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74)화 (274/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74화

눈앞에 밧줄이 있다.

두께가 내 팔뚝만해서 항구에서 배를 정박할 때나 쓸 것 같다.

휘이이잉-

뜨뜻한 여름 바람에 운동장의 모래가 흩날렸다.

내 눈이 촉촉한 건 모래가 들어가서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밧줄 때문일까.

“어떻습니까. 교육생?”

“…….”

“정말 재미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8번 같은 우수한 교육생에게만 주는 혜택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특공대원들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교육생들, 부럽지 않습니까?”

“너무 부럽습니다!”

출연진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자기 일 아니라고 행복해 하는 얼굴이었다.

카메라맨들이 나를 찍는 동안 높이를 가늠했다.

대략 7미터쯤 될까.

체감상으로는 거의 3층 건물 높이였다. 저 까마득한 꼭대기까지 대체 어떻게 올라가라는 걸까.

고광순 경사가 코를 긁적였다.

“누가 시범 보일래? 정아? 아니면 경준이?”

“제가 하겠습니다.”

정글 모자를 쓰고 있는 박경준 경장이 나섰다.

그가 다른 출연진에게도 보라는 듯 한 손으로 밧줄을 붙잡았다.

“겉보기엔 어려워 보여도 실제로는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 요령만 익히면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오른발을 밧줄 위에 올리고 왼발을 밧줄 아래에 두었다.

그러곤 계단을 밟듯이 오른발을 위로 쑥 올리고, 다른 발을 그대로 디딤판 삼아 올라갔다.

중간 지점까지 올라가는 데 딱 3초였다.

“우와……!”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피식 웃으며 내려오던 박 경장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예!”

“괜찮습니까? 한 번 더 시범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내 대답에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정아 경장이 다가와 특공대에서 쓰는 장갑을 내밀었다.

“목장갑 빼고 이거 껴.”

“감사합니다.”

손에 낀 PT용 목장갑을 벗고 상대가 건네준 장갑을 꼈다.

확실히 착용감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이거 받으면 오늘부터 우리랑 1일이다?’ 같은 느낌이라 찝찝하긴 했지만.

뒤에서 사람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한 번밖에 안 봤는데 괜찮으려나.”

“저거 어떻게 하는지 봤어요? 헷갈리네. 아니, 발을 올리고 하나는 밑에 깔아주고. 그런 건가?”

“쉿, 한다. 한다.”

밧줄을 붙잡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봤던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오른발을 밧줄 위로 올렸다.

그러곤 몸을 움직였다.

쑤욱-

“오?”

진짜 되네. 이거.

생각만큼 힘이 들지도 않았다. 적당히 밧줄을 붙잡은 채 힘을 주니 쏘옥쏘옥 올라갔다.

그때마다 ‘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7미터 정상까지 오르자 감탄하는 소리마저 희미해졌다.

“와…….”

공기가 달랐다.

후덥지근한 바람 대신 선선한 바람이 얼굴에 맺힌 땀을 시원하게 식혀 준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눈이 즐겁다.

잠시 특공대의 전경을 감상한 후, 교관의 지시에 따라 신속하게 내려왔다.

“내려오는 자세까지 완벽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정상까지 올라갔다 온 8번에게 다 같이 박수!”

“와아아!”

근엄하게 웃던 특공대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재미있습니까?”

“예! 무척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시켜 주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와 내가 손발이 척척 맞는 호흡으로 출연진들을 유혹했다.

하나둘 호기심을 드러내자, 교관의 까무잡잡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교육생들도 해 보고 싶습니까?”

“예!”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원래 8번만 시켜 주려고 했는데… 특별히 융통성을 발휘해서 지원자를 받겠습니다.”

다들 손을 번쩍 들었다.

누구를 고르겠냐는 교관의 시선에 대답했다.

“9번 시켜 주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9번!”

중현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곧바로 늠름하게 걸어오던 녀석이 밧줄 앞에 멈춰서더니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소곤거렸다.

“너 이해 못했지?”

“네.”

해 보고 싶어서 나오긴 하는데 아까 봤던 시범이 이해가 잘 안 가는 듯했다.

교관이 바로 끼어들었다.

“일단 한 번 해 봅니다. 그 뒤에 자세 봐주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중현이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밧줄을 잡았다. 그러곤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밧줄을 잡아당겼다.

특공대원이 고개를 저었다.

“제일 나쁜 자세입니다. 팔의 힘만으로 무식하게 올라가려고 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떨어집니다. 보십시오.”

“경준아.”

“예?”

고광순 경사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쟤 올라가는데?”

“예?”

춥찹찹찹.

“……?”

“……?”

중현이가 밧줄을 빠른 속도로 춥찹찹 잡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빨랐다.

“어떻게 한 거지?”

나쁜 자세라고 지적하던 특공대원의 중얼거림에게 모두의 눈이 향했다.

그가 헛기침을 했다.

“지금 같은 경우는 예외라고 봐야 합니다. 저건 순전히 팔의 힘만으로 올라간 거라… 아니, 어떻게 한 거야?”

선글라스 너머로 당황한 표정이 읽혔다.

나만 ‘우리 애 힘 좋죠?’하며 웃을 뿐.

사간 멤버들과 제작진은 아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저게 가능해?”

“바퀴벌레가 벽 타는 것보다 더 빠른데?”

“심지어 우주처럼 요령도 아니고… 쟤는 힘으로 한 거잖아.”

특공대원들마저도 자기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슈루룩!

어딘가 모르게 타잔처럼 줄을 잡고 내려오는 우리 애였다.

꼭 뒤에서 재규어나 고릴라 같은 동물이 ‘밀림의 왕이시여’ 하며 울부짖을 것만 같다.

머릿속으로 장면에 어울리는 브금을 심심풀이로 만들어 볼 때.

“교육생, 잠깐 이리 와 봅니다.”

“아니, 우리가 갑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특공대원들이 중현이에게 달라붙더니 팔을 붙잡았다. 새로운 종을 발견한 과학자들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이렇게 마른데…….”

“이게 이런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근력인가? 말이 안 되는데.”

“뼈대가 굵긴 한데, 아니 어떻게 되지? 이 정도 근육량으로는 어림도 없어야 되는데.”

마른 아이돌의 몸으로 어떻게 그런 근력을 냈는지가 관심사인 듯했다.

나도 예전부터 궁금해 했던 미스터리였지.

“교육생.”

고 경사가 중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9번 교육생 김중현.”

“교육생은 병원에 가서 정밀 검진 받아 봅니다.”

“……병원 말입니까?”

중현이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큰일 난 겁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하는 표정에 특공대원들이 뺨을 파르르 떨었다.

그들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근섬유나 근육의 질이 월등한 것 같으니 한 번 체크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진짜 근육의 질이 이렇게 좋으면, 운동선수를 해야 되는데…….”

“체육계가 인재를 잃었구나.”

그들이 중현이의 몸을 보며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며 흐뭇하게 웃던 녀석이 이내 쫄래쫄래 다가와 내 옆에 풀썩 앉았다.

“재미있었어?”

“네. 또 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재미있어 하는 표정에 미소가 나왔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 애는 정말 예능신이 가호하는 거 같다.

줄타기 한 번으로 이렇게나 많은 분량을 챙겨 올 수 있다니.

“지원자 또 있습니까?”

연이은 성공.

쉽고 재미있어 보였던지,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던 조소형까지 손을 들었다.

“7번 나옵니다.”

“예!”

“몸 좋습니다. 근육도 잘 붙어 있고.”

“감사합니다!”

한조가 차분한 얼굴로 밧줄 앞에 섰다.

“자, 여기 올라옵니다. 교육생.”

한조가 밧줄을 붙잡고 올라섰다. 아까 시범을 눈여겨봤는지 꽤 정확한 동작이었다.

“그 상태로 정지.”

“……?”

“자, 시범 케이스로 보여 주겠습니다.”

교관이 한조의 몸을 짚어 가며 자세의 포인트를 설명했다.

그 동안 나는 웃음을 참았다.

밧줄 위에 정지한 한조가 시간이 지날 때마다 바들바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서.

“자, 그럼 교육생! 이대로 쭉쭉 올라갑니다!”

“실시!”

기세 좋은 외침과 함께 한조가 밧줄을 슥슥 붙잡고 올라갔…….

주르륵.

“……?”

촙.

바닥에 착지한 한조가 눈을 깜빡이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당황한 한조가 슥슥 올라가더니.

빨대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처럼 밧줄에서 떠내려왔다.

주르륵.

‘아?’ 하는 표정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풍선 근육이었구만.”

“여긴 반대로 효율이 나쁘네.”

특공대원들의 중얼거림에 웃음이 더 크게 번졌다.

“7번.”

“예?”

“고생했습니다. 그대로 들어갑니다.”

“저 할 수…….”

“자, 다음 지원자 받습니다!”

한조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왔다. 그러곤 키득거리는 내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도 방송 분량 건졌어요.”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간의 출연진들이 진정한 예능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악!”

“밧줄이 너무 미끄럽습니다!”

“이거, 밧줄이 이상합니다!”

이렇게 몸으로 웃길 수가 있다니.

과연 프로 방송인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A급 병사 컨셉인 박호범만 날렵하게 정상까지 올라갔을 뿐, 나머지는 중간도 못 갔다.

심지어 저질체력인 조소형 씨는 고소공포증까지 겹쳐서 교관들을 괴롭히는 중이었다.

“저 못 내려가겠습니다아아아!”

“장난합니까? 이걸 왜 못 내려옵니까?”

“몰라! 이걸 어떻게 해!”

패닉해서 현실 말투까지 나오는 모습에 특공대원들이 이마를 짚었다.

“3미터 높이가 왜 무섭습니까?”

“모릅니다! 무섭습니다!”

결국 나와 중현이가 나서서 밑에서 받아 주겠다고 한 후에야 몸을 덜덜 떨며 내려왔다.

그러곤 교관들의 따가운 눈총 속에 운동장 뺑뺑이를 돌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한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저 편집되겠는데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

나와 중현이가 앞으로 수치스러울 기회는 더 많다며 다독여 주었다.

*   *   *

점심시간.

“밥이다!”

“밥!”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식당에 모인 출연진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김치볶음밥과 노릇한 계란 후라이.

훈련이 고된 탓도 있지만 객관적으로도 맛있었다.

“진짜 맛있다.”

“오전에 고생해서 그런가. 밥이 아주 꿀떡꿀떡 넘어가네.”

“군대에선 느낄 수 없는 사회의 맛이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우리 게스트들도 잘 먹네.”

같이 굴렀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우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친근했다.

맏형 이필승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중현이, 맛있어?”

“에, 어으 해호해호. 아히허허.”

“너무 행복하대요. 맛있어서.”

내 통역에 출연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대화의 주제를 우리에게로 돌렸다.

“우주 너 진짜 잘하더라. 어떻게 다 잘하냐?”

“행정병 맞아? PT 시범 보이는 것도 그렇고. 밧줄 탈 때 얘 하는 거 보고 쉽다고 착각했잖아.”

“은근 힘들더라.”

“진짜. 중현이는 그거 어떻게 했니?”

“녹화 끝나고 병원 가 보자. 나 너무 궁금해. 어떻게 아이돌 몸에서 저런 힘이 나오지?”

중현이에게 관심을 보이던 멤버들이 근처에서 식사하던 피디를 불렀다.

“도 피디!”

“예?”

“이거 특집 녹화 끝나고 나면 중현이 데리고 검진 데려가 봐.”

“예, 고려해 보겠습니다.”

중현이가 ‘병원 무서운데’ 하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들이 화살 과녁을 한조로 돌려서 아까 흑역사를 놀려대며 웃는 동안.

훈련 일정이 담긴 계획표가 배부됐다.

“이따가 저녁에 흑복도 배부해 주네.”

“흑복이요?”

“특공대원들이 입고 다니는 저 물 빠진 검정 옷 말이야. 사이즈에 맞게 배부를 해 준다네.”

“우와…….”

자리에 앉은 모든 남자들의 얼굴이 로망으로 반짝거렸다.

지호가 하는 총 쏘는 게임이나 아니면 영화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 옷을 입을 수 있다니.

다들 들떠 있을 때, 박호범이 계획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따 오후에 레펠 훈련 있는 거 봤어요?”

“아…….”

“호범이 분위기 참 잘 깨.”

그의 말에 다들 계획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척 보기에도 만만찮은 일정의 연속.

그러더니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한 것처럼 동시에 나를 흘깃거렸다.

계란국을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고생이 많겠네. 우주가.”

“제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특공대원들 보니까 눈에서 꿀이 떨어지더라. 뭐 시범만 있으면 8번 시키겠다고 그러던데.”

“8번, 8번, 하도 노래를 해서 내 귀에 딱지가 앉았어.”

“우주야. 힘내라.”

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를 좋게 봐주시는 것뿐이지, 그 정도로…….”

라고 대답을 할 때, 입가를 재빠르게 닦고 일어나는 반대편의 모습에 말을 멈췄다.

일어나서 몸을 돌리니 특공대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글라스와 스카프를 벗어서 그런가.

군살 없이 날렵한 체격이나 까무잡잡한 피부를 빼면 다들 순하고 맑은 인상이었다.

“앉으세요. 앉아.”

가운데 선 고광순 경사의 말에 하나둘 자리에 착석했다.

“어때요. 밥 맛있습니까?”

“예!”

“여기가 인천에 있는 경찰 식당 중에서 제일 밥이 맛있는 뎁니다. 하하!”

“하하하!”

훈훈한 웃음을 주고받은 후.

“오후에 레펠 훈련 진행하는 거 봤습니까?”

“예!”

“부상 없도록 주의합니다. 이중에 고소공포증… 조소형 교육생은 손 내려도 됩니다. 아까 잘 봤으니까.”

“넵…….”

“그럼 나머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참, 8번?”

“예?”

두툼한 손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따 또 봅시다. 우리가 재미있는 거 많이 가르쳐 줄게요.”

“…….”

“알려 줄 게 참 많아.”

다른 대원들도 날 보며 흡족하게 웃더니 하나둘 식판을 받으러 걸음을 옮겼다.

“…….”

계란국에 비친 내 얼굴이 참으로 슬퍼 보였다.

처량 맞은 내 얼굴에 사간 멤버들이 딱하다며 자기 몫의 요구르트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이거라도 먹고 힘내.”

“감사합니다…….”

눈치를 살피던 중현이도 요구르트를 내밀었다.

“형.”

“고마워. 중현아.”

“네…?”

“……?”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주는 거 아니었어?”

“아. 저 손톱을 너무 짧게 깎고 와서 까 달라고 한 건데.”

“…….”

다들 웃음을 터뜨릴 때, 왼쪽에 앉은 한조가 요구르트를 내밀었다.

“자. 여기요.”

“고마워요. 역시 한조 씨밖…….”

“제 것도 까 주세요.”

“…….”

한조가 얄미운 표정으로 웃었다.

내가 눈을 지그시 감는 모습에 주변에서 찍던 카메라 감독님과 출연진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   *   *

# TBC ‘사나이가 간다 - 경찰특공대 편 1부’

점심 식사가 끝나고 출연진이 레펠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침내 도착한 연병장 옆 건물.

모두 바닥에 쪼그려 앉자 교관이 설명을 시작한다.

교관 : 레펠 훈련은 지금처럼 이런 건물 외벽이나 암벽을 줄 하나에 의지해서 내려오는 훈련입니다.

영상으로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진다.

헬기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거나, 고층 아파트 외벽에서 줄을 타고 베란다로 침투하는 자료화면.

테러범이 인질을 잡고 있거나, 화재 같은 위급 상황시 진입을 위해 필요한 기술이라는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교관 : 자, 모두 조교의 시범을 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 있던 이정아 경장이 ‘하강!’ 하는 외침과 함께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정확한 자세로 줄을 잡고 하강하는 모습에 다들 박수를 친다.

동시에 ‘저걸 해?’ 하며 심란한 표정을 짓는 고정 멤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인터뷰 화면 속 민머리에 온화한 인상의 남자.

민태원 : 제가 늘 입버릇처럼 모든 건 마음먹기 달린 거라고 하잖아요.

작가 : 그랬죠.

민태원 : 레펠은 예외에요.

작가 : (웃음)

과거 육군 에피소드에서 멤버들이 레펠 훈련을 하며 고생했던 장면들이 지나간다.

이필승 : 눈앞이 캄캄했죠. 호범이 빼고는 다들 레펠을 무서워해서… 저게 15미터쯤 되나? 장난 아니거든요. 저기 서면 고소공포증 없는 사람도 다리가 후들후들거려요.

작가 :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라고 하더라고요.

이필승 : 예. 그래서 레펠이라고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필승 : 우리에겐 선우주 교육생이 있었습니다.

다시 전환되는 화면.

출연진들이 ‘흐아아아악!’ 하며 줄을 타고 4층 높이의 건물에서 내려온다.

누군가는 칭찬을 받고 누군가는 위험한 자세라며 혼이 날 때.

교관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인물이 있었다.

-8번!

-8번 교육생! 이리로!

-8번!

특공대원들이 열심히 선우주를 부르는 장면이 편집이 되어 흘러나왔다.

유난히 완벽한 자세로 줄을 타고 내려오는 선우주.

분명 하강하기 전에는 ‘흐어어!’ 하며 높이에 무서워하는데, 폴짝 뛰어내리면 갑자기 자세가 완벽해졌다.

그가 줄을 타고 내려올 때마다 선글라스 아래 특공대원들의 입가가 씰룩거린다.

고광순 경사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처럼 깔린다.

고 경사 : 뭐, 그때는 티를 하나도 안 냈지만… 우리 우주는 전술 1팀의 명예 회원이죠.

피디 : 명예 회원이요?

고 경사 : 자세가 증말 예쁘더라구요. 아유. 처음 하는 거라는데, 나 특전사 있을 때도 처음에는 그렇게 못했거든요.

피디 : 대단하네요.

고 경사 : 대단하죠. 그래서 신이 나 가지고, 하나라도 더 가르치게 되게 되더라고. 하하하!

이어서 고통 받는 선우주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분명 특공대원들이 예뻐해 주고 있는데 새로운 동작을 배울 때마다 죽을 맛인 표정이었다.

레펠의 시작과 끝이 그 몸에서 재현됐다.

마지막에 가서는 스파이더맨처럼 줄을 잡고 거꾸로 내려오는 모습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우주 : 힘들지 않았냐고요?

인터뷰 화면에서 흑복을 입은 우주가 웃는다.

어딘가 촉촉한 눈으로.

우주 : 그, 너무 좋았어요.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그러시는 거니까. 이런 경험을 언제 할 수 있겠어요. 하하하…….

훗날 네티즌이 표정 분석기에 돌렸을 때 ‘슬픔’이 99퍼센트로 나온 처량한 미소였다.

우주 : 덕분에 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작가 : 돌아보는 계기요?

*   *   *

레펠 훈련 중 잠시 쉬는 시간.

“고생했다.”

“우주가 고생이 많았네.”

“아유, 이러면 우리가 너무 가슴이 아픈데. 덕분에 잘 쉬기는 했지만…….”

웃는 거 다 보여요. 이 사람들아.

그래도 고생했다며 잠깐 안마까지 해 주는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흐어…….”

모래 바닥에 널브러져 서서히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제까지 보던 그 하늘인데 왜 이리 달라 보일까.

할머니랑 동생들 목소리 듣고 싶다.

“으어, 죽겠네…….”

몸이 엄청 힘든 건 아니었다.

체력적으로는 할 만한데, 특공대원들이 내게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게 바로 문제였다.

‘8번! 이거 하나만 더 해 보자.’

‘딱 이것까지만 해 보자.’

‘잘한다. 옳지!’

오랫동안 고여 있던 동아리에 들어온 신입 부원처럼 반겨 주는데 난 괴로울 따름이었다.

“……괜찮아요?”

역광으로 차분한 얼굴이 어둡게 보였다. 한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날 내려다보았다.

“아이구… 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역광이라 웃는 게 안 보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들켰네요.”

키득거리던 한조가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근처에서 스탭들과 짐을 나르던 중현이가 다가와 군복에 묻은 모래를 털어 주었다.

제작진이 야간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 셋은 터덜터덜 화장실을 향했다.

“너무 괴로워요.”

하소연하듯 속삭였다.

“진짜 힘들어서 못할 것 같은데, 막 웃으시면서 재미있지 않냐고 그러시고. 이쯤 하면 된 것 같은데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하고. 콘서트 앵콜도 안 이럴 걸요.”

“…….”

“왜들 그런 표정으로 바라봐요?”

둘이 ‘흐음’하더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 모르는 거 같죠?”

“그런 거 같아요.”

“……이게 바로 인과응보인가.”

“억지로 사지로 내몰려 봐야 안다는 말이 맞네요.”

“그거 역지사지 아니에요?”

“억 아니에요? 지호가 분명히 그렇게 말해 줬는데.”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듣던 내가 끼어들었다.

“내가 뭘 몰라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을 얼버무린다.

계속 캐물으니 어서 화장실이나 가자고 등을 떠밀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는 거울을 바라보자 하루 새에 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하하하.”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늘 정말 고생이 많구나. 우주야, 하며 스스로를 다독일 때.

잠깐만.

“……어?”

뭔가 이상해서 흐릿한 세면대 거울을 물로 닦아냈다. 선명한 거울 속에 초췌한 내 얼굴이 드러났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표정인데.

축 늘어진 어깨, 턱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 물에 빠진 것처럼 파리하게 질린 입술까지.

금세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상윤 작곡가님?’

아니다.

그보다 더 오랫동안 봐 온 표정들이었다.

“허어어……!”

눈을 크게 뜨면서 손을 입에 올렸다.

‘A&R팀!?’

작업실에서 일할 때마다 노트북 화면에 비쳤던 A&R팀 직원들이 딱 이런 표정이었는데.

꾸벅꾸벅 졸다가 내 얼굴을 보며 지금과 같은 표정으로 ‘우주야, 다 됐니?’ 하곤 했지.

여태까지 직장인들이라 피곤하시구나, 한 거였는데.

“……!”

깨달음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을 때, 거울 위로 하나씩 스쳐가는 A&R팀의 얼굴 뒤로.

누군가의 얼굴이 하나 겹쳐 보였다.

고길동 같은 표정의 미남이었다.

‘……조 이사님?’

올해 1월.

우리가 조 이사님 댁에 머물렀을 때 봤던 그 표정이 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뭐야.’

……여태까지 조 이사님이 말하던 둘리가 나였어?

충격적인 깨달음에 멍하니 거울을 바라볼 때, 중현이가 코 푸는 소리가 호이호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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