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28화 (28/130)

28화 협상하자

창―!

단검끼리 부딪친 순간, 상대는 단검을 놓쳤다. 마비가 덜 풀린 부작용이었다.

난 상대를 발로 찬 뒤 목에 단검을 겨누었다.

일단 제압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난 고개를 돌려 숲 주변을 살폈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인기척들이 느껴진다.

수가 제법 많다.

도망가야 하나?

하지만 주변을 보니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여덟? 아홉?’

고요히 가라앉은 숲 사이로 그들은 어둠을 은폐 삼아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서남북.

전방위로 순식간에 포위됐다.

키메라들의 습격에서 살아남을 정도면 실력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상대하기엔 부담스러운 숫자.

아니, 전투는커녕 도망치는 것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키메라 폭풍 다음에는 크룩스냐?

언제쯤 안식이 찾아올는지.

포위망은 서서히 좁혀졌다.

일촉즉발의 순간처럼 느껴졌는데, 의외로 그들은 코앞에서 더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포위한 채 지켜보는 모습.

어째서?

의문도 잠시, 나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제압한 사내를 바라봤다.

설마, 이자 때문에?

의문이 들면 알아보면 된다.

난 검 끝으로 인질의 목을 살짝 찔렀다. 사내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 순간,

“그분을 죽이면 너도 죽는다.”

숲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벌한 기운을 담고 있었는데, 마치 내 행동에 분노하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협박처럼 기세가 사나웠는데, 난 오히려 피식 웃었다.

죽음의 문턱을 서너 번 넘다 보면 간땡이가 이렇게 커지나? 이런 협박은 이제 우스웠다.

“그러니까. 죽이기 전에 앞으로 모두 튀어나와.”

“…….”

“아홉 정도인가? 부끄럽게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 숨어있다 발각당하면 이자의 목숨을 책임질 수 없으니 머리 굴리지 말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택을 두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이다.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고, 난 붙잡은 사내가 저들의 우두머리가 아닐까 의심했다.

역시 예상대로 단장인가?

사내를 바라봤는데, 무슨 생각인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표정.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의문도 잠시, 난 다급히 자세를 잡았다.

주변으로 검은 인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무 위, 숲 사이, 바위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정확한 숫자는 열 명이었다.

난 바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호리호리한 복면인에게 집중했다.

‘한 명 더 있었네.’

유일하게 기척을 잡아내지 못한 인물이었다. 은신 능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강하다는 뜻인데,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잠시 후, 난 주변을 둘러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염병할, 이건 너무 심하잖아!’

왼쪽과 오른쪽, 앞과 뒤를 돌아봐도 마나 기운이 감지됐다.

전원이 최소 1성 이상이란 뜻.

‘전투 즉시 뒈질 각이고, 도주도 힘들 것 같은데… 이 새끼들 뭐지?’

최악을 가정해 조직에서 보낸 추적조도 염두에 두었는데, 전력을 보니 내 착각이었다.

학살자 카멜을 암살하는 데 일곱이 동원됐다. 그런데 눈앞의 전력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고작 뉴비 암살자인 나를 죽이러 보내기엔 터무니없는 전력이란 뜻이다.

그 정체가 궁금해졌다.

“이봐.”

외팔이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무시하기 힘들어서 녀석을 바라봤는데,

“협상하자.”

“협상?”

“그래. 그 전에…….”

사내는 주위를 잠시 둘러본 뒤 동료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짓했다.

수신호.

나도 알고 있는 크룩스의 수신호였다. 그래서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암살 지시?

“죽여.”

사내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단검을 쳐들었는데, 그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암살자들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놈들.

동시에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암살자들이 주변에 너부러진 도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난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사내를 내려다봤다.

“…뭐 하는 짓이지?”

“대신 도와준 것뿐이야. 병신같이 가만히 있길래. 뭐, 그 덕에 난 살아남았지만.”

“…….”

“뭐야, 설마 그거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어?”

사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래 살기 그른 놈이네. 그 능력을 누가 알면 어쩌려고.”

“이젠 너만 알고 있지.”

“날 죽이는 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난 누구한테도 네 비밀을 주절거릴 생각이 전혀 없거든. 누구 좋으라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암살자들이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눈앞의 사내. 이제 이 녀석만이 내 능력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난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도망치는 것도, 부딪치는 것도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마법진에 갇힌 이상 저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유리한 포지션은 지금뿐이다. 우두머리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원하는 게 뭐지?”

“말했잖아. 협상하자고. 그런데 그 전에 무척 찝찝한 점이 있어서 말이지. 그것부터 털어내자고.”

“뭘 말이지?”

“네놈 정체. 확인이 필요해.”

처음으로 사내의 표정에 긴장이 스쳐 갔다. 기대 반 불안 반이 섞인 눈빛인데, 날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너, 마스터 사람이냐?”

“뭐?”

“우리를 어떻게 찾았지? 크룩스 내의 정보력으로는 찾기 불가능했을 텐데.”

“뭔 개소리야?”

“날 몰라?”

사내는 질문을 던지면서 내 반응을 살폈다.

크룩스 출신의 외팔이 사내.

내가 너 따위를 알 리가….

순간, 벼락같이 한 존재가 떠올랐다.

어? 잠깐만?

내 멍한 반응에 사내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녀석의 시선은 목을 겨눈 내 단검에 닿아 있었다.

“이건 단장만 쓸 수 있는 표식 단검이다. 너처럼 새파랗게 어린놈이 가질 수 있는 단검이 아니란 소리지. 몇 가지만 물어볼 건데,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지금껏 물어본 건 뭐지?”

“간단한 확인 정도? 지금이 진짜야.”

“웃기는 놈이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협상 결렬이지. 날 죽이든 마음대로 해.”

“…….”

같이 죽자고 뻗대는 모습이 꽤나 강경했다.

놈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그건 곤란한데.

왠지 질문의 답에 따라 놈의 반응이 갈릴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을 살필수록 느껴지는 게 있었거든.

“그 단검 누구 거야?”

“내가 속해 있던 단장의 것이다.”

“단장의 단검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대가 단장을 죽였다고 판단해도 되지?”

예리하네.

지금껏 그걸 고민하고 있던 건가.

그나저나 대화를 해보니, 크룩스와 이미 척을 진 느낌인데.

“단장 외 다른 동료들도 이곳에 있나?”

“라웁 숲에 들어온 건 나 혼자야. 나머지는 전부 죽었다.”

“누구에게 죽었지?”

여기가 포인트인데, 난 고민 없이 답했다.

“나한테.”

“…….”

내 답에 사내는 침묵했다. 잠시 후, 사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유.”

“내게 벌레를 먹였거든.”

“…벌레?”

“붐(Boom)이 이곳에 기생 중이다.”

내가 덤덤한 표정으로 심장을 쿡쿡 찌르자, 사내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동시에 긴장이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벌레를 삼켰다는 건, 조직에서 버려졌다는 뜻. 그건 사내가 가장 잘 알았다. 더는 크룩스와 관련해서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손목을 잡아봐도 되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사내는 내 손목을 덥석 움켜잡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곤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칼이라고 한다.”

“…칼.”

“내 이름이다. 넌 이름이 뭐지?”

사내의 이름을 듣는 순간, 하마터면 단검을 떨어트릴 뻔했다.

난 침묵했다. 답을 안 한 게 아니라 놀라서 못 했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칼’이라고?

칼이 왜 여기서 나와?

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사내를 내려다봤다.

“다행히 우린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흉터 가득한 얼굴로 환하게 미소를 짓는데, 어째 무섭다.

난 소설 속에서 칼의 인상착의를 떠올렸다.

나이는 40대, 한쪽 팔에 강철 의수를 착용한 전(前) 크룩스의 암살자 출신. 온몸에 자상이 있고, 얼굴은 무식한 산적을 닮… 응? 정말 그러네?

그런데 슬라임 배 속에서 첫 만남이라니, 내용상 말이 안 된다.

“내 말 듣고 있나?”

“아, 알이다.”

“알이라, 가명이군.”

“…….”

이 아저씨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하긴, 칼이라면 쉽게 속이기 힘들겠지.

난 말없이 칼을 내려다봤다.

정말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다.

‘칼 바스타인.’

난 칼의 풀네임을 기억할 정도로 눈앞의 사내를 잘 알고 있다.

칼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시기는 반년 후 학살자가 에토르 가문을 짓밟고 그 영지에 깃발을 꽂을 때다.

학살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대가로 크룩스의 몰락을 바랐던 인물.

내가 벌레 폭탄, 붐(Boom)을 삼켰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벌레를 삼킨 후 마스터의 손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아, 이젠 나까지 두 명인 건가?

그 전의 행보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 카멜과 만나기 전에 실험체 감옥에 갇혀 지냈던 건가?

‘그럼, 마법진을 살아서 빠져나왔다는 건데.’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아니 그것보다 조금 전 칼은 나와 함께 슬라임에 잡혀 죽을 뻔했다. 내 발악이 아니었다면 사이좋게 도미닉의 실험체로 사라졌겠지.

칼에게 일어나선 안 되는 미래가 벌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내 존재가 칼의 운명을 비틀어버린 것 같았다.

‘오히려 잘된 건가?’

칼의 운명이 바뀌는 게 나에겐 훨씬 이득이었다. 아니, 무조건 바꿔야 했다.

칼 바스타인이 학살자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 안 그래도 팍팍한 이 세상이 더 괴로워질 테니까.

“그 단검으로 날 찌를 게 아니라면 치우지? 팔 안 아파?”

고민은 짧았다.

난 단검을 치우고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위험한 판단 같지만, 무척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우선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었고, 눈앞의 사내가 그 칼이라면 안심해도 괜찮았다.

‘학살자의 숨겨진 비수.’

소설 속 칼 바스타인의 별명이었다.

어둠 속에서 학살자를 도왔던 악당 조력자.

그는 주군인 학살자와 이득을 두고 저울질할 만큼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확실한 인물이었다.

즉, 내가 그에게 줄 게 있으면 내 목숨은 보장된다는 뜻.

[협상하자.]

조금 전 칼이 내게 한 말이다. 그는 내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었다.

* * *

“나를 구해준 사람이다.”

흙먼지를 털고 일어난 칼은 내 앞에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조금 전까지 인질 놀이를 했던 사이라 이게 뭔가 싶었지만, 칼의 행동은 나와 암살자들의 갈등을 삽시간에 풀어냈다.

호리호리한 녀석이 다급히 다가오더니, 비틀거리던 칼을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다. 엘튼.”

“아닙니다. 칼 님이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못 뵙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먹힐 땐 끝인 줄 알았지. 운이 좋았어.”

“다신 무모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전 남은 이들을 책임질 그릇이 못 됩니다.”

“내 판단으로 모두를 위험에 빠트렸으니, 책임을 진 것뿐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녀석들이 전부인 거냐?”

엘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이 목숨 걸고 마물들의 시선을 끌었는데도 절반에 가까운 전력을 잃은 것이다.

여태껏 가장 큰 피해였다.

‘하필 그 타이밍에 마물들이 들이닥치다니.’

무방비 상태로 산채에서 마물들에게 포위당했다.

최악의 판단이었지만 5성의 등장 소식은 이 빌어먹을 곳을 벗어날 유일한 동아줄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5성의 존재 여부도 확인하지 못한 채 큰 피해만 입고 자신은 겨우 목숨만 부지했다.

‘다행이라면 최선 대신 차악이라도 찾았다는 건데.’

전화위복이라면 전화위복이었다.

적어도 절망 대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으니까.

칼의 시선이 멀뚱히 서 있는 사내에게 향했다.

자신을 알이라 소개한 남자.

“그 눈빛은 뭐야? 할 말이라도 있나?”

“아주 많지.”

내 물음에 칼은 씨익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 더는 5성의 존재는 없었다.

새로운 동아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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