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22)화 (622/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22화

“방탈출…….”

내가 기획안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방탈출이면 그거 맞지? 저번에 지호가 홍대에서 친구들이랑 했다고, 막 재미있었다고 말해 준 거.”

“맞아요. 저번에 친구들이랑 하고 온 거.”

막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우리 형들은 이런 거 잘 모르고, 제가 설명을 해 주자면…….”

“암호 풀어서 방탈출하는 거잖아.”

“페북에서 봤는데.”

“단서 찾아서 방에서 나가면 이기는 거 아냐?”

손가락을 들고 말하려던 막내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안 민망한 척하려는 모습에 웃음을 흘렸다.

방탈출이 뭔지는 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좀비 테마라든가, 범죄 현장이라든가. 밀실 현장을 재현한 스튜디오에서 단서를 찾아서 방을 나가는 열쇠를 모으는 게임.

열쇠를 3개 모은다든가 하면 CCTV로 지켜보던 주인장이 ‘나가라!’ 하면 탈출 성공하는 그런 게임이 아니던가.

“출연 얘기 나오자마자 조사했지.”

HBS의 인기 예능과 출연 이야기가 오갈 때부터 미리 자료를 찾아봤다.

비주가 기획안을 뒤적이며 말했다.

“미튜브에서 클립 몇 개 봤는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규모 되게 크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최근에 조선시대 했었나?”

“맞아요. 민속촌에서 탈출했던 거.”

미튜브에서 검색어를 입력하자 <지금부터 우리는>과 관련된 클립들이 우수수수 떴다.

가장 최근에 했던 특집은 ‘조선 시대에서 살아남기.’

게스트 출연자들이 보부상처럼 차려입고 말을 탄 관군에게 추격당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이강진 선배님 달리기 빠르시네.”

“어떡해. 관군들한테 다 붙잡혀 버렸어요.”

“중현이었으면 이거 안 붙잡혔을 텐데.”

<슬립>에 출연한 유명 배우 이강진이 관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있다.

간질간질.

포졸이 버들로 발바닥을 간질이면서 선배님이 으헤헤헷, 으헤헷 하고 있다.

“우주 형이었으면 더 재미있게 웃었을 텐데…….”

“인정.”

이어지는 장면들을 볼 때마다 탄식을 했다.

‘이거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저 장면에서는 저렇게 흐름 깨면 안 되는데… 다른 연기자가 대사를 치고 들어올 틈을 줘야 티키타카가 되지.’

‘예능에서 저렇게 웃는 거 아닌데…….’

영화 홍보차 출연한 배우들의 어설픈 예능 웃음에 우리가 탄식했다.

아무래도 예능이 본업이 아닌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편집점이나 웃음 포인트를 놓치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무궁무진하게 보인다고 해야 되나. 업계인으로서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사또가 말할 때 저기서 손을 딱 들어 주면 편집점 잡기 좋을 텐데, 클로즈업 슥 들어가고.”

“리혁이 형이었으면 저기서 비명 옥타브로 질렀을 텐데.”

“3옥타브까지 갔지.”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피드백을 하며 영상에 집중하고 있던 우리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뉴블랙 분들!”

문틈으로 얼굴을 쏙 내민 음악 방송 <인기가수>의 FD가 말했다.

“이제 리허설 준비하시겠습니다!”

“예……!”

그리고 그 순간.

영상을 모니터링하던 다섯 업계인의 시선이 서로를 훑었다.

“…….”

“…….”

블링블링한 파스텔 톤으로 스타일링을 한 의상과 청량 그 자체인 컨셉으로 꾸며져 있는 우리 모습.

그제야 Coin의 무대를 앞두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잊지 말자.”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가수라는 걸.”

“휴우. 깜빡할 뻔.”

“가끔 업종이 헷갈릴 때가 있는 거 같아요.”

동생들과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람이 가끔 헷갈릴 수도 있지.

*   *   *

음방 사전 녹화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쳤다.

수플레들의 응원도 응원이지만, 여러모로 초동 100만 장이 어떤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 느끼는 하루였다.

국내 가수 중에서 어떤 가수도 이룩하지 못한 초동 100만 장.

“엄밀히 말하면 99만 장이죠. 말은 똑바로…….”

“중현아.”

“네, 형.”

“바른 말 하면 끌고 가는 이 우매한… 으으읍! 읍!”

100만 장을 이룩한 덕분일까.

안 그래도 좋았던 대접이 더욱더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팬들과도 거의 팬 미팅 수준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차량에 탑승했다.

근처에 있다는 중식 레스토랑에서 <지금부터 우리는> 제작진과 사전미팅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안녕하세요!”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방에 들어가자, 이미 코스 요리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향긋한 중식 향신료들의 냄새에 행복하게 웃는 한편.

<지금부터 우리는>의 피디와 작가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금부터 우리는’을 담당하고 있는 여호석 피디라고 합니다. 우리 작가들은 이미 만난 적 있죠?”

“네. 영상 통화로 뵀어요.”

이전에 사전 미팅을 함께 진행했던 작가님들과도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뭔가 굉장히 정중한 분위기.

사전 녹화는 잘하셨냐, 오늘 날씨 좋지 않냐, 요새 노래 잘 듣고 있다 하는 류의 대화들이 오갔다.

“뉴블랙 분들 노래가 나올 때마다 매번 찾아서 듣는데, 크으, 이번에 코인은 특히 대박이더라고요. 저희가 매번 BGM을 깔 때마다 뉴블랙 분들 노래를 쓰는데… 이번 코인은 정말 찰떡이에요.”

특유의 오락실 사운드가 브금으로 쓰기 좋다는 칭찬이었다.

작가님들도 한마디씩 보탰다.

“코인이 진짜 대박 같아요. 주변에 아이돌 노래 모르는 친구들도 코인은 잘 듣고 있고…….”

“작가라고 그러면 조카들이 꼭 물어봐요. 뉴블랙 봤냐고.”

“저 얼마 전에 뉴블랙 프라이데이 행사에서 물건 구매했거든요.”

드디어 실물로 봤다면서 막 좋아하는 작가님들의 모습에 우리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전설의 포켓몬이 된 기분이다.

끝나고 혹시 사인 좀 가능하겠냐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원석이 형이 능숙하게 피디님의 잔에 차를 채웠다.

“아유. 괜찮습니다.”

손사래를 치던 여호석 피디가 주전자를 뺏어들며 우리 측 잔을 채워 주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감사 인사차 초청한 자리라서…….”

“감사 인사요?”

“출연에 대한 감사 인사죠.”

여호석 피디가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이 슬슬 정체기에 접어들고 있거든요. 타 본부 방송들이랑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런데 이제 뉴블랙 분들이 나온다고 하면 시청률 대박 아니겠어요?”

1~3위 순위가 매주 변동하는데, 우리가 출연하는 회차에서 화제성을 끌어모아 1위로 가겠다는 목표인 듯했다.

비주가 차를 홀짝이며 빙긋 웃었다.

“저희 너무 띄워 주시면 부담스러워요. 피디님.”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하하!”

부담 주지 말라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전하는 비주의 말에 여 피디가 화제를 바꿨다.

처음에는 마구 띄워 주는 이야기를 하더니, 이내 우리 성향을 파악하고는 딱딱 일 이야기로 흘러갔다.

“아무래도 저희 프로그램 게스트로 나올 분 중에 제일 유명해서 긴장 좀 하고 왔거든요. 그런데 TV랑 똑같으시네요.”

“음?”

막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희 본 적 없으세요? 저희들 맨날 방송국에서 막 여기저기 돌아댕기고 그래서 다들 한 번쯤은 보셨다고 그러던데.”

“아.”

여호석 피디가 미소를 지었다.

“뉴블랙 분들이 빵 터졌을 때에는 저희 HBS에 없으셔서…….”

“앗.”

작은 웃음들이 흘러나왔다.

15년도 연말 무대 사건 이후로 왕래 자체가 없었던 터라 우리에 대해 풍문으로만 접했다는 모양이다.

하긴.

우리가 본격적으로 방송국에서 교양국이나 예능국도 놀러 다니고 했던 게 작년부터니까.

“아무튼 이번에 정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도 주말 예능에서 꼭 한 번 1위 해 보고 싶어요.”

여호석 피디의 눈빛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뉴블랙 분들이 활약할 수 있도록 크게 판 깔아드릴 테니까, 마음껏 활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저희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더 이어 갔다.

그러고는 내 지시만 기다리며 침을 꼴깍이던 파블로프의 졸개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먹자.’

‘네!’

‘우아아아아!’

내 신호에 중현이와 지호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동생들과 함께 음식들을 한 점씩 먹으며 행복하게 웃는 동안 피디님과 작가님들의 말이 쭉 이어졌다.

“뉴블랙 분들이 나와서 제일 좋은 건 아무래도 그거네요. 이제 시청자 게시판이 더 이상 도배될 일이 없다는 거.”

“시청자 게시판이요?”

“저희가 출연자 추천을 받거든요. 근데 시청자 분들이 의견 써 주는 곳에 뉴블랙도 부르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거의 돌림 노래를…….”

“그래요?”

작가님 한 분이 태블릿으로 시청자 게시판을 보여 주셨다.

-다음 게스트로 뉴블랙 추천합니다!

-뉴블랙 불러 주세요ㅠㅠㅠㅠㅠㅠㅠ 꿀잼 예상

-뉴블랙 나오면 재미질듯

-옆동네에서는 주선우 실장으로 재미 톡톡히 봤다던디

-퀴즈 하나 낼게요! Q. PBS와 TBC에게는 있는데 HBS에겐 없는 것은? A. 뉴블랙

-피디님. 솔직히 중현이가 벽 부수고 그런 장면 생각하면 가슴 설레고 그러자나 나만 그래요?

우리 좀 불러달라고 하는 요청들이 끝없이 써져 있었다.

팬들이 아니고 일반 시청자들이 쓴 글이었다.

“자, 잘해야겠네요…….”

“그렇다고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뉴블랙 분들이 하시던 대로만 해도 대박 아니겠어요?”

그런 말을 하던 여호석 피디가 물었다.

“참. 저희 프로그램 포맷은 잘 알고 계시죠?”

“네, 관찰+방탈출 예능이요.”

“엄밀히 말하자면 시추에이션을 저희가 주고, 여러분이 거기에 맞춰 리액션을 하는 것에 가깝긴 합니다.”

제작진이 특정 상황을 부여하면 출연자들이 그에 맞게 반응을 해 주고, 상황실에 있는 패널들이 실시간 관찰을 하며 힌트를 주거나 게스트들을 지켜보면서 리액션을 하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그래서 핵전쟁 이후 벙커에서 살아남기! 같은 미션도 있고.

지진 상황에서 살아남기! 같은 것도 있고.

“저희도 재난 상황 같은 거 하나요?”

반짝이는 리혁이의 눈빛에 피디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래도 그런 건 뉴블랙 분들한테 너무 쉬울 테니까.”

“저희가요?”

우리가 손사래를 쳤다.

“저희 진짜 연약해요.”

“재난 상황 같은 것도 저희한테는 아주 충분할 것 같은데….”

“저 약해서 어렸을 때 한약도 먹었어요.”

눈을 동글동글 뜨며 허약한 어린이였음을 주장하는 중현이의 말에 작가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우리의 주장에 피디님이 물었다.

“여러분.”

“네.”

“움막… 만들 줄 아시죠?”

“선사시대 컨텐츠 진행하면서 많이 만들었죠. 이제는 작대기랑 지푸라기 있으면 2층도 가능해요.”

“불도 피울 줄 아시고요.”

“기본이죠.”

“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오염된 물을 여과하는 미니 정수기를 만드는 법도 아시고요.”

“네.”

“이래서 안 되는 겁니다.”

“아.”

우리가 머쓱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피디님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프로그램의 키 포인트가 위기감이랑 긴박감 조성하는 건데… 어지간한 걸로는 여러분을 어렵게 만들 수가 없어서요. 리혁 씨는 방사능 위기에 대처하는 지침도 있다면서요.”

“리혁이는 해외 투어 갈 때마다 비상 가방 챙겨 가요. 일본 갈 때도 방사능 계측기 챙겨 가려고 했다니까요.”

“……어딜 가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예요.”

소리 없이 웃던 작가님들이 빵 터져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편해진 웃음소리였다.

그런 분위기에 동생들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더 본격적인 일 이야기에 들어갔다.

“그래서 저희는 어떤 컨셉으로 특집을 진행하나요?”

“아. 그건 비밀입니다. 알려 드릴 수가 없죠.”

“저희한테는 알려 주셔도 되는데…….”

지호와 내가 말했다.

“우주 형이랑 제가 연기 좀 하거든요. 뭐든지 처음 보는 것처럼 놀랄 자신이 있어요.”

“정말이에요. 저 눈물 연기도 마음대로 할 수 있거든요. 왼쪽, 오른쪽 골라서.”

“형. 한 번 울어 주세요.”

내가 왼쪽으로 주르르륵 눈물을 흘려보이자 작가님들이 허어어어, 하면서 입가에 두 손을 모으고 좋아했다.

동생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깨를 쭉 폈다.

그런 우리를 보며 빙긋 웃던 여호석 피디님이 말했다.

“그래도 진짜 나오는 반응은 다르거든요. 아마 저 말고 다른 예능 피디들도 매번 하는 이야기겠지만… 소위 말하는 ‘찐으로’ 나오는 리액션이 있거든요. 그건 못 따라가죠.”

“그런가요.”

“정 궁금하시다면 테스트 한 번 해 보는 거 어떨까요? 여기 깐풍기를 보고 놀라 보세요.”

피디님이 깐풍기를 젓가락으로 드는 순간, 지호와 내가 허어어억! 하고 실감나게 놀라는 연기를 했다.

“으아아, 이거 뭐야!”

“으아악!”

나름 실감 나는 연기였다.

놀란 종업원 분이 들어와서 무슨 문제가 없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피디님이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요.”

“네, 그러면 미리 컨셉을 저희에게 귀띔이라도…….”

“그 전에 이걸 보시죠.”

“네?”

피디님이 들고 있는 핸드폰에 우리 뮤직비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Coin의 후렴구에서 리혁이가 한쪽 눈을 감고 상큼하게 웃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꺄아아아아악!

얼굴이 새파랗게 빛나는 귀신이 귀곡성을 지르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으아이!”

“아으!”

“흐아아아악! 엄마아아! 우주 혀어어엉! 아빠아아!”

연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찐 놀람의 감탄사가 우리 입에서 흘러나왔다.

막내와 리혁이가 양옆에서 나를 부둥켜안았다.

중현이만 재밌네 하며 턱을 괴고 있고. 비주는 중현이 뒤에 숨어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지지, 하듯이 손을 슥슥 젓는 우리 모습에 여호석 피디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셨죠? 보시다시피 진실된 리액션은 연기랑 다르거든요.”

“…….”

“출연하는 모든 게스트에게 사전에 컨셉을 알려 주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조곤조곤 웃으며 말을 하는데 무언가 피디님의 인상이 조금 바뀌는 기분이다.

차분한 광기가 느껴진다.

“참. 작가들 통해서 ‘재미만 있다면 무서운 것도 얼마든지 괜찮다.’ 라는 말씀을 전해 들은 걸로 기억하는데… 맞나요?”

“네, 재미만 있다면야…….”

“그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하. 맡겨만 주십시오! 여러분의 색다른 모습을 제가 발굴해 드리죠.”

그제야 무언가 기억이 나는 듯한 느낌.

내가 입을 열었다.

“저, 피디님.”

“네.”

“제가 전에 본 것 같은데… <지금부터 우리는> 연출하시기 전에 맡으셨던 프로그램 이름이…….”

“아. 제 전작 말씀이시군요. 하하.”

여호석 피디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목이 <21세기 괴담>이었습니다.”

“…….”

“왜 그러시죠?”

리혁이의 창백한 얼굴에서 남은 1g의 핏기마저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동생들과 나도 숨이 죽은 야채처럼 흐물거렸다.

아무래도….

이거 망한 것 같은데…….

*   *   *

HBS 공개홀.

가장 잘나가는 가수들만 쓰는 거대한 방 앞에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조금 있으면 생방송 시작.

그 전에 문안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안 와도 돼요.

분명히 뉴블랙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바쁠 때는 굳이 인사 안 와도 상관없다고. 인사 안 한다고 얼굴을 기억하고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후배 가수들 입장에서는 무의미한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눈도장이라도 찍어야지!’

‘반드시 이름 각인시킨다, 우리 물티슈……!’

‘이때 아니면 언제 뉴블랙 봐.’

신기한 유명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얼굴을 각인시켜야 할 존재였다.

가요계에서 지금 왕처럼 군림하는 선배 그룹 아니던가.

눈도장을 찍거나 이름을 알린다고 해서 전혀 나쁠 게 없었다. 게다가…….

“뉴블랙 선배님들밖에 없지?”

“아마도.”

뉴블랙이 컴백하는 시기에는 그 외에 잘나가는 그룹이 별로 없었다. 묻힐 것을 우려해서 기획사들이 피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고만고만한 신인들이 서로 어색하게 인사하며 줄을 서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잔뜩 긴장한 얼굴의 매니저가 문지기처럼 문을 열어 주고 닫는 동안, 안에서 쩌렁쩌렁한 인사 소리들이 들려온다.

“후우.”

물티슈의 리더 곽이 동료들을 모으며 말했다.

“떨지 말고. 인사 제대로 드리고 오자. 우리 뉴블랙 선배님들 이번에 처음 뵙는 거 아니잖아.”

“형. 근데 선배님들이 말 걸면 어떡해?”

“내가 답할게. 가만히 있어.”

그런 식으로 CD 건네주는 담당은 누구고, 하는 식으로 열심히 멘트 준비까지 하고 있을 때.

“들어오세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들어간 물티슈의 멤버들이 오들오들 떨었다.

“모-모-모이스처라이징! 안녕하세요! 당신의 촉촉함이 되어 주겠다! 물티슈입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부드럽게 인사하는 우주 선배의 말에 긴장이 살짝 풀리려고 할 때였다.

“음……?”

우주를 비롯해서 다른 네 멤버들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왠지 모르게 볼이 앙상하게 보이는 느낌.

눈가에 다크서클까지 져서 그런지 웃고 있는데도 마치 힘들어 보이는 기색이었다.

‘역시 탑 그룹쯤 되면 스케줄이 확실히…….’

그런 생각을 하며 얼른 선배들이 쉴 수 있도록 CD를 건네고 사라지려고 한 물티슈의 멤버들이었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메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무서운 거 종류

-서양 귀신 종류

-엑소시즘

-무서운 거 봐도 안 놀라는 방법

그런 문장들이 적혀 있는 메모지를 보며 멈칫하던 물티슈의 멤버들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며 방을 나섰다.

그들이 수군거렸다.

“선배님들 뭐 준비하시나?”

“다음 앨범 관련 아니겠어? 귀신 컨셉으로 뭐 나오시나 봐. 도깨비처럼.”

“대박…….”

그렇게 물티슈의 멤버들을 포함해 대기실을 방문한 아이돌들로부터 퍼져 나가는 소문들.

뉴블랙의 다음 앨범이 귀신과 오컬트라는 카더라가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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