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29화 (29/130)

29화 칼 바스타인

“폭우에 휩쓸려 왔다고?”

“정신 차려보니 여기였습니다.”

“넬리토리에서 이곳까지? 운빨 죽이는 녀석인데? 그 거리를 살아서 오다니.”

“운빨이라….”

확실히 운빨 좆망이긴 하지.

소설 속에서 눈을 뜬 순간 학살자의 멱을 따러 가는 자살 특공대의 신입 암살자에 빙의했으니까.

그것도 모자라 학살자 앞에서 굽신굽신하며 온갖 개고생을 하고 벗어났더니, 폭우에 휩쓸려 도착한 곳이 미치광이 새끼의 실험체 감옥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안 돼서 키메라 군단의 습격을 받았고, 눈앞의 칼을 만났다.

“시발.”

“……?”

길게 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마냥 최악인 건 아니었다.

바락바락 살아남으면서 쓸만한 보상들을 얻기도 했으니까. 실험체 감옥도 최악이긴 했지만,

‘학살자보다 먼저 칼 바스타인과 인연을 맺었지.’

눈앞의 인연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칼과의 인연은 장기적으로 판단하면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학살자의 숨겨진 카드 하나를 제거하는 셈이니까.

앞서 학살자의 정복 전쟁을 책임지던 주술사 도네콜린트마저 제거한 상태라, 학살자의 인재 테크트리에 균열을 준 상태였다. 여기에 칼까지 빼버리면?

타격이 엄청날 것이다.

물론, 학살자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칼을 바라보자, 그는 이상한 놈을 보는 것처럼 물었다.

“근데 왜 말을 높이는 거지?”

“이제부터 협력 관계니까요.”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제 마음입니다.”

“웃긴 놈이네.”

인상 더러운 마흔 살 아저씨한테 반말을 찍찍 뱉는 게 좀 어색해서 말이지.

‘임시적인 동료 관계라.’

칼은 내게 탈출 때까지 협력 관계를 제안했는데, 큰 고민 없이 수락했다.

스토리에 변화가 없다면 칼 일행은 훗날 이곳을 벗어나 학살자와 만나게 되어 있다.

머무는 동안 안전도 보장받는 셈이니, 버스 탄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빌붙어 있다가 상황을 보며 움직일 생각이었다.

난 칼 일행과 숲을 거닐고 있었다.

준비된 아지트가 있다고 했는데, 들어보니 꽤 오래 머문 티가 났다.

“어제 왔다면 이곳에 대해 전혀 모르겠는데?”

“뭐 좀 아는 게 있습니까?”

“아주 빌어먹을 곳이지. 마법진 결계 같은데, 들어올 순 있어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잡혀 오신 겁니까?”

“아니,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흘러들어 왔어. 두 달 하고 보름 정도 갇혀 있었지.”

“…네?”

난 멈칫하곤 칼을 바라봤다. 그 시간이면 키메라 군단을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닐 텐데, 그때마다 살아남았다고?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그럼, 그 괴물들은…….”

“시도 때도 없이 봤지.”

“그때마다 버티신 겁니까? 괴물 수를 보니,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 같던데.”

“방법이 있어.”

“방법?”

“그건 조금 있다 알려주지.”

역시, 키메라를 피할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다만, 피하는 것만으로 이곳을 벗어나진 못할 테니,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저들과 처음부터 같이한 겁니까?”

“같이했지. 스물다섯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열 명 남짓이야.”

“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솔직히 이젠 좀 지쳐.”

칼은 쓰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난 마른침을 삼켰다.

칼 일행이 변고를 당한 데에는 5성 소식을 퍼트린 내 책임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자서 어떻게 단장과 암살자들을 제거한 거지?”

“파양초를 알아보고 취한 척 연기했습니다. 방심을 유도한 뒤 암습했죠.”

“임무가 뭐였지?”

“음, 그게….”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스토리는 약간의 각색이 필요했다. 하나하나가 워낙 믿기 힘들어서 말이지. 나 같아도 내 스토리를 못 믿겠는데, 칼이라고 믿을까.

의심만 살까 싶어 대충 둘러댔는데,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홀로 해결하다니, 실력이 상당한데.”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라…….”

칼은 굳이 그 능력이 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거진 숲을 벗어나 확 트인 들판을 걷는데,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쪽이 아니야.”

목조 건물이 눈에 띄어서 그곳을 바라봤더니, 칼은 고개를 흔들며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다.

저 건물은 나도 아는 곳이다.

도적 산채.

어젯밤 지옥 파티가 열렸던 장소였다.

“왜 저곳을 쓰지 않는 겁니까? 아지트로 사용하기에 좋은 환경 같은데.”

“저곳에 있으면 죽기 딱 좋아. 가장 피해야 하는 곳이지.”

“저곳이요?”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어부가 그물을 던지려고 하는데, 어디에다 가장 먼저 던질까?”

“…….”

“한곳에 우글우글 몰려 있으면 괴물들의 최우선 표적이 되지. 저 산채는 미끼를 모으는 장소야.”

“…미끼? 산채 사람들은 괴물의 존재를 모르는 겁니까?”

“대부분 모르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왜죠?”

“간단해. 그물이 꽉 차면 어부는 집에 가거든.”

“…….”

“이곳에 살아남은 이들이 우리뿐일까? 제법 많아. 하지만 오래 버틴 녀석 중에 괴물의 존재를 알리는 멍청한 놈은 없어. 왜? 알려주면 생존 확률이 떨어지니까.”

“그럼 저 산채는….”

“암묵적으로 가장 안락하게 만들어놓지.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머물 테니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새로 유입된 이들을 미끼로 삼는 곳.

확실히 냉혹한 세상이었다.

“비인간적 같아?”

“도덕적이지는 않죠.”

“또 머저리 납시었군. 이런 방식에선 나랑 잘 안 맞나 보네.”

목적을 위해 타인을 미끼로 쓰는 심계는 학살자와 닮았다. 이래서 오랫동안 쿵짝이 맞았던 건가? 그렇다고 칼과 카멜이 같은 결의 인간이란 뜻은 아니었다.

칼과 카멜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으니까.

“방법이 틀리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그를 비판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타인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라도 그 상황이라면 묵인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칼이 운이 더럽게 없었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산채를 잠시 방문한 그때 키메라 군단의 습격을 받았으니까.

습격 초반에 도주를 감행한 이들이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뭉쳤던 도적들과 달리 도주를 택했던 사람들.

칼 일행을 포함해서 감옥에서 오래 살아남은 이들인 것 같았다.

그들을 언급하자, 칼은 짧게 혀를 찼다.

“이번만큼은 대부분 잡혀갔을 거야. 우리조차 버티지 못했으니까.”

“강한 이도 있었습니까?”

“있긴 했지만, 우리가 가장 강했어.”

그런 칼 일행도 절반이나 잡혀간 상황이니, 이번 습격이 얼마나 갑작스레 이뤄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모였던 이들 중에 얼마나 살아남았을까? 난 그저 조용히 칼을 따랐다.

“…아지트가 여깁니까?”

“왜? 뭐 대단한 거라도 있을 줄 알았나?”

“뭐, 기대한 건 아닌데….”

아지트라고 해서 뭔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냥 숲 사이에 공터만 덩그러니 있는 장소였다. 습격에 바로 반응할 수 있게 시야가 확보되고 뒤쪽에 개울이 흘러서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장점 정도?

‘뭐, 충분한 건가?’

난 씻기 위해 개울가로 다가갔다. 슬라임 체액 냄새가 워낙 지독해서 말이지.

그건 칼도 마찬가지였는지 내가 웃옷을 벗고 체액을 씻고 있자, 곁에 걸터앉아 머리를 헹구고 있었다.

어째 자세가 힘들어 보였다.

한 팔이니 당연한 건가?

“도와줄까요? 불편해 보이는데.”

“팔이 없다고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신경 쓰지 마.”

몸을 씻으며 칼을 힐끗 바라봤다. 그가 웃옷을 벗자, 잘린 흉터가 훤히 드러났다.

난 말없이 그 흉터를 살폈다.

그의 정체가 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잘린 어깨의 흉터가 달리 보였다.

‘저게 붐(Boom)을 터트린 흔적인가.’

그는 붐(Boom)을 터트리고도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 대가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심장이 아닌 팔을 잃었다는 게 중요했다.

‘벌레 제거법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

벌레 제거법은 크룩스에게 무척 치명적인 약점이었기에 마스터는 전 조직을 동원해서 칼을 제거하려고 했다.

칼이 추적을 피해 라웁 숲까지 흘러들어 온 이유였다.

‘내겐 벌레를 제거할 기회가 온 셈이지.’

시선을 돌린 나는 머리를 빡빡 감기 시작했다. 동작과 달리 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칼 바스타인을 만나면서 계획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 * *

칼 일행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휴식을 취했고, 엘튼만 칼 근처에 머물며 자리를 지켰다.

칼은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나를 부르더니 개울 너머 큰 나무들이 즐비한 장소를 가리켰다.

“다른 장소로 던져지고 싶지 않으면 저 나무들 뒤쪽으로 넘어가지 마.”

“마법진 경계입니까?”

“경계를 알고 있어?”

“경계를 밟는 바람에 슬라임에게 먹혔거든요. 재수 더럽게 없었죠.”

“나에겐 천운인데?”

칼은 피식 웃으며 나무들 주변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바닥 부분에 굵직한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주변 경계선을 모조리 표시해 둔 것 같았다.

“경계선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면 쓸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어.”

“쓸만한 것?”

“우리처럼 재수 없게 흘러들어 온 인간이나, 들짐승들이 개울로 오는 경우가 제법 있거든.”

“인간이라면 어찌합니까?”

“바깥소식을 듣고 보내지.”

“그냥 보냅니까?”

“그게 우리에게 이득이니까. 대부분 산채로 흘러들어 가거든.”

“…….”

“어제 잡은 멧돼지가 있어. 먹을 복은 있네.”

“사냥도 합니까?”

“우릴 가둔 새끼는 우리가 먹고 자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지. 그런 면에서 이곳은 나름 명당이야.”

잠시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바깥소식이라….’

그러고 보니, 미치광이를 피할 생각만 했지. 그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똥은 피하면 된다지만, 이번 똥은 피하는 게 불가능하니, 자세히 알아봐야 했다.

“그 바깥소식이란 것 좀 알 수 있겠습니까?”

“바깥소식? 어떤 소식을 말하는 거지?”

“혹시 이 마법진을 만들고 괴물들을 보내는 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난 그 주인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이 모든 정보를 타인에게 오픈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칼과는 협력 관계 중이지만, 모든 것을 공유할 만큼의 동료는 아니었다. 그래서 칼이 알고 있는 정보에 맞춰서 행동할 적정선이 필요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놈이 있어.”

“누굽니까?”

“도미닉 후아튼. 마법사야.”

칼은 도미닉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바깥에 도미닉의 정보가 완벽히 풀렸다는 뜻인데,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도미닉이 토바른 지역 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건, 더는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고, 키메라 군단이 만족할 만큼 완성됐다는 의미였으니까.

“바깥 사람에게 들은 정보입니까?”

“그래.”

“언제 들었습니까?”

“이틀 전쯤? 괴물들과 함께 돌연 모습을 드러낸 녀석인데, 숲에서 활동하던 모든 도적의 씨를 말려버린 모양이야.”

아직 알려진 희생자가 도적 떼뿐이라, 큰 경계를 하지 않는 모습인데, 곧 토바른 전 지역이 도미닉, 한 마법사를 두고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생각보다 여유가 없는데?’

도미닉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판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상황에 맞춰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곧 토바른 전 지역을 아우르는 대전쟁이 펼쳐질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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