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46화
대취타의 연주를 마치고 태평소를 내려놓았다.
“흐하하핫!”
졸개들이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와, 이거 생각보다 진짜 재미있어여! 국악이 이렇게 재미있는 거였구나.”
“나 이거 연주하면서 춤 동작도 떠올렸다? 보여 줄까?”
“나쁘지 않네.”
정말 폐기물 같은 연주였다.
“……미안하다.”
부르르 떨고 있는 임금님에게 사과했다.
“원래는 나만 하려고 했는데, 얘네들도 네 생일이라고 해야 된다고 우겨서.”
“됐어요.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아니까. 후우우….”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리혁이의 모습에 동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였어여? 처음 연주하는 것 치곤 괜찮았는데.”
“우리 딴에는 괜찮았는데.”
동의를 구하는 눈빛에 내가 따스하게 웃어 보였다.
“……너네 어디 가서 음악 하는 애들이라고 하지 마라.”
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진짜 내가 태평소를 연주하고 있는데… 너네 소리가 들어오는 순간 색이 바뀌는 거야. 공업용 폐수 같은 색으로.”
아름다운 초록색 빛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오폐수들이 섞여 들어오더니 굉장히 좋지 못한 색이 됐다.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할까.
“아니.”
리혁이가 입에서 불을 뿜었다.
“진짜 나 감동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하여간 내가 감동하는 꼴을 못 본다니까!”
“그렇게 별로였어여?”
“크아아악!”
막내가 말했다.
“근데 연주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맞아.”
“우리가 형을 그만큼 좋아하니까 이렇게 생파 때 국악 연주도 해 주고 그러는 거져.”
“리혁아. 우리 이거 엄청 연습한 거야.”
그 말에 표정이 누그러진 리혁이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뭐, 얼마나 연습을 한 건데요…?”
“30분 정도?”
미리 귀를 막고 있기를 잘했다.
곤룡포에 익선관을 쓴 리혁이가 연산군처럼 분노하는 고함에 졸개들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 동안 댓글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이고
-여기 외국인들 잘 들어. 이건 K 전통음악이 절대 아니야
-ㅋㅋㅋㅋㅋㅋ졸귀
-오빠들 국악 연주는 앞으로 안 했으면 좋겠어요
따스한 격려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못 들으신 걸로 해 주세요…….”
대취타가 아니라 뉴취타 같은 걸로 생각해 달라고 말을 하고는 리혁이에게 돌아갔다.
“생일 축하해!”
“아무튼 엄청 축하해여, 형!”
“리혁아. 우리한테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넷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우리 메인보컬 최고다! 하며 축하하자 리혁이의 뺨이 꿈틀거렸다.
냉랭한 척하는 표정과 다르게 얼굴이 슬슬 달아오르다가, 금세 표정관리에 실패해서 웃는 리혁이었다.
“뭐…….”
곤룡포 자락을 들어서 입가를 가린 리혁이가 말했다.
“고마워요. 이런 생일파티 준비해 줘서.”
그러곤 Y앱 라이브 중인 핸드폰을 향해 환히 웃었다.
“와! 저거 봐여! 우리한테는 맨날 인상만 쓰고 팬들한테는 저렇게 웃어 주는 저저…!”
“괜찮아. 뭐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리혁이도 언젠간 우리에게 웃어 주겠지…….”
도끼눈을 뜨고 돌아보는 리혁이의 모습에 우리가 시선을 피했다.
맨날 웃어 주는데도 저런 소리를 한다며 잔소리를 하던 녀석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단독샷을 잡고 있는 리혁이의 뒤에서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리혁이가 음… 하며 눈을 굴렸다.
마치 바닷가에서 예쁜 조약돌을 고르기 위해 유심히 살피듯 말을 세심하게 골라내는 듯했다.
“여러분이 보내주신 생일 축하 메시지를 많이 봤어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하나하나 꼭 기억할게요. 저라는 사람을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리혁이가 생긋 웃었다.
“제가 태어난 날에 함께 해 줘서 또 고맙고, 저의 인생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해요.”
막내가 속삭였다.
“저거 우주 형이 낙화 소감 했던 거 패러디 아니에여?”
“흐음, 오마주 정도로 해 주는 건 어떨까?”
“우주 형. 방금 리혁이가 형이 콘서트에서 했던 말 비슷하게 했어요.”
“그래? 아유, 좋은 건 또 알아가지고~”
곧바로 주상의 진노가 폭발했다.
“거기 안 서요?!”
“으아아아아아!”
언제나 그러하듯 끝은 추격전이었다.
* * *
인터넷에 ‘대취타 보존회로부터 고소당할 것 같은 아이돌’이라는 제목으로 생일 파티 글이 올라갈 때.
실시간 검색어에도 해당 키워드가 등장했다.
[실시간 검색어]
7위. 대취타
뉴블랙 TV에 올라온 생일파티 영상을 본 사람들이 ‘대취타가 뭐지?’ 하고 검색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흐름을 타고 인터넷 뉴스들이 올라오는 모습에 국악 관계자들이 댓글을 달았다.
-국악 전공자로서 굉장히 흐뭇하네요. 생일 파티에 대취타를 연주한다는 발상이 특이하긴 하지만, 이렇게 국악에 대한 관심이 나온다는 게 정말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ㅎㅎ 뉴블랙 화이팅
┕실례지만 혹시 연주한 거 보셨나요??
┕아뇨. 지금 사진만 ㅎㅎ
┕여기 보고 오세요.. (링크)
┕뉴블랙 분들은 앞으로 국악 연주 절대 하지 마십시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분노폭발ㅋㅋㅋㅋㅋㅋ 이게 맞지
이윽고 미튜브의 해당 영상 댓글에는 ‘낙화’의 가야금 연주를 맡은 송아랑도 댓글을 달았다.
가야금 송아랑
[∠뉴블랙TV 님이 고정함]
저는 절대 이 연주와 관련이 없습니다..
‘국악에 관심이!’ 하며 흥분하던 관계자들이 ‘아니… 아니…’ 하며 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짭플레들도 실드를 멈추고 실드로 때리는 퀄리티.
-의도 : 우리 것을 수호하자(?) / 보이는 것 : 남이 가지기 전에 우리가 불태운다
-이상한 것 같은데 들을수록 작품성이 있음. 선우주의 태평소가 마치 쓰레기장에 핀 한떨기 꽃 같다고 할까
-00:47 김중현 꼬르륵 소리 섞여들어온 거 개웃기네ㅋㅋㅋㅋ
-여러분 이건 삑사리가 아닙니다. 바로 국악으로 뉴블랙을 표현한 것입니다
-03:09 진심 오합지졸 같음ㅋㅋㅋㅋㅋㅋㅋ
-잘못 연주한 게 아님. 악기들이 뉴블랙을 못 따라오는 것.
-24세기에 재평가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초장부터 박살난 박자.. 이것이야말로 우리네 세상살이를 표현한 띵곡이 아닐까
-확실한 건 우리 애들 조선시대였으면 지금쯤 하옥됐어
수플레들과 짭플레들, 일반인들이 섞여서 환상의 댓글 파티를 벌이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는 한편.
아이돌 커뮤니티는 새로운 떡밥으로 활기가 돌고 있었다.
[한태현 솔로 앨범 정보]
[한태현 솔로 앨범.. 화려한 피처링 라인업 공개]
[한태현 새 앨범 ‘더블 타이틀’, 뉴블랙 우주가 작곡/작사 참여]
바로 TNT 최고의 인기 멤버로 불리는 한태현의 솔로 앨범 데뷔에 대한 소식이었다.
TJ 엔터에서 공개한 프로모션 맵에 팬덤이 흥분으로 휩싸인 가운데.
그중에서 아이돌 팬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고 있는 것은 바로 뉴블랙 우주와의 콜라보였다.
-대박ㅋㅋㅋㅋ 이게 진짜 성사되네
-곡 존나 좋을 거 같음ㅋㅋㅋㅋ
-2222 들어본 적 없는데 벌써부터 좋은 느낌ㅋㅋㅋㅋ
-기사 보고 처음 든 생각 : 아.. 우주선이 또 타이틀을 해치워버리려고 했구나
-파워댄스곡 느낌이랑 + 보컬곡 요런 구성인가?? 퍼포 진짜 기대된다
-대박이다 어케 성사된거래??
평소 TNT나 뉴블랙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아이돌 팬들도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솔로 성적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예측이 도는 탑 아이돌과 현재 돌판 탑2로 꼽히는 그룹의 작곡 천재와의 조합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예능도 아니고 앨범 작업이라니.
그것도 현재 일간 차트의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곡들을 만들어낸 작곡가가 새로이 쓴 솔로곡.
그런 까닭에 한태현의 팬덤은 흥분 그 자체였다.
‘대박이다…!’
행복한 덕질 라이프가 그려진다고 할까.
‘우주선이 준 곡한테도 타이틀이 안 밀렸어. 이거 대박이다.’
불도저처럼 수록곡을 밀어 버리기로 유명한 우주선이 준 곡이 있는데도 ‘더블 타이틀’이었다.
원래의 타이틀곡 역시 나쁘지 않은 곡임이 틀림없었다.
팬들의 행복회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한태현의 팬덤은 이어지는 반응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야. 머글들이 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어째서…?’
아이돌 팬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한태현의 솔로 앨범을 보고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뉴블랙을 보고 ‘왜 일반인들이 저렇게까지 모여 있지?’ 하고 감탄했듯 팬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뉴스 하나로 머글 영업까지 되는 광경에 벙 찌는 한태현의 팬들이었다.
‘뉴블랙 팬들은 대체 어떤 덕질을 하고 있는 거지?’
대중들이야 관심 가지면 좋지, 하고 생각했지만 정작 관심을 가져 주니 몹시 달달하기 그지없었다.
행복감에 빠져들고 있을 때.
뉴블랙 TV에 ‘TJ 엔터 방문기’를 비롯해 ‘Survivor - 작업기’ 라는 영상 시리즈가 올라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현아아아아악!’
가수의 이름을 연호하며 미튜브에 접속한 이들에게 영상이 흘러나왔다.
한태현이 가이드가 되어 뉴블랙을 안내해 주는 장면.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업실에서 한태현과 선우주가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장면들이었다.
나노 단위로 캡처를 하며 흐뭇해하는 한편, 영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케미 엄청 좋네…?’
미프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나올 때도 느끼긴 했지만 이번에 더 확 크게 느끼고 있는 한태현의 팬들이었다.
곧이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미튜브라서 그렇구나.’
방송에서는 논란 차단을 위해 칼같이 ‘선배님, 선배님’ 하던 우주가 편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형동생 하며 서로에게 말하는 게 정말 편해 보인다고 할까.
-형!
-태현아아!
그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TJ 엔터의 프로듀서들이 짠해 보였지만.
어쨌거나 가만히 보고 있기만 해도 눈과 귀가 즐거운 컨텐츠였다.
레몬 엔터 최고 연봉이 뉴블랙 TV의 편집자들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답게 온갖 그래픽과 병맛 자막이 가득했다.
우주 : 태현아.
태현 : 어?
우주 : 지금부터 이 가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할지 고민해 보자.
태현 : 좋아.
그러고는 흐으으으음 하며 팔짱을 낀 채 악보를 들여다보는 두 아이돌이었다.
진지한 BGM.
[놀랍게도 정지화면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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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쯤 지났을 때, 태현이 ‘아!’ 하며 진지한 BGM이 깨졌다.
우주 : 왜 그래?
태현 : 냉장고에 초코 케이크 넣어놨는데, 먹을래?
우주 : 응.
다시 흘러나오는 진지한 BGM.
그러고는 다시 30분 넘게 가사지를 보고는 회의하고, 녹음하고. 또 회의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독하다. 진짜 독해.’
작업 로그에서 활활 불태우는 둘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저장해 놓고 열심히 살고 싶을 때마다 보고 싶은 그런 영상이었다.
탑인 애들은 탑인 이유가 있다 하는 느낌.
그렇게 ‘Survivor’란 곡이 탄생해 가는 과정에 대해 쭉 훑어보고 있을 때.
비하인드처럼 마지막 장면에 작업실 차림으로 후드티를 쓴 우주가 웃으며 셀프캠을 향해 말했다.
옆에서 널브러져 ‘죽어라, 어 왜 안 죽지’ 하며 잠꼬대를 하는 나상윤 PD를 의식해 소곤거리는 목소리였다.
우주 : 지금 곡을 다 썼는데요. ‘Survivor’라는 곡은 제가 연습생 때부터 보아 온 친구에 대해 쓴 곡이에요. 팬분들의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지만… 예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절친한 친구에게 곡을 써 주었다는 듯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우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곡을 의뢰받아 쓴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쓴 듯한 느낌.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면서 살짝 흘러나온 Survivor의 전주가 감미롭게 들려왔다.
“…….”
그런 영상들을 바라본 한태현의 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평상시의 스밍 리스트에 불꽃놀이를 스윽 추가했다.
* * *
누군가의 솔로 앨범 소식으로 가요계가 들썩이고 있을 때.
해외 투어와 각종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내게 또 다른 과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요원 K’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오디션을 보려면 기본적인 캐릭터는 잡아놓는 게 좋아여. 나중에 감독님이 알려 주시긴 하겠지만, 오디션에서 이런 걸 어필하면 점수를 딸 수도 있고.”
막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형이 하는 게 시트콤이잖아여.”
“응.”
“시트콤의 가장 큰 포인트가 뭐라고 생각해여?”
“으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웃기는 거?”
“그건 기본이구여. 저는 극의 특성을 말하는 거예여. 시트콤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의 특성.”
“병맛…? 인가? 모르겠네. 뭐야?”
막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캐릭터의 일관성이여.”
“일관성?”
“보통 드라마의 주요 캐릭터는 입체적인 인물들이잖아여? 입체적이란 말의 뜻은 알져?”
“3D?”
이건 중현이의 말이었다.
비주에게 찰싹 등짝을 맞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는 지호에게 물었다.
“입체적이란 건 극이 진행되면서 캐릭터의 성격이 변하는, 뭐 그런 거 아냐?”
“맞아여. 근데 이 시트콤이란 매체는 기본적으로 캐릭터가 1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바뀌지 않는 장르예여. 미친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해서 웃기는 건데, 이게 미친 짓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되거든여.”
“뭔지 알겠다.”
시트콤(sitcom)이란 기본적으로 상황에서 재미를 뽑아내는 극.
옷에 먼지 하나 묻은 걸로 난리를 치는 깔끔이 캐릭터가 있는데, 만약에 그 인물이 가장 아끼는 옷을 가족들이 망쳤다면?
가족들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온갖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식으로 재미를 뽑는 장르가 시트콤….
“은근슬쩍 제가 설명한 거 훔쳐가지 마여.”
“넵.”
“아무튼 시트콤이란 캐릭터가 바뀌지 않는 장르예여. 그래서 처음부터 캐릭터를 꽉 잡고 가야 돼여. 시즌제 시트콤들을 보면 캐릭터가 안 변하거든여.”
“변하던데.”
“그래서 시청자들이 욕을 하는 거예여. 설정 붕괴라고.”
오늘도 연기에 대한 지식이 하나 늘었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요원 K의 캐릭터를 공부했다.
차량을 타고 이동할 때나 잠시 스케줄 중간에 쉴 때, 틈틈이 고민을 했는데 여러모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어렵지?”
어려운 이유는 간단했다.
“단서가 하나도 없네.”
캐릭터의 특성을 잡을 만한 껀덕지가 없었다.
비중이 너무 적어서 어떻게 뭐 캐릭터를 구축할 게 없었다.
평범한 회색빛 인물 같다고 할까.
언더커버 업무를 하면서 위장으로 환히 웃을 때는 있지만 그게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아닌.
“흐으으음.”
대본을 바라보았다.
씬23.
요원 K가 ‘무미건조한 어투로 심문한다’ 는 지문이 적힌 파트였다.
거기서 정체를 숨기려는 외계인 가족을 바로 외계인이라 판별하는 유능한 직원의 면모가 드러나고.
무능한 상사들이 그런 요원 K를 칭찬한다.
상사1 : 역시 우리 K야. 하하하!
상사2 : 아무리 봐도 우리 부서에는 인재가 K밖에 없다니까. 자네가 이번에도 아주 큰일했네.
상사3 : 외, 외계인이란 건 어떻게 알았나?
그런 상사들에게 K는 ‘예의 바른 어조’로 답한다.
K : 직감이었습니다.
마치 너희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다는 듯 선을 딱 긋는 듯한 느낌.
상사 따위 알 바 아니라는 독선적인 성격이라고 하기에는 또 예의범절이 엄청 바르다.
대본에서 K가 등장하는 파트를 볼 때마다 아리송하다고 할까.
어떨 때는 친절한 것 같고, 어떨 때는 냉정한 것 같은데.
분명히 그 중심에 일관성 있는 뭔가가 있을 듯한 느낌이었는데, 내 수준으로선 분석이 힘들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찾았다.
“지호야.”
숙소 2층으로 올라가 지호의 방을 찾았다.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가니 한창 감자칩을 먹으며 롤을 하고 있는 막내가 눈에 들어왔다.
“비주 형, 저 사과 안 먹… 어? 형이네여.”
“게임 중이었어?”
“별로 중요한 게임 아니에여.”
노트북을 탁 덮은 막내가 손을 비비며 침대에 앉았다.
“자. 우리 연기자 응애 꿈나무가 무슨 고민이 있어서 여길 왔을까여?”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
“흐으음~ 맨입으로여? 뭔가 액션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여?”
내가 털썩 무릎을 꿇고 물었다.
“이거면 될까?”
“으아아아! 왜 그러는 거예여!”
“뭐라도 하라고 그러길래.”
“제발…! 형 무릎이 뉴블랙의 무릎이라구여.”
장난으로 그런 건데 엄청 싫어하네.
결국 막내와 대본을 사이에 두고 침대에서 겸상했다.
“그래서 어디가 막혀요옷?”
“요옷?”
“형이 연기 얘기할 때는 ‘요’ 하라니까.”
내가 웃으며 지호에게 말했다.
“대본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단편적이어서.”
“아아.”
“캐릭터 해석이 잘 안 돼서 조금 조언을 구하려고.”
“잘 왔어요옷.”
막내가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물었다.
“그러면 힌트가 필요한 거예요?”
“응.”
“잠시만여…….”
지호가 대본을 받아들고 집중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기와 관련된 일이 나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대본을 볼 때면 분위기가 평소와는 생판 다르다.
기다리는 동안 방을 둘러보았다.
지호네 어머니가 보내준 영양제 더미가 안 먹어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안 치워서 엉망진창이다.
옛날에 팬들에게 받았던 인형들이 지옥에서 돌아온 것처럼 꾀죄죄하게 침대를 장식하고 있고.
방 주인의 정체를 맞춰 보는 스무고개가 있다면 1번 질문은 아마 ‘사람입니까?’일 듯하다.
그리고, 낡아빠진 대본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하나를 슥 빼서 보려…….
푸스스스슥!
대본 더미가 무너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먼지 요정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막내가 ‘아아아! 정리해 놓은 건데!’ 하며 소리를 질렀다.
“쓰레기 더미 같던데.”
“이거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해 놓은 거란 말이에여!”
“갈 때 치울게…….”
막내에게 쭈글쭈글하게 대답한 후.
내가 원하던 힌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형 말이 맞아요. 원래 대본의 정보라는 건 되게 단편적이에요. 단서가 적은 것도 맞고.”
“그러면…?”
“이런 때는 한 가지 단서를 통해 몇 가지를 유추해야 돼요.”
지호가 말했다.
“모든 연기는 ‘왜?’ 라는 의문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서 요원 K가 상사들이랑 대화하는 장면 있죠?”
“응.”
“제가 봤을 때는 여기가 핵심이에요. 이 장면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형은 이 캐릭터를 잘 연기할 수 있을 거예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
내 말이 뭐가 웃겼는지 막내가 꺄르르 웃었다.
“정답 같은 건 없고 형이 발견해야 돼요. 이런 해석은 배우마다 달라지는 거라서, 포커스를 어디 두느냐에 따라 연기가 달라지거든요.”
“결국 나만의 해석을 해야 되는 거네.”
“이래서 배우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있는 거예요~”
다시 대본을 바라보았다.
씬23.
이걸 내가 독자적으로 해석을 해야 된다는 건가.
확실히 지호가 해 준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 정도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기도 하다.
“고마워.”
“뭘요~”
“근데 지호야.”
“네.”
“미안한데 당분간은 그냥 ‘여’ 써주면 안 돼?”
“…….”
“어른스럽기는 한데 뭔가 나만의 막내를 잃어버린 그런 느낌이라.”
지호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장 나가여.”
“그래. 잘 자~”
손을 흔들어 주며 방을 나섰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번에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그렇게 실마리를 품에 얻은 채 방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몰두하며 캐릭터를 연구했을 때.
“하하핫! 드디어 감을 잡았다!”
마침내 제작사 측과의 미팅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을 석환 형으로부터 들었다.
“후후후후후!”
“왜 그래?”
“내가 이번에 오디션 준비를 완벽하게 해 놨거든. 무조건 붙을 거 같아.”
“오디션?”
“응. 오디션.”
석환 형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오디션이라니?”
“응……?”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오디션이 아니고 미팅이라고?
“얘가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네. 너 이미 붙었어.”
“응?”
“감사하다고 바로 붙여 주던데. 당장 도장 찍으러 오라고 난리도 아니야.”
“나 붙었어…?”
……연습 다 해 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