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 더미(Dummy)
이빨 보이지 마. 무서우니까.
다행히 어그로는 튀지 않았다.
카멜은 ‘그’라는 인물에 대해 큰 위협을 느끼는 것 같았다.
카멜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될수록 나에겐 좋다. 그래야 추후 나에게 향하는 시선을 떨어트릴 수 있을 테니까.
‘더미(Dummy)를 놓길 잘했네.’
카멜에게 언급한 ‘그’는 일종의 더미였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탈출 이후 생존에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고, ‘그’란 더미는 카멜의 시선을 끌며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까진 더미가 카멜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동맹을 통해 내가 얻게 되는 이득은?”
“모릅니다.”
“몰라?”
“동맹 의사를 표한다면 직접 얼굴을 보고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직접 얼굴을?”
그 말에 카멜이 흥미를 보였다.
“시간과 장소는?”
“보름 후 엘레토르 성곽 주변에 자리한 작은 마을입니다. 지도를 주신다면….”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될 테고, 동맹 표시 말인데, 혹시 너를 풀어주는 건가?”
“…….”
누가 지능캐 아니랄까 봐.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하지만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악당에겐 더 뻔뻔해져야 한다.
“2, 2만 골드.”
“뭐?”
“절 풀어주는 것과 2만 골드를 요구합니다.”
금전 요구에 카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금 광산 지분을 거래 조건으로 내미는 상대가 고작 2만 골드를 요구하다니.
“널 풀어주는 건 그렇다 치고 2만 골드는 뭐지?”
“제가 쓸 겁니다.”
“뭐?”
“제 노후 자금이거든요.”
“…….”
“저 암살자 그만둘 겁니다.”
카멜은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회귀 전, 자살 공격으로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까지 남겼던 놈이, 이젠 눈앞에서 은퇴를 언급하며 돈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카멜은 짧게 혀를 찼고, 난 아주 해맑게 두 눈을 끔뻑이며 카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 시킨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이 정도까지 했으면 살려줘, 새끼야.
잠시 숙고하던 카멜은 곧 리옹을 불러 몇 마디를 남기고는 나를 바라봤다.
“동맹에는 신뢰가 필요한 법이지.”
“무, 물론입니다! 당장 저를 풀어주신다면 ‘그’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그 동맹 표시 말인데. 잠시 미뤄야겠어.”
“…네? 그게 무슨.”
“나도 사실 확인이 필요하니까.”
무슨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러고 보니, 리옹이 안 보인다.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살짝 불안감이 올라왔을 때, 리옹이 누군가를 데리고 감옥에 들어왔다.
탁한 회색 로브를 걸친 작은 체구의 인물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네 능력이 필요하다.”
눈앞의 사내가 로브를 벗는 순간, 나는 숨을 헙 들이켰다.
얼굴 전체부터 목 아래로 이어지는 부분까지, 모든 부위가 흉측한 문신으로 빼곡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어딘가 섬뜩함을 자아냈다.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놈이었다. 인간을 많이 죽여본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하나?
소맷자락 사이에서 투명한 수정 구슬을 꺼내는 모습에 난 놈의 직업을 바로 파악했다.
‘주술사!’
신비 혹은 흑주술로 크고 작은 기적을 발휘하는 존재들.
신비 쪽은 자연과 생명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해코지당할 걱정이 없지만, 눈앞의 놈은 아무리 봐도 흑주술 쪽에 특화된 놈 같았다.
악당 곁에 붙어 있는 놈이니 당연한 건가?
수정 구슬을 내밀고 물건을 품평하듯 나를 살피고 있는 눈빛이 영 불안했다.
“이놈의 기억을 어디까지 뽑을 수 있지?”
“죽여도 됩니까?”
죽여도 되냐니.
첫마디부터가 소름 돋는다.
이 문신충 새끼가.
그나저나, 기억을 뽑는다고? 그 짓이 벌써 가능해?
“죽는 건 곤란해.”
“무슨 기억이 필요하신 겁니까?”
“최근 한 달 정도의 기억 정도라면?”
“백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카멜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백치가 됐을 때를 잠시 계산해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이런 시발.’
잠시 깜박했다.
카멜 저 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1챕터 대악당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전까지는 분위기 좋게 교섭이 흘러가는 것 같더니, 놈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교섭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살려두는 것까진 좋았는데,
‘배, 백치라니!’
위기감이 몰려왔다.
변수였다.
학살자의 세력을 돕는 흑주술사들이 등장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챕터 중반 부분이었다. 설마 이 시기부터 인간의 기억을 뽑아내는 흑주술사를 곁에 데리고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카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발밑에서 의식을 준비하는 주술사의 모습에 난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그냥 붐(Boom)을 터트리고 다 같이 죽어버려?’
주술사는 몰라도, 리옹의 보호를 받는 카멜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자살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난 살고 싶다고.
“보름 전까지 그가 말한 장소로 제가 도착해야 합니다!”
“그 장소로 ‘살아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 아니! 그 장소는 저만 알고…!”
“기억을 뽑아내면 알게 되겠지.”
말이 안 통한다.
분명 다른 의도로 내 기억을 뽑아내려는 게 분명했다.
‘그의 정체!’
카멜은 ‘그’가 자신과 접촉했을 거라 확신하고 이 짓을 벌이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이 뽑히면 구라가 들킬 텐데, 그럼,
‘죽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때, 주술사가 몸을 일으키더니, 카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리를 잠시 비워주셔야겠습니다.”
“나가란 말이냐?”
“의식에 필요한 약초를 태울 건데, 정신에 무척 해롭습니다.”
“정신에 해로운 약초?”
“파양초란 것인데, 중독되면 정신 방벽이 무력화됩니다. 기억을 뽑기 위한 사전 준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술사의 마지막 말에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파양초?
크룩스 암살자들이 내 머리맡에서 태웠던 독초의 이름과 같았다. 파양초의 효과가 대상의 정신 방벽을 무너트리는 것이었나.
그러고 보니, 익숙한 풀들이 내 밑으로 잔뜩 깔려 있었다.
이게 파양초라면.
‘나한테는 안 통했는데?’
장시간 파양초를 흡입해도 중독은커녕 멀쩡하기만 했다. 그 덕에 암시에서 벗어나 이렇게 살아남지 않았나.
그 파양초를 나에게 태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난 카멜을 향해 다급히 외쳤다.
놈이 등을 돌린 채 방을 벗어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소, 소용없을 겁니다!!”
다행히 놈의 발걸음을 멈추는 데 성공했다.
“주술에 걸리지 않을 거란 말입니다. 제 기억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그’에게 가호를 받았으니까요. 그는 이것까지 예상했습니다.”
예상은 무슨.
일단 생각난 대로 지껄인 것이다.
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내 외침에 바닥에 깔린 파양초를 태우던 주술사가 클클클 웃으면서 나를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는구나. 네 몸에 흐르는 기운으론 파양초를 버틸 수 없어. 반나절이면 네 영혼에서 기억을 모조리 뽑아내고도 남는다.”
“…….”
“흐흐흐, 두렵나?”
당연히 두렵지 문신충 새끼야.
너였으면 오줌 지렸어.
난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문 채 카멜만 바라봤다. 때론 침묵이 더 강한 설득력을 보일 때가 있다. 제발 먹혀라.
“네놈 말대로 된다면 다시 얘기하지.”
하지만 씨도 안 먹힌 채 카멜은 기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나와 주술사만 공존하는 공간.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놈을 보니, 자살 충동이 올라왔다.
‘확, 터트리고 죽어?’
주술사는 투명 구슬을 움켜쥔 채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 순간 구슬에서 반응이 나타났다.
파아아앗―!
“……!”
구슬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와 주술사의 몸을 에워쌌다.
그때부터 주술사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웅얼거리며 파양초를 태우기 시작했다. 파양초가 타며 감옥 안을 뿌옇게 채웠지만, 주술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몸을 둘러싼 보랏빛이 주술사의 정신을 보호한 듯 보였다.
“쿨럭, 쿨럭!”
전에 암살자들이 태웠던 양보다 훨씬 많았다.
지독한 연기에 눈과 목이 따가웠다. 화생방이 떠오를 정도의 매캐함.
다행히 그것 빼곤 멀쩡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파양초는 내게 안 통한다.
‘설마, 내 능력인가?’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온 나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 몸뚱이의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랬다면 암시에 넘어가 카멜 앞에서 붐(Boom)을 터트리지 않았겠지.’
파양초를 견디는 힘은 분명 나와 관련이 있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보랏빛으로 물든 연기 속은 음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술사는 내 눈앞에 수정구를 올리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기억을 뽑아내려는 의식 같은데,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파양초는 파양초고 사람을 홀리듯 빛을 뿌리는 수정이 왠지 위험해 보였다.
감옥에선 연신 주문 소리만 흘러나왔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
“…….”
주문이 뚝 멈췄다.
난 살며시 눈을 뜨곤 앞을 바라봤다. 주술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피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술이 실패한 듯 보였다.
‘백치가 되는 건 피한 건가.’
당당하게 큰소리를 쳐놓긴 했는데, 주술이 진짜 안 통할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이 파양초의 면역에만 국한된 게 아닌 건가?
이건 여유가 된다면 꼭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생존에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았으니까.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내 상태가 완전 멀쩡해 보이자, 주술사가 내 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자, 잠… 커억!”
이 문신충 새끼야. 이렇게 목을 조르면 대답을 못 하잖아. 대답을 듣고 싶으면 목을 놔달라고.
버둥거렸지만, 쇠사슬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목을 움켜쥐던 주술사가 갑자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전보다 거칠고 사납다.
수정 구슬이 내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번쩍―
주술사의 두 눈이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곧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크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는데, 뇌리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레 같은 놈! 꿇어라!’
성난 주술사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내 정신을 강제로 집어삼키는 느낌.
최면에 걸린 듯 내 눈동자 역시 주술사와 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더니 공허함이 몰려왔다. 진짜 백치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고통과 혼란이 잠재된 의식 속에서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쾅―!
“……!”
머릿속에 큰 폭발이 터졌다.
아니, 폭발이 터진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카작―!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수정 구슬에 금이 가더니 파삭하며 깨져버렸다.
내 목을 조르던 주술사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난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숨 막혀 죽을 뻔했다.
“크윽! 이게 무슨…!”
반쯤 나갔던 정신이 돌아왔다.
두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눈물인 줄 알았는데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는 붉었다.
뜨거운 콧물도 마찬가지.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난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바닥 밑 참혹한 광경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쓰러진 주술사가 보였다.
그런데,
“……머리가.”
주술사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폭탄에 맞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