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2화 (32/130)

32화 광렙은 무슨

발을 떼기 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붉은 보석을 아십니까?”

“붉은 보석? 그게 뭐지?”

“괴물들의 몸속에 박혀 있는 반짝이는 돌 같은 겁니다.”

“괴물 몸속에 그런 게 있다고?”

칼의 반응에 난 미간을 좁혔다. 칼은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키메라와 수차례 맞닥뜨린 인물이었다.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면 분명 잡기도 했을 텐데.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물어본 건데, 칼은 생체 마석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키메… 아니 괴물들의 몸속을 확인해본 적이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 기회가 없었으니까.”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눈치 못 챘나?”

칼은 짧게 혀를 차곤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러곤 내게 물었다.

“어제 나와 함께 오는 동안 괴물들의 시체를 본 적 있어?”

“…아!”

칼의 말에 잊고 있었던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죽은 키메라를 들고 사라지는 키메라들의 습성.

생체 마석의 존재를 최대한 숨기기 위한 도미닉의 명령 체계인데, 학살자의 모략으로 마석의 존재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 깜빡하고 있었다.

“근데 붉은 보석에 대해 왜 묻는 거지?”

“아는 게 있나 해서요.”

“지금 가지고 있어?”

“네.”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 칼에게 던지자, 칼은 마석을 살펴보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상황에서 괴물의 시체를 가르고 있었다고? 제정신이야?”

“호기심이죠. 베텔의 독도 챙기지 않았습니까?”

“혹시 도벽이 있나? 미리 말해. 나중에 들키면 곤란해질 테니까.”

칼은 마석을 돌려주며 가보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이 마석의 효능을 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이기 힘들 텐데. 뭐, 칼에겐 큰 도움이 안 되는 물건이니 상관없으려나.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칼이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내 키보다 큰 갈대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갈대들을 헤치고 칼이 알려준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근처로 접근해 온다면 바로 알 수 있는 소리라서 마음에 들었다. 이동하길 잠시, 갈대숲 중심에 제법 큰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 말한 장소였다.

“괜찮네.”

주변을 둘러보니 사방이 빽빽한 갈대로 채워져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주머니에서 마석들을 털어냈다.

붉은 보석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중에 보랏빛을 띤 보석도 있었다. 거대 슬라임에게서 얻은 것인데, 기존 마석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보다 짙었다.

‘상급 키메라에게 쓰는 건가?’

붉은 보석 열 개, 보랏빛 보석 한 개.

일단 구성은 차고 넘치는데, 이걸 어찌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개의 붉은 보석을 잡고 단검 자루로 내려찍기 시작했다.

작은 알갱이가 될 때까지 난 쉴 새 없이 마석을 빻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먹 크기의 마석이 모래 알갱이처럼 변했다.

난 그중 일부를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반 개 분량 정도 되려나?

후―

이래도 되나?

소설 내용을 상기하며 한 짓이긴 한데, 단순히 읽었던 내용과 지금껏 경험했던 현실은 천지 차이였다.

뭐 하나 제대로 흘러간 게 있어야지. 이러다 진짜 뒈지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대안은 없어.’

짧게 숨을 내쉰 뒤 난 가루를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리자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곧 부드럽게 녹아내리며 속으로 흘러내렸다.

잠시 후, 불같은 기운이 가슴에서 용트림 쳤다. 동시에 활성화되는 마나 감각.

뜨거운 기운과 마나가 한데 섞이며 온몸을 누볐다.

난 제자리에 선 채 긴장한 표정으로 짙어진 기운의 흐름을 느꼈다.

생체 마석은 마나 과실보다 더 큰 효능을 지닌 마나 촉매제다. 제약이 있다면 3성 이상에겐 효과가 없다는 것.

마석의 기운이 3성 이상의 마나에는 무력화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인데, 반대로 1성이나 2성에는 엄청난 효과를 보였다.

‘치명적인 부작용만 뺀다면 말이지.’

마석의 기운이 3성급보단 약하지만, 그 이하보단 강하다.

즉, 마석의 기운에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팔다리, 몸통을 지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끈적한 기운.

잠시 후, 그 기운이 척추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왔다. 그 기세가 무척 매섭다. 난 주먹을 꽉 쥐었다.

온다!

쾅―!

“컥!”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코를 닦으니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짙은 고양감과 흥분, 쾌락이 올라왔다. 살의가 일어났다. 살점을 찢고, 먹고, 부수고 싶다.

다급히 손톱을 확인했다.

열 개의 손톱이 모두 붉다.

부작용 현상.

반 개가 이 정도라고?

시발, 한 번에 너무 많이 복용했나?

손톱은 곧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의 갈증 현상.

낭패 어린 표정으로 갈증을 억누른 채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다행이라면 손톱이 붉어져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신 방벽이 보호해 주는 건가?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데, 오른쪽 손등에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끈적한 느낌이 아닌 부드럽고 시원한 기운.

‘고대 문양!’

부르지도 않았는데, 은은하게 빛을 흘리며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 설마, 마석의 기운에 반응을 보인 건가.

번쩍―

빛을 소환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황금빛이 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동시에 찾아온 그때의 첫 느낌!

처음 문양을 얻었을 때의 포근함이 느껴지더니, 폭주하던 기운이 안정되어 갔다.

흥분이 가라앉고, 갈증이 사라졌다.

피 묻은 붉은 손톱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다시 문양으로 빨려 들어가는 황금 빛무리. 그 빛을 보며 난 무심코 한 단어를 내뱉었다.

“……정화(淨化)?”

불순과 악에 반응하는 정화의 기운.

내가 느낀 고대 문양의 능력이었다.

“하, 시발…….”

긴장이 풀리자,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온몸이 축축했다. 광인이 될 수 있겠단 두려움에 식은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생체 마석의 부작용.

이 유혹적인 물건은 초반에 가파른 등급 성장을 약속하지만, 잡아먹히면 피의 갈증으로 허덕이는 광인 신세로 전락한다.

훗날 수백 수천의 광인을 만들어낸 악마의 보석.

다만, 한 개는 극복 가능하다고 알려졌는데, 고작 반 개에 부작용을 겪다니.

‘1성이라서 그런 건가.’

2성과 달리, 1성은 복용 그 자체가 위험 수위인 것 같았다.

‘이젠 두려울 게 없어졌지만.’

정신 방벽으로 이성을 붙잡고, 문양의 힘으로 부작용을 없애면 몇 개라도 마석을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3성까진 고속 프리패스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광렙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칼 일행이 팔찌를 찾는 동안, 나는 마석 흡수에 집중했다.

안전장치가 있는데, 굳이 흡수에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흡수하고 나면 짙은 탈력감이 찾아왔는데, 그땐 하루를 마무리하고 아지트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흡수량은 하루에 한 개가 적당했다. 벌써 세 개를 흡수했는데 마나량이 늘어난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진짜 가성비 개 쓰레기네.’

소설에선 한 개의 마석만 복용해도 부작용만 버티면 등급이 오르는 악마의 보석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난 세 개를 처먹어도 여전히 1성에 머물고 있었다.

쌍욕이 나왔지만, 며칠 내로는 2성에 오를 것 같아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냈다.

마석 흡입을 시작한 지 다섯째 날이 지났다.

오늘도 하루 분량을 흡수하곤 아지트로 돌아와 칼을 찾았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 그리고 질문.

“어제 했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죠.”

“또?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시술이 늦어지니까 그렇죠.”

“뒈질 뻔한 경험을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좆같은 일인지 알아? 엘튼이랑 놀라고.”

“저 타 죽는 거 보시려고요?”

난 남은 시간에 칼을 집요히 괴롭혔다.

칼은 십수 년간 죽음과 싸워 지냈던 인물이다. 그 몸에 새겨진 상처들만 봐도 그의 굴곡진 인생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위기 감별사’란 특성이 괜히 생긴 게 아닐 거다.

그만큼 칼은 위기관리 능력과 상황 처세술이 뛰어났다.

난 그를 통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칼은 무척 귀찮은 듯 툴툴댔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태도 때문이다.

이래 봬도 열띤 교육열로는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대한민국 인재였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남다르니, 가르치는 맛이 날 거다.

확실히 칼은 좋은 스승이었다.

* * *

“광렙은 무슨, 렙업 한번 더럽게 더디네.”

일주일이 지났을 때, 난 드디어 2성에 올랐다.

마석을 무려 여섯 개나 복용하고 이룬 쾌거였다.

마스터가 날 버린 이유를 피부로 팍팍 느낄 수 있었다.

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은 진짜 쓰레기였다.

우웅―!

난 눈부시게 빛나는 단검을 응시했다. 인챈트에 담긴 날카로움이 훨씬 뚜렷해졌다.

익힌 속성이 있다면 여기에 덧씌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속성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돈과 시간만 있다면 익힐 수 있는 속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양의 빛도 더욱 진해진 것 같고.’

빛의 범위도 기존보다 배는 늘었다.

1성에서 2성이 된 것뿐인데, 능력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졌다.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한데, 왜 한숨이 먼저 나올까.

“3성이 두렵다. 시발.”

남은 마석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고, 보랏빛 마석에 기대를 걸고 있는데, 어찌 될지 잘 모르겠다.

마석을 또 모아야 하나.

솔직히 얼마나 더 처먹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난 생각을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오늘은 일찍 아지트로 돌아가 칼을 더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이제 그도 은근히 괴롭힘당하는 걸 즐기는 느낌인데 말이지.

부스럭― 부스럭―

그때 멀찍이서 갈대 마찰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인상을 구기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까아아아악!”

여인의 비명 소리.

절박하게 외치며, 반쯤 찢어진 옷을 붙잡고 도망가는 여인이 보였다.

미모가 제법 반반해서 한눈에 띌 정도였다.

난 갈대숲 사이에 숨은 채 그 모습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저년은 저기서 또 저 지랄이네.”

“사, 살려주세요!”

도움을 구하는 애처로운 목소리.

난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봤다.

“무, 무슨 일입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여인의 외침을 듣고 사내들이 숲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또 걸려들었다.

사내 셋으로 구성된 파티였는데, 용병으로 보였다. 그들은 여인을 발견하곤 한달음에 여인 곁으로 몰려들었다.

찢긴 여인의 옷자락에 눈을 흘기며 만지작거리는데, 좋은 의도로 다가온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인에게 동정을 느끼느냐?

“또 낚였네.”

내 말이 끝난 순간, 여인이 흐느끼듯 주저앉았다. 순간, 여인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용병들이 당황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화살 세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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