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0화 (30/130)

30화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나도, 칼도, 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아지트에 온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짙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시원한 들판, 밤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지옥을 경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는데, 엘튼이 주변 경계를 위해 암살자들을 호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들을 믿고 자도 괜찮은 걸까. 뒤통수치면 답이 없는데, 사실 알아도 답이 없는 건 똑같았다.

드르렁―!

“…….”

멀찍이서 대차게 코를 골며 자는 칼이 보인다.

괜한 걱정을 한 건가?

난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하암!”

라웁 숲에서 악몽 같았던 첫날이 지나갔다.

걱정했던 것이 무안할 만큼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개울가 소리.

새 지저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따스한 햇볕이 나를 반겼다.

그동안 벌어진 일들이 전부 꿈처럼 느껴질 정도.

이곳은 키메라만 없으면 평범한 숲과 같았다.

‘간만에 여유네.’

푹신한 풀에서 뒹굴거리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위에 걸터앉은 채 그는 엘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찰조가 복귀했습니다.”

“상황은?”

“제법 많이 살아남았습니다. 숨은 이들이 많아서 정확한 수는 파악이 힘든데. 오십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오십? 꽤 살아남았네.”

“전처럼 움직일까요?”

칼은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그동안은 방관을 유지한 채 새로 유입된 이들에게 정보만 얻어내며 조용히 지내왔다. 갇힌 이들과 다툴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그렇게 하자.”

“일단은… 입니까?”

“알다시피 상황이 변했거든.”

“저자 때문입니까?”

칼은 미소로 답했다.

무언의 긍정.

언제든 포지션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

엘튼은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들판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알이란 인간이 보였다.

‘저자에게서 뭘 보신 거지?’

괜찮은 실력이지만, 칼 님의 행동에 변화를 줄 만큼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인데, 그게 뭔지 궁금했다.

“녀석의 소지품은?”

“아무래도 확인이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

엘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칼은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어젯밤에 녀석이 자는 동안, 가방을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는데, 전혀 건들지 못한 것이다.

“접근조차 못 했다고? 네가?”

“기척 감지가 무척 뛰어납니다. 일정 거리 안쪽으로 접근하면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이는데, 더 접근하면 깰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그럼, 일행에게 물어본 것은?”

“다들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일행 대부분은 과거 크룩스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저 알이란 녀석의 신상명세를 파악하려고 했는데, 일행 중 아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럼 최근 1년 사이에 들어온 신입이란 뜻이잖아. 저 실력이 신입이라고?”

“정 의심스러우면 확인해볼까요?”

엘튼의 성격상 그 확인 과정이 부드러울 리 없다. 칼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건들지 마. 일단 지켜만 보자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말했잖아. 목숨을 빚졌다고. 좋게 좋게 가자고.”

“…사실이었습니까?”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은 확실하잖아. 기다려봐.”

엘튼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물러났다.

사람 보는 눈만큼은 눈앞의 사내를 따를 자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손을 흔들었다. 엘튼은 뒤를 돌아봤다. 알이란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코를 골며 잘도 자던데.”

“누가 말입니까? 제가요?”

“몰랐나? 조심해야 할 거야. 코골이 하는 암살자치고 오래 사는 걸 못 봤으니까.”

“혹시 나이가 몇입니까?”

“이제 마흔 중반 정도 됐지? 왜 묻나?”

“오래 사셨네요.”

“…?”

칼이 의문을 표하며 엘튼을 바라보자, 엘튼은 살짝 시선을 피했다.

이 아저씨, 진짜 모르는 걸까? 아무도 코골이를 얘기 안 해줬다고?

잡생각을 털어내며 배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에게 먼저 접근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고프다.

“먹을 거 없습니까?”

“그럴 줄 알고 준비해놨지.”

“정말입니까?”

“따라와.”

칼의 안내를 받은 곳에는 이미 다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 중이었다.

한쪽에 큰불이 피워져 있었는데, 칼은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불 속에서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 뒷다리가 보이자 절로 군침이 흘러나왔다.

엘튼은 다른 일행이 있는 바로 옆자리로 옮겨갔고, 나와 칼, 단둘이서 식사 자리를 가졌다.

칼이 구워진 부위를 단검으로 잘라 건넸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난 아기새처럼 칼이 주는 고기를 받아먹었다. 잠시 후, 잘 구워진 고기를 후후 불며 칼에게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이곳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이곳? 이 빌어먹을 곳은 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신 칼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시죠.”

“질문을 주고받자는 건가?”

“네.”

“제법 땡기는 제안이네. 좋아.”

칼은 쿡 찍어 올린 고기를 내려놨다.

두 달 하고 보름의 기억.

떠올릴수록 밥맛 떨어지는 기억이라, 오늘 식사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칼은 덤덤히 실험체 감옥의 경험을 풀어냈다.

난 조용히 식사하며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재밌었다.

소설 주요 등장인물의 외전을 듣는 느낌이랄까.

칼과 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기분이었다.

그 효과로 인해 소설 스토리와 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됐다.

‘크룩스 시절 때 입지가 꽤나 높았나 보네.’

추적을 피해 라웁 숲까지 오는 동안 그를 따랐던 암살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 정도면 크룩스 내 파벌이 있는 간부급은 되어야 한다. 하긴 붐(Boom)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려면 단장급 정도로는 안 된다.

예전에 내게 벌레를 먹인 사내만 봐도 단장보다 훨씬 강했다.

칼도 그 이상의 무력을 지녔을 것이다. 한쪽 팔을 잃기 전까진.

‘복수심을 품을 만하네.’

함께한 동료들이 다수 죽고, 한쪽 팔도 잃었다.

마스터를 죽이고 싶었겠지.

칼은 그 복수의 대안으로 학살자를 선택했던 것 같다.

칼은 마스터의 죽음을 원했고, 학살자는 에토르 점령 후 다음 욕망을 채워 줄 뛰어난 말을 원했으니까.

크룩스의 본진이 에토르에 자리했기에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맹약이란 긴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예로 이뤄진 소수 암살자 집단을 대동하고 학살자 앞에 나타났다고 했지.’

난 주변에서 식사하는 암살자들을 둘러봤다.

실험체 감옥에서 살아남은 저들은 지옥에서 벼려진 실력자들이었다. 엘튼을 보니 저들이 칼의 정예 전력인 것 같았다.

엘튼은 칼의 호위 암살자로 끝까지 함께했던 등장인물이었으니까.

긴 상념도 잠시,

칼이 괴물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입을 열고 있을 때, 그가 내뱉은 한 단어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베텔의 독?”

“표정을 보니 베텔의 독을 아는 눈치인데, 알고 있나?”

“이거 아닙니까?”

난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이곳으로 처음 흘러왔을 때, 도적들에게 강탈한 보랏빛을 띤 병이었다.

병을 살핀 칼은 두 눈을 반짝였다.

“베텔의 독이 맞아. 어디서 구했지?”

“괴물 습격 때 주변에 제법 굴러다니더군요. 일부 도적들의 품에도 있길래 혹시나 하고 족족 챙겨놨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벌거벗은 도적들을 말해야 하는데, 숨기는 게 좋았다. 그들 때문에 칼 일행이 좋은 꼴을 못 봤으니까.

“얼마나 더 있지?”

가방에서 십여 개의 병들을 쏟아내자, 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반응을 보니, 꼭 필요했던 물건처럼 보였다.

“그 난리에 용케 구했어.”

“필요한 겁니까?”

“생존 물품이니 많을수록 좋지.”

“생존 물품? 이게 말입니까?”

“이 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심장에 부담을 주는 독으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독을 알고 있다니 설명하기가 쉽겠어. 베텔의 독을 일정량 복용한 뒤 숨어 있으면 괴물들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있어.”

“발견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심장 활동이 비약적으로 줄어들면 죽은 것으로 판단하는 모양이야. 괴물들의 시선을 받지 않더군.”

“도적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까?”

“알아도 마나 유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어. 심장이 멈추면 죽을 테니까.”

“아….”

설마 그런 효과가 있을 줄 몰랐다. 그저 심장에 타격을 주는 단순한 독인 줄 알았는데.

소설 속에서도 얻지 못했던 정보.

하지만 이 독의 진짜 정보는 지금부터였다.

“이 독 때문에 내 인생이 단단히 꼬였지.”

“독 때문에 말입니까?”

“붐(Boom)의 해제법과 관련 있는 독이거든.”

“……!”

붐의 해제법.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정보였다.

난 다급히 물었다.

“호, 혹시 치료제입니까?”

“치료제는 아니야. 하지만 치료에 꼭 필요한 독이지.”

난 심장을 꽉 움켜잡았다. 베텔의 독은 심장의 박동을 급격히 줄여준다. 그 효과가 벌레에게 어떤 자극을 주는 모양이었다.

칼이 이 정보를 내게 알려준 의도가 뭘까.

그냥 알려줬을 리 없다.

“…….”

난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칼은 조용히 고기를 썰어 내 앞에 놔줬고, 난 말없이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잠시 후, 난 칼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 이야기를 제게 한 이유가 뭡니까?”

“그 전에 내 질문에 답해야지. 나만 이야기하면 억울하잖아.”

“물어보시죠.”

“크룩스에서 누구 밑에 있었지?”

“…….”

“신입이란 결론에 이르렀는데, 1년 신입치고 터무니없이 강해. 이유가 뭘까 고민해봤지.”

“답이 나왔습니까?”

칼은 대답 대신 단검을 들고 고기를 잘랐다.

불꽃에 붉게 물든 험상궂은 얼굴, 그 얼굴에 묻은 재 가루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코를 훔치며 고깃덩어리를 자르는데, 얼핏 보면 우둔한 곰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칼이란 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아니, 칼 자신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칼의 심리 상태나 행동 이유를 소설을 통해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칼은 곰 가죽을 둘러쓴 여우다.

그것도 아주 노련한.

이럴 땐 돌려 말하는 것보다 정면 돌파가 답이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붐(Boom).”

크룩스의 악질적인 벌레 폭탄. 붐(Boom).

붐을 언급하며 칼의 빈 소맷자락을 가리키자, 칼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그러곤 코웃음 치곤 나를 날카롭게 바라봤다.

“연기가 타고났는데? 역시나 나에 대해 알고 있었어.”

“크룩스 1급 암살 대상, 칼 바스타인.”

“하!”

“수년 전 붐(Boom)의 해제 방법을 알아낸 죄로 척살령이 내려졌다고 들었습니다.”

“누구에게 들었지? 붐과 관련된 정보는 기밀일 텐데.”

“크룩스 내에서 금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금줄? 누구 밑에 있었지?”

“마스터(Master).”

“…뭐?”

“마스터의 제자입니다.”

난 흘러가는 듯 답했지만, 주변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엘튼을 시작으로 그 주변에서 식사하던 암살자들이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스터의 직계라는 게 이들에겐 주적과도 같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귀도 밝네. 먹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었잖아.

오직 칼만이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덤덤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잠시 후, 칼이 가볍게 손을 들자, 암살자들은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지켜봤다. 칼에 대한 믿음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 같았다.

“간부도 아니고, 마스터라… 대답 잘해야 할 거다.”

“제자가 됐고, 버려졌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이유는?”

“반푼이 신비 각성자.”

“?”

“전 실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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