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65화
“……그러니까 그걸 말하면 안 되는 거라고. 지호야.”
“헐.”
막내가 손을 입에 올렸다.
“대박. 저 논란 일으킬 뻔한 거예여?”
“논란까지는 아니더라도. 언급하기에는 뭔가 좀…….”
“알았어여. 앞으로는 사석에서만 이름 부를게여.”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 막내를 일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끄흑!”
“으하하하!”
“끅! 끅!”
웃음가스 공격에 당한 사람들처럼 프로그램 제작진, 우리 스탭들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다.
훈남처럼 보이던 MC도 지금은 만화 속 개그 캐릭터처럼 웃고, 매니저 형들은 자기들끼리 붙잡고 흐느끼는 중이었다. 스타일리스트들도 거의 엉엉 울고 있고.
실시간으로 환장했던 우리와는 다르게 저 사람들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뒷목에 배어 나온 식은땀을 훔치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곰 한 마리가 쫄레쫄레 걸어왔다.
“저 왔어요. 님들.”
“중현아.”
“네. 왜요?”
“……아니다.”
태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이었다.
중현이가 급격히 초췌해진 우리를 보고 물었다.
“뭐가 웃긴 게 있었어요?”
“그…….”
이걸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되는 건가 할 때. 일단 제시어가 뭔지 확인하기로 했다.
저쪽에서 한글로 ‘권력’이라고 써 준 단어 카드가 보였다.
“…방금 그게 권력이야?”
“네. 맞잖아요. 권력.”
“틀린 말은 아니… 푸흡! 흐하하!”
다시 한 번 그 포즈를 보여 주는 중현이 때문에 이번엔 우리가 웃음이 터졌다.
녀석이 흠칫했다.
“……이게 웃겨요?”
어디가 웃긴 포인트지, 하면서 눈썹을 모으고 고민하는 녀석에게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지호가 중현이한테 슥 다가가서 속삭였다.
“형이 방금 국제 문제를 일으킬 뻔했대여.”
“진짜? 내가?”
“다른 형들이 그랬어여.”
……우리가 언제 국제 문제라고 했냐고.
저 깔때기 같은 입을 톡 때려 주고 싶다. 무슨 1을 말하면 10으로 왜곡해서 퍼뜨리는 막내였다.
비주가 말했다.
“일단은 중현이가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형.”
“맞아여. 형은 우리랑 맞히는 거나 해여.”
“오키오키.”
중현이가 흔쾌히 승낙을 한 후에 내가 타석에 나가기로 했다.
‘할 수 있죠?’ 하는 표정의 동생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풀 때.
리혁이가 MC를 불렀다.
「문제 내는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게요.」
「네… 네. 그러세요.」
MC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중현이 얼굴만 봐도 뭐가 연상되는지 연신 웃는 상대였다.
「자! 그럼 누가 나오실 건가요?」
「저요.」
내가 웃으며 손을 들었다.
* * *
MC인 쿠니무라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뭐지?’
우주가 손을 들자마자 촬영장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축구 경기의 한 장면 같다고 하나.
감독이 팀의 에이스를 내보내면서 팀원과 관중들이 의기양양해 하는 것 같다.
‘……어째 만화 속 사천왕이 떠오르는 것 같다만.’
우주 뒤에 서 있는 넷이 ‘흣흣흣’ 웃는 모습이 흡사 마왕성 휘하의 군단장들 같았다.
곧 이분이 게임을 휩쓸 것이다, 하며 예고하는 표정들.
멤버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카메라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던 뉴블랙 스탭들도 기대감 가득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몸을 잘 쓰는 아이돌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음악 방송에서도 트로피를 제기 차기하는 묘기를 보여 줬다고.
하지만 그와 ‘몸으로 말해요’가 어떤 연관 관계에 있는 건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운동신경과 몸으로 어떤 단어를 표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런데…….’
멤버와 스탭들의 표정은 이미 다 이긴 것처럼 웃고 있었다.
뉴블랙이 작전 회의를 하는 동안 뒤로 물러난 쿠니무라가 팔짱을 낀 PD에게 다가갔다.
「우리 상금 말이에요.」
「상금…?」
「몸으로 하는 이 게임, 다 맞히면 50만 엔 준다고 했잖아요. 진짜로 성공하면 줄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쿠니무라 씨.」
피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무슨 수로 다 맞혀? 문제도 어렵고. 제한 시간 내에 다 설명하지도 못할 걸. 상금은 재미로 넣은 거지.」
「불가능한 건가요. 역시.」
「성공확률 0퍼센트지. 일단 성공부터 하라 해. 상금이든 뭐든 다 줄 테니까.」
호탕하게 웃는 피디를 보며 쿠니무라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이제 준비를 끝낸 뉴블랙 멤버들에게 그가 다시 한 번 룰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제한시간은 5분. 총 30개 중에서 15개 이상을 맞히면 성공입니다! 오직 몸으로만 표현을 해야 되고요. 손가락으로 숫자 등을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30개 모두를 퍼펙트하게 맞힐 시에는 무려 50만 엔의 상금이 주어집니다!」
「상금! 상금!」
「자, 그럼 도전에 앞서서 포부를 들어볼까요?」
대표로 우주가 나섰다.
그가 촬영 조명을 한 차례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짓더니,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박규호 대표님.」
「대표 사마!」
「저희가 밥값, 벌어 가겠습니다.」
「벌어 가겠습니다아-!」
리더와 멤버들의 호흡이 아주 척척이었다.
우주가 ‘먹은 만큼!’ 하고 외치자 멤버들이 ‘벌어 가자!’ 하고 받아주는 모습에 MC가 미소를 지었다.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네.’
지금까지 많은 한국 아이돌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지만, 이렇게 특이한 팀워크를 자랑하는 그룹은 오랜만이었다.
보고 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까.
왜 한국에서 인기가 있다고 하는지 대번에 이해가 갔다.
「자, 그럼 준비할까요.」
「네.」
기지개를 쭉쭉 켜며 몸을 풀던 우주가 허리를 살짝 숙이고, 멤버들도 같이 자세를 잡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쿠니무라가 진행카드를 휙 내려쳤다.
「그럼, 시작!」
첫 번째 제시어가 주어졌다.
‘금메달’이란 단어에 MC가 웃음을 삼켰다.
‘처음부터 어려운 게 나왔군.’
그냥 메달이라면 모를까.
숫자 표현 없이 금메달이라고 정확히 맞히기는 어려웠다.
대개 이 상황에서 30초 가까이 헤매며 서로에게 환장하는 모습이 바로 재미 포인트…….
“음?”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주가 첫 2초 동안 쇼트트랙 선수 같은 포즈를 취했다.
정말 실제 경기를 보는 듯 생생한 느낌. 뒷짐 지는 자세부터 시작해서 어딘지 모르게 속도감까지 느껴졌다.
그러더니 결승선에 통과한 것처럼 양손을 번쩍 들며 기뻐하더니.
계단을 올라가듯이 다리를 움직였다.
한 번. 두 번.
연단에 올라가는 것처럼 흉내를 내더니 이윽고 목에 건 무언가에 입을 쭉 맞췄다.
“금메달!”
뉴블랙 멤버들이 동시에 외치자 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
쿠니무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8초 남짓한 시간 동안 우주가 제시어를 묘사하더니 남은 2초 동안 뉴블랙 멤버들이 맞혀 버렸다.
전례 없던 일이었다.
보통 금메달 같은 단어가 나오면 ‘메달?’ 하다가 ‘메달!’ 하고, 그에 환장한 다른 멤버가 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며 다시 메달을 한참 동안 표현해서 30초를 날리는 패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10초도 채 되지 않아 첫 문제가 끝났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두 번째 제시어가 흘러나왔다.
롤러코스터.
우주가 몸을 뒤로 쭉 피더니 양손으로 안전바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후우욱- 하며 중력에 의한 움직임을 리얼하게 표현했다.
“롤러코스터!”
다음은 웨딩드레스.
우주가 손에 꽃다발을 든 채, 마치 진짜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걸었다.
‘뭐지. 결혼을 해 봤나?’
쿠니무라가 멍하니 바라볼 때, 뉴블랙 멤버들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결혼?”
“드레스?”
우주가 둘을 합치라는 듯 ‘+’ 를 그려 보이자, 비주가 ‘아!’ 하며 손뼉을 쳤다.
“웨딩드레스!”
리더가 허공에 하이파이브 하는 시늉을 하자, 신이 난 메인댄서가 그것을 받아 손뼉을 멀리서 댔다.
그렇게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7단어가 끝났다.
속전속결로 해내는 모습에 쿠니무라는 제작진을 바라보았다.
「……50만 엔?」
피디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조연출이 끄덕하며 ‘50만 엔이네요’ 하다가 피디의 눈길에 깨갱했다.
제작진들이 침 넘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그런데 저희 50만 엔 준비… 가능합니까?」
누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희망을 걸어야지.」
「희망이요?」
「뉴블랙이 실패할 거란 희망.」
「과연…….」
「과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린 지금 망했어요.」
한편, 제작진 중에서도 그와 똑같은 의문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쟤는 정체가 뭐지?」
「……뭐야. 방금 비보잉 동작하는 거 봤어요? 저건 알아도 몸으로 하기 힘든 동작인데.」
「오. 그래도 어려운 거 하나 나왔다.」
‘세균’이라는 키워드에 제작진이 기대를 품었다.
‘저건 어렵지.’
…라고 모두가 생각할 때, 우주가 ‘에취!’ 하더니 누군가 질색하는 표정을 따라했다.
멤버들이 동시에 환하게 웃었다.
“서리혁!”
“아냐! 저거 나 아니라고!”
“리혁이다!”
뉴블랙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리더가 고개를 슥 젓고는 콧물이 묻은 손수건을 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감기?”
리더가 가상의 손수건을 들어 보이더니 손을 오므리고는 눈에 가져다 댔다.
이번에는 현미경으로 입자를 연구하는 과학자 같았다.
“병균!”
“세균!”
살짝 고비가 왔었던 ‘세균’조차 10초를 겨우 오버한 시간이었다.
8초에 한 문제 꼴로 맞히기 시작하면서, 2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30문제 중 15문제가 끝나 버렸다.
프로그램의 피디가 해탈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쿠니무라는 불구경 하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어차피 상금은 제작진이 처리할 문제니까.
‘쟤는 뭘 하다가 가수가 된 거지.’
볼 때마다 감탄이 나왔다.
제시어를 보자마자 1초 만에 머릿속으로 프로세스를 거치고는 바로 행동 묘사에 들어갔다.
머릿속으로 궁리하는데 몇 초 정도가 걸리기 마련인데 망설임이 하나도 없다.
빠른 두뇌 회전.
거기다 행동 묘사도 뛰어났다.
보고 있다 보면 미튜브 한 편이 뚝딱이라고 할까. 선우주의 머리 위에 재생 버튼이 환각처럼 아른거렸다.
‘……괜히 의기양양했던 게 아니구나.’
왜 뉴블랙의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이 그토록 자신감이 넘쳐 보였는지 이해가 갔다.
지금도 그들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50만 엔. 50만 엔.”
“우주야. 힘내라……!”
“어머, 오늘 회식 각이에요? 우주야아아!”
그가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참으로 다행인 대화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오……!」
「살았다!」
축 처져 있던 제작진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6번째 제시어.
바로 피라루쿠였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될지 감도 안 오는 단어였다.
동물인 것 같은데 무슨 동물인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으레 그러하듯 피, 라, 이런 식으로 한 글자씩 설명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바라볼 때.
우주의 얼굴에 역대급으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웃어?’
‘왜 웃지?’
‘……뭐지. 불길한데.’
물속에서 생선이 헤엄치듯 슉슉 몸으로 표현하던 우주가 손가락으로 리혁을 가리켰다.
“이이익……!”
이마 끝까지 벌게진 얼굴의 누군가가 발을 굴렀지만, 나머지 셋이 진지하게 외쳤다.
“피라루쿠!”
뉴블랙의 스탭들이 웃음을 터뜨렸고, 프로그램 제작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피라루쿠가 뭔데?」
「아마존 강물고기라는데.」
「……?」
리혁과 정체불명의 아마존 강물고기가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텔레파시?」
누군가의 중얼거림과 함께 제작진은 미궁에 빠져 들었다.
오직 자료 조사를 담당한 스탭만이 실수를 깨닫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날 뿐이었다.
* * *
이제 마지막 문제.
제한 시간을 무려 1분이나 남겨둔 가운데 마지막 30번째 제시어가 나왔다.
마지막 제시어는 ‘군대.’
마커펜으로 굵직하게 쓴 ‘군대’를 본 순간 잠시 움찔했다.
군대를 어떻게 묘사하지.
내가 ‘하……’ 하며 한숨을 살짝 쉬고는 행동을 묘사하려는데, 우리 애들이 동시에 외쳤다.
“군대!”
“저거 군대다!”
“군대네! 군대!”
근처에서 제작진 중 한 명이 진지한 얼굴로 ‘혼또 테레파시…?’ 하는 듯한 혼잣말이 들렸다.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지을 때.
MC의 ‘퍼펙트! 성공입니다!’ 하는 말에 동생들이 와아아아 하며 달려들었다.
“우주 혀어어엉!”
“크헉……!”
몸통 박치기 누구야. 김중현이야?
숨이 턱 막히는 가운데 동생들의 손길이 강아지 발바닥처럼 날아들었다.
“형! 잘했어여!”
“오늘 맛있는 거 먹어요! 우리!”
“피라루쿠는 괘씸하지만, 오늘 하루 동안은 내가 칭찬 듬뿍해 줄게요.”
정신없이 나를 둘러싸고 와아악 하는 동생들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내가 물었다.
“아니, 마지막은 어떻게 맞힌 거야?”
“아. 군대여? 형이 묘사 엄청 잘했던데. 사나이가 간다 얘기 나올 때마다 한숨 그렇게 쉬잖아여.”
“아…….”
“저도 보자마자 알았어요! 형!”
비주가 환하게 웃으며 ‘묘사 대박!’ 하며 말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긴 했지만, 일단 성공은 성공이니 기뻐하기로 했다.
“와아아악!”
“날 찬양해라. 이 작은 동생들아!”
“선우주! 선우주!”
“우유빛깔 선우주! 사랑해요 선우주!”
동생들이 불상에다 절을 하듯이 나를 받들어 모시는 동안, 나도 양팔을 쭉 펼치며 환호를 즐겼다.
우리 스탭들도 자기 팀의 홈런을 본 관중들처럼 박수를 치거나 엄지를 척 들고 있었다.
동생들을 주렁주렁 매단 내가 카메라에 다가가 세리머니를 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대표님! 제가 상금을 탔어요!」
‘요!’ 하며 동생들이 다 같이 구애의, 아니 승리의 춤을 추며 방방 뛰었다.
“야야~! 야야야야~!”
“야야야야 야야야!”
MC가 진행카드로 입을 가린 채 막 웃는 동안, 제작진이 암울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뒷배경으로 비가 내리는 CG를 넣어 주면 딱일 듯했다.
방방 뛰는 우리와 축 늘어진 제작진이 냉탕과 온탕처럼 대비가 되는 순간이었다.
한참 동안 자축을 끝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희 상금은 정말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예, 약속을 했으니까요.」
MC가 피디님을 흘깃거리자, 그쪽에서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벤트성 상금이라 못 받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오늘 밤에 동생들이랑 스탭들이랑 다 같이 맛난 거 먹으러 가야지.
「저희 홍보는요? 홍보도 하는 거 맞죠?」
「당연히 하셔야죠.」
곧이어 마이크를 하나씩 받아들고는 바람꽃을 안무 없이 보컬 버전으로 불렀다.
진지하게 화음을 쌓아 가는데 제작진의 반응이 묘했다.
화음이 더해지고 흩어질 때마다 감탄하다가, 우리 얼굴을 보고는 흠칫하며 고개를 흔들다가. 다시 노래를 들으며 ‘하아아’ 하는 미소를 지었다가 흠칫하길 반복했다.
우리 얼굴을 볼 때마다 뭔가 몰입이 깨진다는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노래를 마치고 동생들과 일렬로 모였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녹화의 마무리를 앞두고,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어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은 끝이 났다.
우리와 악수를 차례차례 나누던 PD님이 웃으며 말했다.
「50만 엔을 정말 타 가는 경우는 처음이네요.」
「하하하.」
「윗선에다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게 슬프긴 하지만, 기왕 이리 된 거 제대로 홍보나 해 볼까 합니다.」
「홍보요?」
「사상 최초, 50만 엔 달성에 성공한 아이돌! 이런 예고로 가야죠!」
확실히 프로는 프로였다.
바로 어떤 식으로 방송 홍보에 쓸지 설명하는 피디의 모습에 감탄했다.
「요즘 들어 시청률이 답보 상태였거든요. 이번 뉴블랙의 출연이 반전의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어요. 오늘 역대급 장면이 많아서…….」
「정말요?」
우리끼리 서로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분량을 그렇게 잘 뽑았나요? 그냥 평소처럼 했는데.」
「……평소가 그렇다고요? 오늘 컨디션이 유독 좋은 게 아니고요?」
「오늘은 보통 정도….」
내 말에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디님이 진지한 얼굴로 손을 덥석 잡더니 ‘다음에 또 나와요’ 하고 부탁을 했다.
스튜디오 밖으로 우리를 환송하면서 기대하라는 듯 말했다.
「기대하세요. 오늘 방송에 대한 반응, 정말 좋을 테니까요.」
* * *
이벤트성 상금이라고 안 주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당일에 바로 지급이 됐다.
“여러분! 오늘이 무슨 날일까요!”
“회식!”
“누가 쏘는 거죠?”
“우주! 우주!”
스탭들과 함께 다 같이 좋은 식당에 가서 돈을 팡팡 썼다.
“우주님, 잔을 채워드릴게요.”
“네.”
내가 돌아다니며 고생하셨어요, 할 때마다 잔에 제로 콜라를 채워 주는 스탭들이었다.
그렇게 이틀 연속으로 푸짐한 밥으로 위장을 채운 우리는 기세를 몰아 남은 스케줄도 하나씩 해치웠다.
「잘 부탁드립니다!」
프로모션의 대부분은 잡지사와의 인터뷰였다.
우리나라라면 연예부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을 텐데, 여기는 잡지의 비중이 크다고 들었다.
종류만 3600개에 분류 카테고리만 100개가 넘게 있다나. 여러모로 환경이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일정은 바로 쇼케이스.
「여러분, 반가워요! 우리 처음 만나죠?」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연장에서 천여 명의 팬과 함께 만남을 가졌다.
무대도 하고, 추첨 이벤트도 진행하고.
끝에 가서는 수플레들과 함께 일본어로 개사한 별빛을 불렀는데, K팝 콘서트 때와는 또 기분이 달랐다.
무언가 포근하고 따스한 것이 우리 가슴 속에 들어온다고 해야 하나.
K팝 콘에서는 채워지지 않았던 무언가가, 충전되듯이 우리의 에너지를 회복시켜 주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타국에서도 우리를 이토록 반짝이는 눈으로 본다는 팬이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이게 바로 가수들이 절대 이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고.
쇼케이스를 끝내고 취재를 나온 케이블 TV의 연예 정보 프로그램과도 간단한 인터뷰를 가졌다.
「신기하네요.」
리포터가 말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이렇게 팬층이 있다니…….」
에이전시 측에서 말해 주기로 쇼케이스 신청 인원도 1만 명을 훌쩍 상회했다고 말하던데.
일본 활동에서도 순풍이 불었다.
보통의 소속사라면 ‘반응 좋은데? 이대로 일본에서 몇 달 눌러앉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다만 그러기에는 우리의 국내 활동이 압도적으로 잘 되고 있는 터라.
프로모션 일정을 깔끔하게 끝마치고 바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 피곤하다…….”
동생들과 도쿄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자유시간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일본 일정은 끝이 났다.
할머니에게 줄 선물, A&R팀을 비롯해 회사 직원들에게 줄 선물을 가득 안은 채 비행기에 올라탔다.
“…….”
“…….”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생이 따라붙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선캡 모자를 쓰고 드러누웠다.
찍을 테면 찍으라지.
내 꽃무늬 광택 선캡이나 봐라.
* * *
“한국이다!”
“아아, 이 한국의 향기 너무 좋다아. 제비꽃 냄새.”
“그거 제 샴푸 냄새예요. 형.”
“한국의 샴푸 냄새 좋다아…!”
김포공항에 내린 우리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에는 K팝 콘서트 일정까지 끼어 있었던 탓에, 우리는 역대 최장기간 동안 해외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이라지만 그래도 한국에 비할 수는 없다고 할까.
확실히 심적으로 안정이 된다.
김덕순 여사와 내가 같은 땅을 밟고 있다는 것이.
“고생했다. 얘들아.”
“고생하셨습니다아-!”
매니저들과 우리가 피곤한 미소를 교환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무대 연습하고 뛰고, 이 사람들은 또 현지 에이전시 측이랑 같이 다니며 미팅, 미팅, 미팅을 거듭했으니까.
모두가 강행군이었다.
“숙소로?”
“숙소!”
원석이 형이 운전대를 잡은 가운데, 내가 석환 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형은? 회사로 가?”
“나는 가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또 있어서.”
“좀 쉬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인마. 너희 다 숙소 들어가서 푹 쉬어. 오늘 하루는 아무것도 할 생각하지 말고.”
“네!”
인천공항이 빠르게 멀어지는 가운데, 동생들과 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였다.
“참. 우주야.”
“스으읍. 네.”
“홍보팀에서 내일 아침에 회사로 오라더라.”
“왜?”
“너희 응원ㅂ…….”
벌떡.
그 순간 관에서 일어난 흡혈귀처럼 넷이 동시에 정자세로 앉았다.
“누구에여. 누가 봉 소리를 내었어?”
“응원봉이죠? 실장님. 응원봉?”
“어… 그, 그래. 응원봉 시제품이 나왔는데, 내일 아침에 오라…….”
“그럴 순 없지.”
우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차 돌려 주세요. 원석이 형.”
“저희는 회사로 갑니다.”
응원봉 시제품이 나왔다는 이야기에 우리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드디어……!”
“진짜 이 날만을 기다려 왔죠.”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우리가 손뼉을 서로 마주쳤다.
“얘들아, 응원봉이 나왔다…!”
“저 울 것 같아요. 형.”
“휴지 줄까?”
“우리 이럴 때가 아니에여! 축하해야지!”
지호가 노래를 틀고 우리가 흥겹게 축하의 춤을 추고 근처에 앉은 석환 형이 넋 나간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산책 3시간 시켜줬는데 여전히 방방 뛰는 리트리버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희 안 쉬니……?”
“예이!”
우리끼리 신이 나서 춤을 출 때, 중현이가 코를 긁적이며 물었다.
“근데요. 형.”
“응?”
“왜 이렇게 뭘 두고 온 거 같죠. 뭔가 까먹고 있는 게 하나 있는 거 같기는 한데…….”
“그러게. 뭔가 잊고 온 듯한…….”
생각을 해내야 하는데 전혀 생각이 안 난다고 할까. 뭔가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는 듯한데.
곰곰이 고민을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기억도 안 나는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겠지.
“예이!”
다시 흥겹게 춤을 췄다.
* * *
일본.
세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차를 마셨다.
「뉴블랙은 언제 올까요?」
「기다려 보죠. 이번 제안은 누가 봐도 혹할 만한 것으로 준비를 해서…….」
「하긴. 이 정도면 우리의 존재감도 전해졌을 터.」
‘얼른 와라, 뉴블랙’ 하면서 차를 홀짝이는 하시모토 일행이었다.
‘뉴블랙아. 와라…….’
‘왜 안 오지.’
‘와야 되는데. 오겠지?’
그러나 그들이 간절히 기원하는 동안, 뉴블랙은 한국 땅에서 요들송을 부르며 춤을 추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