게 꼬아놓음
-ㅇㅇ 거의 고난이도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메인 멜로디를 거꾸로 재생하면 두 곡이 완벽하게 대칭되는데 곁다리로 넣은 멜로디는 저마다 변주가 들어가 있슴. 걍 데칼코마니를 했는데 양쪽에 우주가 서로 다른 배경을 복잡하게 그려넣은 거라고 보면 됨
-?
-다시 설명 좀
-큰 그림 그려놧는데 팬들이 몰라서 우주가 슬퍼함
-아하 ㅇㅋㅇㅋ
-뭔진 모르지만 일단 소름돋을게
내가 예상한 반응보다는 뭔가 ‘호오… 우주에겐 큰 뜻이 있었구나’ 하는 느낌이다.
“……너무 어렵게 꼬아 놨나.”
“만들 때 좀 쉽게 가자고 A&R팀 분들이 그랬잖아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모른다고.”
“그러시긴 했지.”
리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시무룩한 기분을 느낄 때, 리혁이가 내 그릇 위에 버터 바른 빵을 한 조각 올려 줬다.
“고마워.”
그걸 우물거리며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다음 앨범 만들 때는 이런 설계 같은 걸 좀 쉽게 넣어볼까 봐. A&R팀분들 조언도 더 적극 반영하고.”
“그래요. 기왕이면 안무도 적당한 노래로…….”
“맞아요.”
비주가 생선을 가지런히 발라 가며 답했다.
“이번 바람꽃은 안무가 너무 쉬웠어요. 팬분들이 무대 보는 재미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
“비주 형. 리혁이 형 지금 울어여.”
“앗… 리혁아. 괜찮아. 다 같이 열심히 하면 돼. 생강 쿠키 줄까?”
한동안 다음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네 번째 앨범.
아직 계획을 정확하게 짠 건 아니지만, 컴백 일정을 두고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단독 콘서트를 하려면 최소 25곡에서 30곡은 되어야 하는데.
그 동안 웰메이드로 만들겠답시고 곡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서 앨범 곡 숫자 자체가 적은 상황이었다.
그 덕분에 평론가들에게서 굉장한 호평을 듣긴 했지만.
문제는 지금 이대로 가면 세트리스트 중에서 꽤 많은 수를 커버 곡으로 때워야 한다는 거지.
다행히 밤바다라든가, 슬립의 OST, 명곡단의 인생처럼 앨범 외에도 좋은 곡이 많았지만 그래도 단독 콘서트에는 앨범 곡이 더 어울렸다.
그런고로 바람꽃의 기세도 탈 겸 컴백을 앞당기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한 터였다.
다음 앨범의 경우 작업이 훨씬 수월할 테니까.
작업할 때 가장 말도 잘 통하고, 황소처럼 체력도 좋은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중현아.”
“네. 형.”
“한국 가면 형이랑 찐하게 작업 한번 해 보자.”
“…….”
중현이가 흠칫하더니 들고 있던 모닝빵을 접시에 떨어뜨렸다.
지호가 감탄했다.
“와. 저 중현이 형이 저렇게 가슴 철렁한 표정 짓는 거 처음 봐여.”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중현아.”
“…….”
“형 눈을 봐.”
삐그덕, 고개를 드는 중현이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불꽃놀이 때처럼, 또 다시 영혼을 한 번 갈아 보자. 너와 나의 소울 송을 만드는 거야.”
“…….”
“주제도 우리 중현이가 좋아하는 힙합으로 가 보자. 자. 응원구호로 내가 힙, 하면 네가 합하자. 힙.”
“…살려 주세요. 형.”
“합! 와아아! 신난다!”
내가 손뼉을 치며 자축했다.
자기 일 아니라며 같이 춤추는 동생들과 덩실덩실 몸을 흔드는 동안 중현이가 입맛을 잃었다는 얼굴로 모닝빵을 우물거렸다.
우리가 그렇게 노는 사이.
“오?”
미튜브를 뒤적거리고 있던 원석이 형이 뭔가 발견했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우리가 관심을 보였다.
“왜 그래요. 형?”
“너희 무대 영상 보고 있었는데. 어제보다 댓글이 더 늘어난 것 같아서.”
“음? 원래 댓글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잖아요.”
“일본어 댓글이야.”
“……!”
우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말로 일본어로 된 새로운 댓글들이 미튜브 영상에 달려 있었다.
“어제 공연 보고 들어오신 분들인가?”
“모르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그래도 기분 좋네여.”
우리끼리 히히 웃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것이 하나씩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 * *
K팝 콘서트 다음 날.
공식 스케줄의 첫 포문은 잡지사 인터뷰였다.
일본에서 한류 잡지 중 발행부수 1위를 달리는 곳이었는데 화보도 함께 촬영했다.
「좋습니다! 좋아!」
뭘 해도 각이 산다며 사진작가가 싱글벙글 웃었다.
확실히 사진 찍히는 노하우가 생긴 것인지, 몇 장밖에 안 찍었는데도 벌써 쓸 만한 A컷이 한가득이었다.
화보 촬영을 끝내고 친절한 인상의 에디터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간단한 신변잡기 멘트가 이어진 후에 에디터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시선을 돌렸다.
「우주 씨는 감회가 새롭겠어요.」
「어떤 부분이……?」
「아버님께서 일본에서 엄청 유명하셨잖아요. 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선명주’란 이름을 모를 수가 없죠.」
근처에 서 있던 석환 형이 현지 코디네이터로부터 귓속말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하시모토 겐지였나.
최근에 계속 연락을 해온 일본의 유명 피아니스트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 듯했다.
혹시 질문을 그쪽으로 몰아갈까 봐.
매니저들이 질문의 방향에 따라 개입할지 말지 정하겠다는 듯 지켜봤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음… 아버지가 유명하셨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그 시절에 대해 잘 몰라서요.」
「앗. 그러겠네요. 나이가…….」
「스물하나예요.」
「헤에… 90년대면 완전 어렸겠네요.」
동생들이 님 양심 어디 갔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국 밖에서는 만 나이를 쓰니까.
에디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러겠네요. 우주 씨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
「감회보다는 기분이 좋다고 할까요. 저는 잘 모르고 있더라도, 많은 분들이 아버지를 좋게 기억하고 있고, 사랑해 주셨다고 하니 아들로서 기쁜 것 같아요.」
그런 대답을 한 뒤로는 같은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체로 질문의 질도 좋은 편이었고, 동생들도 시종일관 웃음 가득한 대답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에디터님과 다 같이 인증샷을 찍었는데, 인사를 하고 가려는 나를 그녀가 따로 불렀다.
「저기…….」
「네?」
「단독으로 같이 기념사진 찍어도 될까요?」
「그럼요. 어떤 포즈로 할까요?」
「혹시 이 포즈로.」
상대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모습에 곧바로 똑같이 따라해 줬더니, 곧바로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비밀을 얘기하듯 말해 주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선명주 씨의 광팬이었거든요. 중학교 다닐 때도 부모님 졸라서 공연 보러 다니고. 아, 당연히 지금도 여전히 팬이에요.」
「정말요?」
「네. 아드님이 오신다고 해서 얼마나 들떴는지 몰라요. 이번 인터뷰는 꼭 제가 해야 한다고 편집장님께 우겼거든요.」
어쩐지 우리 아빠 얘기가 나올 때 눈을 굉장히 반짝거리신다 했지.
최애의 아들인 건가.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신이 나서 말하는 30대 에디터의 얼굴에는 10대 때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어요. 공연을 보러 가면 악기가 정말 많은데도, 피아노 하나만 보였다니까요. 손을 움직이실 때마다 제 기분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했어요.」
그러더니 비밀이라는 듯 속닥거렸다.
「솔직히 일본에서는 하시모토 겐지 씨가 선명주 씨의 라이벌이라고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하.」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우리 아빠의 공연에 대해서 말하는 상대를 보며 따스함을 느꼈다.
아빠가 음악인으로서 세계에 이런저런 족적을 남겼다는데, 지금까지 피부로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가끔 가다 뮤카 때를 기억한 사람들이 ‘선명주 아들!’ 하면서 추억을 말하긴 했지만, 이렇게 해외에서 열성적인 팬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15년이란 시간 후에.
내 가족이 남긴 흔적을 남에게서 발견한다는 건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이다.
「저희 아버지에 대해 정말 많이 아시네요.」
「그럼요! 제가 넘버원 팬인걸요.」
에디터가 말했다.
「정말 마음씨도 상냥하셨어요. 공연이 끝나고 나서 어쩌다 뵙게 됐는데, 내일이 제 생일이라고 하니까 즉석에서 악기를 꺼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셨거든요.」
「좋은 추억이었겠네요.」
나도 애기 때 비슷한 기억이 있었다.
아빠랑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 주었는데.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길 때, 상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사진도 찍었는데, 오늘이랑 같은 포즈로 찍었어요.」
지갑을 꺼내서 사진도 보여 주는 팬이었다.
흐릿한 사진 속에서 유쾌해 보이는 우리 아빠와 긴장한 10대 팬이 함께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똑같았네요.」
「뭐가요?」
「제가 브이를 이렇게 손가락을 구부리듯이 하는데 지금 우주 씨처럼 똑같이 맞춰 주셨거든요.」
「아… 정말 그러네요.」
「너무 자상하셨어요. 역시 부전자전인 걸까요.」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런 추억들을 꼭 얘기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한참 동안 내게 좋은 말을 해주는 그녀였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쯤 그녀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우주 씨와 뉴블랙도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뉴블랙 분들의 사인도 같이 받아 가도 될까요?」
너무 흥분해서 받는 걸 깜빡했다는 말에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들을 향해 ‘사인!’ 하고 말했다.
마법 지팡이를 꺼내듯 진지한 얼굴로 마커펜을 꺼낸 동생들이 눈빛을 교환하고는, 동시에 뽁- 하며 뚜껑을 열자 에디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다섯의 사인이 담긴 종이를 받아가는 상대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두 번째 스케줄은 방송 녹화였다.
지상파나 케이블 예능은 아니었다.
그런 곳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야 출연이 가능한 곳이었다. 타국의 신인 가수가 한국에 오자마자 지상파 예능에 출연을 할 수는 없듯이.
괜히 우리가 자칭 라이벌 피아니스트 측의 제안에 혹한 게 아니었다.
대기실에서 메이크업 쌤이 붓으로 눈썹을 슥슥 수정해주고 있는데, 석환 형이 또 다른 소식을 알려왔다.
“또……?”
하시모토 측에서 만나자고 또 얘기가 들어온 모양이다.
“이번에는 그냥 밥만 먹자더라.”
“속이 안 좋다고 해.”
“이미 전달했어. 에이전시 측에서 알아서 잘 거절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이러다가 진짜 뙇! 하고 우리 앞에 등장하는 거 아냐?”
메이크업 쌤이 ‘아……’ 하며 붓을 든 손을 멈추더니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주야. 눈썹 좀 진정해 줘.”
“네.”
눈썹만 평온하게 일자로 만든 채 입만 여는 내 모습에 메이크업 쌤이 울다시피 웃었다.
석환 형이 내게 말했다.
“불쑥 찾아오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해 놨으니까.”
“어떻게 했… 아니다. 난 모르고 있을래.”
“그래. 좋은 마음가짐이야.”
메이크업 쌤 앞에서 얘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기도 하고.
분명 남을 공손하게 엿 먹이는 101가지 방법 중에서 하나겠지. 뭐.
‘와라. 뉴블랙.’ 하면서 손을 잡고 기다리고 있을 하시모토 일행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 동안 메이크업을 마치고 대기실을 나섰다.
「안녕하세요!」
스튜디오에서 기다리던 훤칠한 남자 MC가 우리를 맞이했다.
이곳은 일본에서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해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방송국 중 하나였다.
미튜브와 TV의 중간이라고 할까.
스마트폰의 DMB 등에서만 나오는 채널이다.
그런 까닭에 콘텐츠가 다양한 편이었는데, 지금처럼 한국 아이돌을 소개해 주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본 듯한 하얀 배경에 주르륵 나열된 푹신한 가죽 소파에 둘러앉았다.
자기소개를 마치고 바로 토크로 들어갔다.
「뉴블랙에서는 누가 주로 멤버들을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나요?」
우리가 모두 비주를 가리켰다.
일본어가 가장 유창한 리혁이가 설명했다.
「비주 씨는 정말 자상하고, 주변 사람을 잘 챙겨 줘요.」
「비주 형 최고.」
“대신에 잔소리도 많아요. …지금처럼 이렇게 카메라 안 보이는 각도에서 슥 흘기는 것도 잘하고요.”
미소를 짓던 MC가 물었다.
「의외네요. 우주 씨가 리더라고 해서 그런 역할을 맡을 줄 알았는데.」
「절대 아니죠. 이분은 그런 자상함과는 지구에서 우주 끝까지의 거리 정도로 멀어요.」
「그냥 할아버지에요. 음악 잘하는 할아버지.」
「……너희들은 끝나고 나서 두고 보자.」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한 내 협박에 동생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허…….」
「우리 큰일 났나 봐요.」
“기왕 망한 거. 고고.”
“아니… 얘들아…….”
「고고!」
「꺄르륵!」
흥이 났는지 거의 탱탱볼처럼 꺄르르! 하는 동생들의 모습에 MC의 기가 실시간으로 빨려 나갔다.
「그… 그렇군요.」
「할 말 더 있어요!」
“저도요!”
“이거 녹화 진짜 재미있다! 우리 평생 해요!”
방방 뛰는 동생들을 진정시킨 후, 토크 코너가 끝나고 간단한 게임을 하는 코너가 나왔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게임이죠? 바로 ‘몸으로 말하면 맞히기!’ 게임입니다.」
MC가 제작진이 건넨 카드를 받아 들고 말했다.
「예를 들어서 제시어가 ‘기린’이다 하면 한 명이 기린을 묘사해 주고, 팀원들이 그걸 맞히면 됩니다.」
「네!」
너무나 익숙한 게임이기에 우리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고로, 여러분의 도전 욕구를 고취시키기 위해 상금도 있습니다. 성공 시에 홍보 기회도 있고요. 퍼펙트! 하게 성공할 시에는 상금도 있습니다. 무려 50만 엔!」
「네?!」
「돈 나와요?」
우리 모두가 일어선 가운데 MC가 후후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정말 몸으로 말해요의 모든 문제를 맞히면 상금이 나오나요?」
「그럼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쉬운 거 같은데…….」
「맞아. 저희가 머리는 나빠도 몸은 좋거든요.」
상금 꽁으로 먹는 거 아닌가, 하고 진지하게 제작진의 안위를 걱정하는데. 어째 저쪽에서 웃고 있다.
「쉬워 보일 수 있겠지만, 여태까지 출연한 한국 아이돌 중에서 상금을 타 간 아이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아메바’ 같은 제시어도 있거든요.」
제시어의 면면을 보니 확실히 어렵긴 하다. 몸으로 표현하면 뭐가 뭔지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이벤트성 상금 같다고 해야 하나.
‘다트 던지기 성공하면 1억!’ 하는데 룰렛의 눈금이 나노미터인 것처럼.
하지만 상금이란 말에 일단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50만엔……!”
“한국 돈으로 얼마예여. 리혁이 형?”
“하필이면 지금이 엔저라서… 아마 현재 환율로 456만 원 정도.”
“대박. 야. 대왕돈까스가 400개야.”
“와. 100엔샵 가면 양말 5,000개.”
리혁이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난 정말 이 대화가 일본어로 번역이 안 됐으면 좋겠어요. 아니, 한국에 있는 수플레들도 몰라야 돼.”
그 동안 우리끼리 작전 회의를 했다. 특히 대표로 누가 나가서 모션을 설명하고 그럴지.
“우주 형이 나가야져.”
“형이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가장 적합하긴 하죠.”
제시어를 설명할 사람으로 동생들이 나를 꼽았다.
사실, 나도 그 방면에 관해서 재능이 있는 터라 나서려고 하던 차였다.
그때 리혁이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나가면 문제는 누가 맞혀요? 난 이런 거 맞히는 순발력이 별로여서.”
“그러네여.”
“맞아. 우리끼리면 오합지졸이잖아.”
“우주 형이 문제를 내고, 문제를 맞히는 방법은 없나…….”
자기들이 뭘 할 생각은 안 하고 날 부려먹을 계획만 짜는 동생들이었다.
“일단 맞히는 게 더 중요하니까. 문제 내는 건 중현이 형이 나가는 걸로 해 봐요.”
“음, 근데 문제는 우주 형이 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더 날로 먹을 수 있는 쪽을 골라야 해여. 형들.”
“그러면…….”
잠시 동안 옥신각신하며 회의를 마친 우리가 고개를 돌렸다.
「시작하기 전에 연습 게임을 한두 번 해봐도 되나요?」
「그럼요. 뭘 하든 좋습니다.」
* * *
MC 쿠니무라가 미소를 지었다.
‘귀엽네.’
여태까지 나왔던 다른 한국 아이돌들이 그랬듯이 상금을 타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뉴블랙이었다.
‘……어차피 성공 못할 텐데.’
이 게임은 어차피 성공률 0%였다.
50만 엔이라는 상금이 걸린 것부터 알 수 있었다. 난이도가 진짜 어려워서 실제 성공한다면 그만한 상금을 줘도 아깝지 않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제한 시간 내에 ‘백과사전’ 같은 단어를 몸으로 표현하고 맞히는 것이 쉽기나 한가.
「직접적으로 그 단어를 말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안 되고요. 오로지 몸으로만 해야 합니다.」
「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지금 대답하고 있는 ‘뉴블랙’이란 아이돌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마치 숨겨진 비밀 병기가 있다는 듯이.
‘뭐가 있나?’
하고 생각할 때, 키가 크고 훤칠한 미남이 문제 내는 곳에 섰다.
자기들끼리 ‘화이팅!’ 하며 우아아 한 후, 연습게임이 시작됐다.
제작진이 뉴블랙의 뒤편에서 주는 첫 제시어는 ‘권력.’
중현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어느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작진과 MC, 뉴블랙 멤버들이 동시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 * *
잠시 고민하던 중현이가 이내 ‘아’ 하며 포즈를 취했다.
살짝 느슨하게 기댄 포즈.
근엄함과 거만함 사이의 무표정 같은 얼굴로 중현이가 이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 순간.
우리 모두 흠칫했다.
저거……?
비주가 나를 돌아본다. ‘아니죠. 형?’ 그런 느낌으로. 옆에 있던 리혁이도 흠칫했다.
저 표정과 박수.
마치 어딘가 높은 곳에서 열병식을 내려다보며 박수를 치고 있는 것 같은…….
나침반이 저걸 본다면 N극을 파르르 떨며 북쪽을 가리킬 듯했다.
“……!”
MC의 동공이 흔들리고, 내가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눈을 가늘게 뜨고 지그시 바라보던 막내가 ‘흠’ 하더니 이내 ‘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지호가 손가락으로 중현이를 가리키더니 해맑게 웃었다.
“저거 누군지 알았어여! 김……!”
내가 다급하게 외쳤다.
“야! 막아!”
“막을게요!”
“저거 김……!”
“야야야야야야!”
“아니에요? 저거 김……!”
“야야야야야야!”
내가 ‘야야야야야’ 하면서 소음을 내서 막내의 목소리를 지우는 동안, 동생들이 지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그러는 한편.
“푸하하하!”
벙 찐 표정으로 바라보던 MC와 일본 제작진들이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지켜보던 우리 스탭들은 아예 엎어져서 흐느끼는 중이고.
반대편에 서 있는 곰 한 마리만이 ‘?’ 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