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98화
어린 시절, 서리혁의 꿈은 철도 기관사였다.
어린이 과학책에서 읽은 증기 기관차나 철도를 볼 때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저건 대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걸까.
저 열차에 타서 칙칙폭폭 소리를 들으면 정말 끝내주는 기분이지 않을까.
‘나는 오늘 꿈을 이뤘다.’
서리혁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기관사실 조수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멤버들이 봤다면 깜짝 놀랐을 만큼 밝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건 뭘 보여 주는 건가요?”
“이건 말이죠. 전자동 에어컨을 작동하는 스위치인데요. 이게 자동으로 승객들의 쾌적한…….”
“그, 그럼 이건요?”
“이건 무정전 방송장치예요.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전기 공급이 없어도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죠.”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기관사의 설명에 서리혁이 두 손을 맞잡고 감동했다.
‘이게 바로 21세기 과학의 정수!’
눈을 반짝거리는 국민 아이돌을 바라보던 기관사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출발할까요?”
“네!”
그렇게 대전 지하철의 철도 기관사가 운행을 시작하면서 서리혁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아.”
어두컴컴한 터널로 들어가면서 서리혁의 가슴이 콩닥거렸다.
‘지하철 터널 안이 이렇게 생겼구나.’
소원 목록에서 하나 지워야겠다.
입술을 오므리고 뺨을 씰룩이면서 꼼지락꼼지락하던 리혁이 이내 마이크를 들고 방송을 시작했다.
손님들이 하나씩 들어오면서 적당한 타이밍을 노린 리혁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지하철 안내방송을 맡게 된 서리혁입니다.”
바로 뒤에 있는 1번 칸에서 사람들이 ‘와아아아-’ 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서리혁이 미소를 지었다.
‘저 너무 행복해요. 여러분!’
멤버들이 본다면 매일 지하철 기관사실에 태우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오늘만큼은 그림체가 다른 리혁이었다.
날카로운 선이 동글동글해진 느낌.
이제는 21살이 되어 버린 전직 과학 어린이가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방송을 이어 갔다.
“으음, 흥미로운 이야기라…….”
리더가 조언해 준 대로 실시간 방송에 올라오는 댓글들을 살피던 리혁이 고민에 빠졌다.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세요!
-과학의 도시니까 과학 얘기..?
-리혁아ㅠㅠㅠㅠㅠㅠㅠ
-Leehyuk’s L is Lovely
지하철에 탔으니까 기왕이면 열차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여러분이 타고 있는 이 지하철은 어마어마한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였다!
그래서 1000명이 넘는 승객들이 시속 80km 속도로 달리면 얼마나 큰 에너지가 되는지 신이 나서 설명을 하는데.
“……어라?”
다음 역에 도착해서 바깥을 살핀 서리혁이 당황했다.
몇몇 사람들이 지하철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멘탈 약하기로 유명한 메인 보컬의 마음에 쿵! 하고 바윗덩어리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어, 어째서?”
“네?”
“서울에서 방송할 때는 사람들이 거의 안 나갔다고 그러던데. 대부분 다 계속 타고 간다고.”
“어…….”
기관사가 이유를 말할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원인-분석을 따지는 서리혁의 논리적인 좌뇌가 돌아가기 시작…할 필요도 없이 원인이 딱 보였다.
‘이런.’
선배 과학자들이 늘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과학자들이 대중들을 위한 과학책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 저지르는 실수.
-일단 상대성 이론에 대해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기초적인 시간에 대한 설명을 흥미롭게 해야겠어.
혼자만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말을 하다가 대중들이 뚱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하다니.’
서리혁이 스스로 자책하는 동안.
핸드폰에서 멤버들의 톡이 쉴 새 없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지호 [교수님]
지호 [강의가 넘 재미없어요ㅠㅠㅠ]
비주 [난 재미있었어!!]
비주 [근데 사람들은 쪼금 지루해 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리혁아]
중현 [괜춘]
비주 [넌 안 듣고 있자나 -_-]
중현 [정답.]
그리고 그중에서 선우주가 보낸 뉴블랙 이모티콘이 눈에 띄었다.
우주가 ‘쯧쯧’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이모티콘.
“…….”
서리혁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과학 이야기는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운행을 이어 가던 기관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등 뒤의 1호차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괜찮아!’ 하고 웃어 주는 목소리에 다시금 힘을 얻은 서리혁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런 여러분을 위해 준비해 온 대전 지하철의 역사…….”
-이이이잉!
1호차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리혁이 말을 바꿨다.
“그냥 노래 한 곡 짧게… 불러드릴까요?”
-와아아아아!
오늘 하루 ‘서리혁의 즐거운 과학 & 역사 시간’을 꿈꾸었던 리혁이 쪼르륵 눈물을 머금으며 슬퍼했다.
* * *
대전의 서리혁을 시작으로 다른 멤버들도 순차적으로 지하철 방송을 이어 갔다.
[안녕하세요. 빛의 도시, 광주(光州)에 오게 되어 너무 행복한 비주입니다. 여러분 사랑해요!]
사랑스러운 매력을 뽐내는 비주의 광주 지하철 안내방송.
[여러분의 날씨와 먹거리를 담당한 중현입니다. 반갑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히 모실게요.]
푸근한 목소리로 부산 각 지역의 유명한 먹거리들을 설명해서 시민들의 침샘을 자극하는 래퍼.
[여러분. 저는 누구일까요?]
누구나 들어도 다 아는 목소리의 막내가 쾌활하게 진행하는 지하철 안내방송.
각지에서 멤버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뉴블랙과 광주에 얽힌 에피소드를 알려 주세요, 라고 ‘뉴블랙은무덤까지’ 님이 말씀해 주셨는데요. 소극장 투어 때 충장로 의류 매장에서 우주 씨가 특이한 옷을 사겠다고 해서 저희가 ‘형은 거기서 살아요, 우린 갈 거예요’ 라고 버려두고 온 적이 있어요.]
시민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버려졌어요……. 길을 잃어버려서. 버려진 건 저였고…….]
서글픈 목소리에 지하철에서 폭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멤버마다 특색 있는 방송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주는 요리나 생활 정보 프로그램의 MC처럼 밝은 목소리로 기삿거리가 될 만한 뉴블랙 에피소드를 부드럽게 풀어 주고.
[‘쌍떡잎식물’ 님이 중현아, 야구 어디 팬이냐 라고 질문해 주셨네요. 네, 저는 자랑스러운 KG 드래곤스의 팬… 허어어어, 야유가 쏟아지네요. 마치 사직구장 원정 경기를 온 기분.]
중현은 부산 시민들에게 친근한 동네 강아지처럼 다가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저 중현이가 내는 퀴즈입니다. 여러분이 애정하는 야구 팀의 마지막 우승은 언제일까요?]
‘저저! 점마, 선 넘네.’
[92년입니다. 그리고 제가 애정하는 KG의 마지막 우승은 89년이죠…….]
‘넌 나의 영원한 형제다. 김중현!’
부산에서 관심도 높은 야구 등을 주제 삼아 이야기하며 왠지 모르게 서글픈 공감대를 쌓아가는 중현.
그리고.
[‘여’ 해 주세요, 라고 ‘왕지호연기천재’ 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여? 이 말투가 좋아여? 헐… 환호성. 그럼 여러분과 함께 오늘 하루 1시간 동안은 ‘여’를 쓰겠습니다여!]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막내.
[허어어어! 목이 아프다고 하시는 분이 있네요. 목 아프면 안 되는데… 제가 목에 좋은 걸 알려 드릴게요. 일단 무조건 따뜻한 물 드셔야 돼요!! 일단 감기인지 확인하셔야 되니까 병원부터 가셔야 되고, 그거 역류성 식도염일 수도 있으니까…….]
‘볼륨을 최대로 키웠나?’
[볼륨이 너무 크다는 민원이 들어왔네요. 어… 이거 최소인데.]
‘최소였어?’
[그럼 목소리를 조곤조곤하게 할게요!!!]
조잘조잘 떠드는 국민 막내를 보며 시민들이 미소를 지었다.
팬사인회에서 가수의 수다에 질린 팬이 ‘아, 진짜…?’ 라는 말을 하게 하는 아이돌 멤버의 위엄을 일반 시민들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그래도 재미있네.’
덥고 지치는 여름날이라 그런지, 이렇게 새롭고 신선한 사건이 등장하는 게 몹시도 반갑다고 할까.
따스한 목소리로 ‘오늘 힘드셨죠? 저희가 함께할게요’ 하며 나서는 이들을 누가 안 반기겠는가.
요즘에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든 가수가 직접 찾아와 깜짝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이런 건 왜 하는 거래?”
“이번에 노래가 새로 나온다나 봐. 지하철이랑 관련된 노래라고, 지하철로 홍보하고 그런데.”
“영어라고 하던데… 어휴, 애들이 고생이 많아.”
이번에 발매하는 영어 곡에 대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어떤 이상한 놈팽이들이 ‘한국 가수가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 하면서 욕을 한다던데.
그런 이들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착한 애들한테 뭘 욕을 할 게 있다고, 참.’
누군지는 몰라도 뉴블랙한테 시샘이 폭발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뉴블랙에게 욕을 하거나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괜히 내가 욕 먹은 것 같고 그렇다.
“와…….”
그러는 한편.
“이게… 와…….”
온라인에 접속한 수플레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사가 몇 개야?’
지하철 안내방송이 화제가 됐는지, 포털 뉴스 사회면에 들어가도 뉴블랙의 안내방송이 이색 뉴스거리로 나오고.
연예면에서도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뉴블랙, METRO 홍보 위해 ‘메트로’ 찾았다.. 5인5색 안내방송에 눈길
-‘뉴블랙이 지하철에 떴다’.. 신곡 ‘METRO’ 홍보 일환
-지하철 이색 홍보 ‘뉴블랙’, 28일 VMA에서 신곡 무대 선보인다.. ‘한국 가수 최초’
사람들의 반응도 몹시 호의적인 편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단연 우주의 발언이었다.
[제가 사장님에게 전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소 지하철에 대해 느꼈던 불편 사항을 취합해서 전달하겠다는 우주의 멘트가 반응이 좋았다.
곧이어 운영 측에서도 ‘구체적인 부분들을 개선하겠다’ 하면서 시민들이 반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아이돌 커뮤니티에 유머글도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뉴블랙 메트로가 잘 돼야 하는 이유]
(과거 Y앱 라이브 방송에서 ‘미국에서 잘 되면 미튜브 본사 방문해 보겠다’ 라고 발언하는 뉴블랙 리더.jpg)
미튜브 댓글창 한국어만 따로 보기 공약 걸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뉴블랙 절.대. 성공해
-야 이건 그냥 드립이자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밍리스트 좀 줘봐 돌리게
-드립인거 아는데 순간 솔깃
-한국어 댓글 보려고 내리는데 안 나올때마다 딥빡 인정..ㅋㅋㅋㅋㅋ
-힘내라 우주선ㅠㅠ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METRO의 프로모션이 착착 긍정적인 효과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플레들이 그걸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우리도 뭔가 해야 돼.’
우리 애들이 어떻게든 영어 곡에 대해서 대중들에게 ‘귀엽게 봐 주세요~!’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그런 프로모션을 하겠는가.
‘미국 진출 곡이니까.’
다른 아이돌이라면 몰라도 뉴블랙은 현재 ‘국민 아이돌’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대중 친화적인 그룹이었다.
내 아들, 내 조카 같은 그룹.
그런 조카가 ‘그동안 주신 용돈으로 미국 유학 갈게요~’ 한다면 누구나 서운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때문에 혹시 모를 대중들의 서운함이나 반감을 고려해 이런 홍보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다들 응원해 주는 분위기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흥! 맨날 미국만 가고….’ 흥칫뿡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때문에 예쁘게 봐 달라고 뉴블랙이 대중들에게 둠칫둠칫 구애의 손짓을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 팬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으으음…….”
수플레들이 관자놀이에 손을 올리며 근엄하게 눈을 감았다.
‘내가 선우주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선우주다. 선우주다. 꺄르르륵…. 아, 안 돼! 잠식당하면 안 돼……!’
‘꽃무늬 입…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마구니야!’
방향을 바꿔 주선우 실장의 마음으로 빙의한 수플레들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이디어를 냈다.
‘제목이 메트로니까.’
지하철에 뉴블랙 노래 나온다고 광고 걸면 딱 아니겠는가.
수플레들이 수줍게 웃었다.
‘소박하게 지하철 광고 좀 걸자.’
* * *
미국에 그랜드 캐니언이란 곳이 있다.
웅장하고 경이로운 지형으로 소문난 곳이라 누구든 ‘와’ 하고 보게 된다고 하던데.
“와…….”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도 지금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
“…….”
태블릿 PC를 통해 보이는 코엑스 풍경.
삼성동 코엑스몰 메인통로의 파노라마에 우리의 메트로 티저 이미지가 걸려 있었다.
메트로 홍보나 우리와 관련된 홍보물이 코엑스를 점령한 것도 모자라…….
“이, 이거 봤어요?”
막내가 달달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형들이랑 저랑 지나온 지하철역들에 우리 메트로 광고 걸렸대요.”
“어느 역?”
“……모든 역이요.”
지호의 말에 잠시 숨을 멈췄다.
내가 지나온 모든 역이라면…….
“2호선 모든 역에…?”
“네.”
“…….”
서울뿐 아니라 대전, 대구, 부산, 광주에도 그런 광고들이 우후죽순으로 걸렸다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무슨 수플레 연합회 같은 곳에서 광고를 걸어 버린 건가 싶었는데.
광고를 건 사람들이 다 제각각인 것 같다.
어느 역에는 짭플레나 호일이 광고를 걸기도 했다.
-오늘도 대한민국의 달러 보유고가 튼튼해집니다
-경제는 뉴블랙!
-너희가 어떤 모습을 보여 주든, 우리는 너희의 모든 모습을 응원.. 어어? 레이디 우주.. 어어어!
-미국에도 ‘호’감을 가진 ‘일’반인들이 대거 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by 호일 모임 (실체 없음)
“……이 사람들 즐기고 있다. 이건 백 퍼센트 즐기고 있는 거야.”
“다들 엄청 신이 난 거 같아요.”
뭔가 본인들만 즐기는 느낌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응원을 보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이런 응원들은 언제나 큰 힘이 되곤 한다.
센스 있는 멘트 몇 개는 캡처를 해서 저장했다.
“나중에 힘들면 봐야지.”
“형, 힘들어요?”
비주의 말에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꼭 힘든 상황이 있다기보다는…….”
누군가 ‘힘들어요?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며 연습을 더 종용한다든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는데 ‘5분만 더?’ 하며 눈웃음을 보인다든가. 춤의 그림자가 안 예쁘다고 한다든가.
다른 졸개들과 눈빛 교환을 하며 조용히 웃었다.
‘곧 힘들 테니까.’
‘그럴 거니까.’
연습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체력적으로 슬슬 한계가 온다.
그래도 개인 스케줄을 어느 정도 마무리해서 그런지, 연습에만 온전히 신경을 기울일 수 있어 여유로운 편이었다.
“드라마 촬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바보였고… 나는 멍청이였고… 나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저질러버린 건지 모르겠고…….”
아. 물론 얘는 빼고.
쉬는 시간에도 틈틈이 대본을 살피며 중얼중얼하는 우리 막내의 눈빛이 반쯤 정신이 가출한 것처럼 보였다.
“뭐, 우린 여유로우니까.”
“믹스 테이프 작업이 끝나서 마음이 편-안.”
“별로 불쌍할 것도 없어요. 쟤가 원해서 한 거잖아요.”
중현이가 뿌리는 젤리를 먹으며 깔깔대니 막내가 우리를 찌릿 하고 째려보았다.
키득거리면서 다 같이 토라진 막내를 달래 주는 한편.
“근데…….”
중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저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오늘 뭐 까먹은 느낌 들지 않나요? 비 오는 날 우산 안 챙긴 느낌.”
“음…….”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한데…….”
“오늘 뭐 있었나?”
일리 있는 말이었다.
뭔가 기억할 만한 것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막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으으음…….”
“음…….”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떠오르는 게 없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중요한 건 아니겠지.”
* * *
그날 이후.
뉴블랙의 팬덤 수플레가 곳곳에 통 큰 액수를 기부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국 지하철이 광고로 도배됐다.
센스 있는 문구 등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우와, 이거 봐.”
그중에서 소속사 레몬 엔터에서 건 광고의 퀄리티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양재시민의숲역의 LED 광고판에서 저마다 다른 수트를 차려입은 뉴블랙 멤버들의 영상이 움직이고.
청계산입구역의 LED 광고판에서는 뉴블랙이 METRO라는 팻말을 들고 홍보하고 있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흐하하하! 이거 봐!”
어느 역에서는 지하철이 들어올 때의 바람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린 광고판이 있었다.
기둥의 LED 패널에서 ‘METRO’ 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뉴블랙 멤버들.
지하철이 도착해서 지나갈 때마다 바람이 불어서 ‘으헷퉵퉵’ 하며 바람에 날아가고 있었다.
‘귀여워…….’
그만 뉴블랙에게 콩깍지가 씌어 버린 대중들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METRO 출시를 기념해 ‘지하철 미니 게임’ 이라는 컨텐츠가 나오기도 하고.
‘예능도 하네?’
온라인에서는 이번에 뉴블랙의 앨범 비하인드를 다룬 힐링 리얼리티에 대한 관심도도 높았다.
이른바 선우주의 휴식‘일’기.
-선우주의 휴식‘일’기..“쉬면서 일하는 신개념 예능”
-이번에는 ‘감동’과 ‘힐링’이다.. 레몬 엔터측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 전혀 다를 것”
-[이슈핫] ‘선우주의 휴식일기’ 관전 포인트는?
미국에서 위염으로 쓰러졌던 리더를 멤버들이 지극정성으로 케어해 주는 감동 스토리… 라는 설명에 대중들이 관심을 가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거짓말 같은데.’
‘감동 스토리… 감동(을 파괴하는) 스토리겠군.’
‘안 속는다.’
그렇게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복작복작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가운데.
그런 반응을 바라보며 조용히 집무실에서 술 한 잔 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
당장 내일 가수의 신곡 발매를 앞두고 있는 어느 기획사의 회장이었다.
쪼르르륵.
쪼륵.
술이 잔에 흐르는 소리가 눈물이 흐르는 소리와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돈하는 박태준 회장이었다.
“허허, 참…….”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마음대로 돌아가던가.
애써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을 때였다.
감상적인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술을 홀짝이려던 바로 그때.
반짝.
반짝반짝.
“음……?”
어디선가 느껴지는 반짝임에 고개를 돌린 박태준 회장이 술을 입가로 주르륵 흘렸다.
TJ 엔터 사옥 맞은편의 거대 전광판 때문이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라는 글귀가 뜨더니.
곤룡포와 익선관을 쓴 뉴블랙의 리더가 멤버들이 매는 가마를 타고 있는 티저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거… 지금 뭐 하는……?”
정면으로 걸어온 이들이 이내 전광판 속에서 둠칫둠칫 위아래로 몸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뾰옹! 뾰옹! 하고 허공에 새겨지는 글자.
[선우주의 휴식‘일’기]
선우주가 짜잔- 하며 글씨를 향해 양손을 근엄하게 들어 올리면서 광고가 끝났다.
둠칫둠칫.
다시금 몸을 흔들며 뒤돌아서는 가마.
[2017. 8. 18 (금) 첫 방송!]
왠지 모르게 얄밉고 열 받는 폰트에 박태준 회장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